마르크스주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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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마르크스주의 문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문화 산업’이라는 명명(글의 부제: ‘대중적 기만으로서의 계몽’)이 이미 암시하듯이, 아도르노에 따르면 현대 문화는 대중에 의해 창출된 문화(‘대중 문화’라는 말이 가져다주기 쉬운 오해)가 아니라 자본가의 이윤 추구의 동기가 실현되는 하나의 중요한 산업에 불과하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과거의 위대한 예술 작품이 지녔던 ‘전체와 부분들 사이의 긴장’은 사라져버렸으며, 이제 텔레비젼 연속극, 영화, 유행가 등의 형태로 생산되는 문화 산업의 상품들은 기존의 질서를 넘어서는 그 어떤 요소도 갖지 않는다. 이미 정형화되어있는 틀, 사랑 이야기, 팝송 등의 틀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오직 타락된 형태의 개그, 그것도 이미 계산된 개그의 형식으로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문화 산업이 그 생산 규격과 틀에 적합하지 않은 것들을 제거하는 것은 선진 산업 사회를 지배하는 ‘기술적 합리성’과 맥을 같이 한다.
뢰벤탈(Lowenthal)이 지적하듯 ‘혁명적 경향이 조금이라도 고개를 쳐들게 되면 부나 모험, 정열적 사랑, 권력, 선정주의와 같은 거짓 충족을 주는 것에 의해 진정되고 또 절단’되는 것이 현실이다. 한마디로 문화 산업과 그 산물의 대중적 수용은 사회 권위의 유지와 대중의 체제 내 순응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선진 산업 사회의 자율성을 상실한 개인들, 소외된 개인들에게서는 개인적 ‘취미’라는 자유주의적 개념조차 무의미하다.
현대 사회의 문화, 즉 대중 문화를 바라보는 마르쿠제의 시각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일차원적 인간에서 마르쿠제는 오늘날의 선진 산업사회는 한마디로 일차원적인 인간을 양산해내는 일차원적인 사회이다. 즉 일차원성이 인간 존재의 제 현상을 총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지배와 종속, 착취와 억압이 존재하는데 과연 이러한 일차원적인 태도, 순응적 태도는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그에 따르면, 관료제와 기술적 합리성에 의해 지배받는 현대 사회의 체계가 인간 개개인의 욕구와 태도, 기호마저도 조작해낸다는 것이다. 즉 기존 체제에 대해 부정적인 세력을 사회 체제 내로 통합해 내는 것은 물론이고 문화의 영역에서도 동일한 통합을 이루어낸다. 상품과 광고, 미디어 등은 일정한 수준 이상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선진 사회의 노동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인위적인 욕구, 즉 소비의 욕구에로 치닫도록 조작하고, 그러는 가운데 기존의 가치나 질서를 초월하려는 목적이나 희망은 현 체제에로 흡수해버린다.
마르쿠제 역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정통’ 문화가 일정한 비판적 능력과 전복적 부정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현대의 문화 산업은 이러한 전통 문화의 부정성을 기존 질서에 통합시켜 버린다. 물론 과거의 고급 문화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독점되던 것에 비하면 오늘날에는 문화의 민주화(고급 문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부엌의 배경 음악으로 들리는 바하의 음악이나 잡화상에서 팔리는 플라톤과 헤겔에게는 그 고전의 진실한 힘이었던 ‘부정하는 힘’과 ‘불화’라는 성격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화론은 한마디로 현대의 대중 문화(문화 산업)가 문화(정통 문화)의 고유한 가치를 위협할 뿐 아니라 노동 계급의 정치성을 희석시켜 종국에는 사회적 권위의 뼈대를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는 이유에서 이를 공격하고, 구체적인 문화적 사례의 연구에 이 관점을 확대 적용한다. 예컨대 아도르노가 ‘진지한 음악’과 대비해서 대중 음악의 본질적 특징을 ‘규격화’, 수동적 청위 조장, 사회적 접착제로 규정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이러한 대중 문화론은 현대인의 일상 생활 구석구석까지를 넘보는 문화 자본의 위력과 그 실상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함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 역시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대중 문화가 그토록 획일적이고 단조로운가 하는 반론이 있다. 위에서 거론한 대중 음악의 예를 들자면, 50년대말에서 60년대에 걸친 록큰롤, 비틀즈, 반전 가요, 그리고 70년대의 펑크록, 1980년대의 랩음악 등을 아도르노의 말처럼 과연 동일성, 반복성, 획일성 등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또 대중 음악의 소비가 그렇게 수동적인가에 대해서도 반론이 제기된다. 아도르노는 현대의 대중 음악은 청자의 ‘청음 능력’조차 무비판적이고 순응적으로 ‘퇴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문화 산업의 산물들이 허다하게 생산됨에도 그 대부분이 도태되고 있는 현실>을 들어 소비가 생각보다는 적극적임을 지적하는 많은 반론들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연구자들이 파시즘과 전후의 냉전기라고 하는 광기의 시절에 그들의 연구를 진행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이 현대 문화를 소위 전면적으로 조작된 문화, 체제 순응의 문화로 보았다든가 그나마 문화적 해방의 가능성을 모색할 때에도 극단적인 체제외적인 국외자들에게서나 찾아보려 했던 태도도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문화 상황을 과연 그렇게만 봐야 하는가. 오히려 현대의 대중 문화에는 그 부침이 있지만, 일정한 갈등과 투쟁 또는 저항이 스며들어있지 않은가.
4. 대안적 모색: 헤게모니론의 확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
안토니오 그람시는 서구 맑스주의의 일반적 특징(자본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무관심, 혁명에 대한 낙관론 배격, 독단주의 반대, 문화에 대한 관심 등)을 공유하면서도 한가지 중요한 점에서(즉 문화적 상부 구조의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간주하였다는 점에서) 여타의 사람들과 구별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거나 전복시키는 문제와 관련하여 상부 구조를 이론화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적되기를 그람시의 독특한 이론적 업적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기존 맑스주의적 해석의 난점을 ‘헤게모니’ 이론을 통해 극복한 데에 있다. 그는 서구의 선진 자본주의 사회가 간헐적인 위기를 맞이하였음에도 계속해서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를 다름아닌 부르주아 사회의 ‘헤게모니’를 추적해냄으로써 밝혀냈다. 여기서 헤게모니란 물리적 강제와 힘으로서의 통치와는 달리 ‘지적, 도덕적 지도력(leadership)’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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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5.22
  • 저작시기2006.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1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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