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본론
1) 고대 사회의 국난극복정신
▶고구려의 수․당과의 전쟁
▶ 발해의 대외관계
2) 고려의 국난극복정신
▶거란의 침입과 격퇴
▶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 몽고와의 전쟁
▶ 홍건적의 침입
▶ 왜구의 침입
3) 조선의 국난극복정신
▶ 임진왜란
▶ 정묘호란, 병자호란
4) 근현대의 국난극복정신
▶ 병인양요, 신미양요
▶ 의병 항전
▶ 3.1 운동
3. 맺음말
2. 본론
1) 고대 사회의 국난극복정신
▶고구려의 수․당과의 전쟁
▶ 발해의 대외관계
2) 고려의 국난극복정신
▶거란의 침입과 격퇴
▶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 몽고와의 전쟁
▶ 홍건적의 침입
▶ 왜구의 침입
3) 조선의 국난극복정신
▶ 임진왜란
▶ 정묘호란, 병자호란
4) 근현대의 국난극복정신
▶ 병인양요, 신미양요
▶ 의병 항전
▶ 3.1 운동
3. 맺음말
본문내용
으라고 강요한다면 그마저도 내주시겠습니까? 옛 나라도 그렇기만 태조께서 이 나라를 건국하신 이래 우리 영토를 다른 나라에 내준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라에게 굴복하여 영토를 내준다면 자손만대의 치욕이 될 것입니다.\" 서희는 요나라 군사들이 더 이상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고 계속해서 항복만을 요구해 오는 것을 보고 그들의 속셈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때 민관어사 이지백이 서희의 의견에 찬성하면서 중국풍을 즐기는 성종을 은근히 꼬집고 나섰다. \"차라리 금은보화를 소손녕에게 주고 그의 속마음을 타진해 보는 것이 어떠합니까? 국토를 경솔히 적국에 할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선대로부터 전해오던 연등회나 팔관회 등의 국가적 행사를 다시 거행하고 다른 나라의 풍습을 멀리함으로써 나라를 보전하고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성종은 서희와 이지백의 주장을 듣고 자신이 한순간 잘못 생각한 사실을 부끄러워하며 요나라와의 화의를 취소했다. 이렇게 칼이 아니라 언변술로 거란의 1차 침입을 막아냈고 강동육주를 설치하여 국경을 압록강까지 확장하였다. 이후 거란군이 퇴각한 뒤 고려는 송과 친선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거란과 교류를 하지 않았다. 이에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강동 6주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면서 40만 대군으로 다시 침입해 왔다. 개경이 함락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거란군의 뒤에서 양규가 선전하였다. 이에 거란군은 퇴로가 차단될 것을 두려워하여 고려와 강화하고 물러갔다. 거란의 성종은 고려 측이 강화를 요청해오자,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물러갔다. 하지만 고려가 친조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거란의 강동 6주를 반환 요구를 거부하자 개경 부근까지 침입해 온 거란은 도처에서 고려군의 저항을 받고 퇴각하던 중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거란군은 흥화진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곳에서 패배했지만, 자주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연주·위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으며,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고,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듯 고려가 거란의 계속되는 침략을 막아내자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공격할 수 없었고, 송을 침입할 수도 없었다. 결국 고려가 거란과 싸워서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 거란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고려는 국방을 강화하는데 더욱 노력하였다. 현종 대 강감찬의 주장으로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고, 북쪽 국경 일대에 장성을 쌓아 거란은 물론 여진의 침입까지 방어하려 하였다. 이것이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이다. 또한 문화사업에서 7대 신록이 편찬되고 거란군 격퇴를 기원하는 초조 대장경이 조판되었다.
