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 지워진 이름 정여립, 정여립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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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사 지워진 이름 정여립, 정여립 (논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서론
1. 역사는 과연 승자만을 위한 기록인가

Ⅱ. 본론
1. 정여립의 생애
1)敗者의 역사- 鄭汝立
2) 패자의 역사 정여립 2
3) 기축옥사의 발단. 금산사 자락의 제비산으로
2. 대동계 그만의 대동세상
3. 기축옥사의 전개
1) 기축옥사를 통하여 생긴 인명피해
4. 정여립의 사상
1) 풍수지리설과 정감록
2)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여립
3) 그가 꿈꾸던 이상사회
4) 대동사상
5. 조작설과 모반설

Ⅲ.결론

본문내용

일 것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특히 동인들은 정여립의 역모를 믿지 않았으며, 이길은 정여립의 도망을 장검의 망명에 비유했다. 장검은 시왕의 노여움을 받아 죄 없이 도망을 다녔던 후한의 명인이었으므로, 정여립의 무죄를 확신하지 않고서는 발설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역모 사실을 믿지 않았다.
초기의 기축옥사는 그야말로 엉성하기 짝이 없는 채로 진행되고 있었다. 정작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면 지역의 관찰사나 어느 소속 군부대가 연루되었든지 해야 하는데, 모반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백성들 두어 사람을 잡아 문초하는 것으로 역모사건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실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이 막상 이렇게 되자 선조는 정여립의 역모를 믿지 않게 되었다. 선조는 정언신에게 \"우의정의 말대로 이번 고변 사건은 실없는 소동 같소. 정여립이 붙들려 오면 대질이나 시키고 방면해 보냅시다\"라고 말한 후, 신하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백유양의 아들 진민은 10여 명의 친구들과 더불어, \"해서 수령들이 절반이고 그곳에는 이이의 제자들이 많으니 아마도 이번 고변은 반드시 그들이 꾸민 일일 것이다. 이제 곧 정수찬이 올라오면 우리들이 소를 올려 그 원통함을 호소하자\"고 공모하여 대표자까지 내정했었다. 그리고 정여립을 잘 알고 있었던 관원들 또한 \"큰 나무가 바람을 맞듯이 사람도 뛰어나면 모함을 받는 것이다\"라면서 세상을 한탄했고, 동인측 사람들은 \"은퇴했던 정여립이 임금이 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반역을 했을 리가 없다\"라고 했다. 이덕일, 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 272-273p
이처럼 \"동인세력이 막강한데 무슨 반역이냐\"고 되묻는 사람들과, \"방약무인하고 오만방자한 정여립이 임금이 되기 위해 반역을 꾀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서인측 사람들이 맞서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동서인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사태가 어떻게 발전하고 어떻게 수습될 것인가에 많은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될 것 같다는 선조나 동인측의 예상과는 달리 옥사는 급속히 확대되었다. 양사의 건의에 따라 정여립의 조카 이진길을 사관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하옥시켰으며, 10월 11일에는 정철이 고향에서 올라와 선조에게 숙배한 후에 비밀히 차자를 올렸다. 차자의 내용은 속히 역적을 체포하고 서울에 계엄령을 내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선조는 \"경의 충절은 익히 알겠다. 의논하여 처리하리라\"고 했다. 이어 14일에는 독포어사 정윤우,이대해,정수남 등을 삼남에 내려보냈고, 15일에는 황해도에서 잡혀온 정여립의 일가 이기 등에게 정여립과 공모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사형을 집행했으며, 17일에는 안악군수 환언륜,방의신 등이 역모를 자백하여 처형됐다. 지워진 이름 정여립 - 신정일 ; 조선시대 조선사람들 - 이영화;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 김재영; 조선사회사총서 조선의 공신들 - 신명호
진안현감이 포졸을 풀어 체포에 나서자 정여립의 일행은 낮에는 숨고 밤에 도주하여 진안 서면 죽도의 짚더미 속에 숨어 있으면서 3일동안 익은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음식을 구하러 나왔다가 주민에게 발각되었다 정여립은 사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선 칼로 변숭복을 먼저 베고