▶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분산되었던 여진은 11세기 후반에 이르러 통일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숙종 때 북만주 완옌부의 추장 영가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북간도 지방으로 세력을 뻗쳐 왔고, 뒤를 이은 우야소는 다시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하여 있던 동여진을 아우르게 되자, 정주를 경계로 고려군과 충돌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임간을 시켜 여진을 정벌하려 했으나, 오히려 크게 패하였고, 뒤를 이은 윤관의 북벌군도 여진의 기병에 패하여 철수하였다. 기병 중심의 여진군 을 보병 중심의 고려군이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이를 계기로 고려는 윤관의 주도로 별무반을 창설하였다. 별무반은 기병 부대인 신기군, 보병 부대인 신보군, 승병 부대인 창마군으로 구성되었다. 신기군은 문무 산관과 서리로부터 상인, 노복에 이르기까지 말을 가진 자로 편성하였고, 말을 가지지 않은 자와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과거 응시자가 아닌 사람은 신보군에 편승시켰다. 여진 토벌은 예종 때에 이르러 단행되었다. 예종 2 년 12월에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하는 17 만의 출정군은 천리 장성을 넘어 여진족의 거점인 함흥 평야와 그 이북 지방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였다. 고려는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이주시켜 이곳을 개척하여 살게하고 9성을 수축하였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은 함주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238가구, 웅주에 성곽 992 칸과 이주민 1,436가구, 복주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에 성곽 670칸, 이주민 680 가구, 공험진에 이주민 532가구로서, 이 6성 외에 이듬해에는 숭녕·통태진양의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동북 9성의 설치가 완결되었다. 특히 함흥 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를 두어 이곳 이 가장 요충이 되었다. 그러나 거처를 잃은 여진족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인한 방비의 곤란, 서북쪽 거란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 및 여진의 환부 애원으로 고려는 9성을 1년 7개월 만에 다시 여진족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후 여진족은 더욱 강성해져 만주 일대를 장악하면서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거란을 명한 뒤 고려에 군신관계를 맺고자 압력을 가해 왔다. 고려는 그들의 사대 요구를 둘러싸고 정치적 분쟁을 겪기도 하였지만 현실적으로 금과 무력 충돌을 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결국 금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당시 집권자인 이자겸은 정권 유지를 위하여 금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태조 이래의 북진정책은 사실상 좌절되었으며 고려 귀족 사회의 분열을 가속화시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야기시켰다.
▶ 몽고와의 전쟁
13세기 초 중국 대륙의 정세는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고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금을 공격하여 북중국을 점령하고, 거란족을 복속시켰다. 또한 금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대요수국을 세우고 두만강 지역에서 동진국이 등장하였다. 이 무렵 몽고에
▶ 여진 정벌과 9성 개척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분산되었던 여진은 11세기 후반에 이르러 통일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숙종 때 북만주 완옌부의 추장 영가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북간도 지방으로 세력을 뻗쳐 왔고, 뒤를 이은 우야소는 다시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하여 있던 동여진을 아우르게 되자, 정주를 경계로 고려군과 충돌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임간을 시켜 여진을 정벌하려 했으나, 오히려 크게 패하였고, 뒤를 이은 윤관의 북벌군도 여진의 기병에 패하여 철수하였다. 기병 중심의 여진군 을 보병 중심의 고려군이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이를 계기로 고려는 윤관의 주도로 별무반을 창설하였다. 별무반은 기병 부대인 신기군, 보병 부대인 신보군, 승병 부대인 창마군으로 구성되었다. 신기군은 문무 산관과 서리로부터 상인, 노복에 이르기까지 말을 가진 자로 편성하였고, 말을 가지지 않은 자와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과거 응시자가 아닌 사람은 신보군에 편승시켰다. 여진 토벌은 예종 때에 이르러 단행되었다. 예종 2 년 12월에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하는 17 만의 출정군은 천리 장성을 넘어 여진족의 거점인 함흥 평야와 그 이북 지방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였다. 고려는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이주시켜 이곳을 개척하여 살게하고 9성을 수축하였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은 함주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238가구, 웅주에 성곽 992 칸과 이주민 1,436가구, 복주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에 성곽 670칸, 이주민 680 가구, 공험진에 이주민 532가구로서, 이 6성 외에 이듬해에는 숭녕·통태진양의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동북 9성의 설치가 완결되었다. 특히 함흥 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를 두어 이곳 이 가장 요충이 되었다. 그러나 거처를 잃은 여진족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인한 방비의 곤란, 서북쪽 거란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 및 여진의 환부 애원으로 고려는 9성을 1년 7개월 만에 다시 여진족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후 여진족은 더욱 강성해져 만주 일대를 장악하면서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거란을 명한 뒤 고려에 군신관계를 맺고자 압력을 가해 왔다. 고려는 그들의 사대 요구를 둘러싸고 정치적 분쟁을 겪기도 하였지만 현실적으로 금과 무력 충돌을 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결국 금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당시 집권자인 이자겸은 정권 유지를 위하여 금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태조 이래의 북진정책은 사실상 좌절되었으며 고려 귀족 사회의 분열을 가속화시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야기시켰다.
▶ 몽고와의 전쟁
13세기 초 중국 대륙의 정세는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고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금을 공격하여 북중국을 점령하고, 거란족을 복속시켰다. 또한 금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대요수국을 세우고 두만강 지역에서 동진국이 등장하였다. 이 무렵 몽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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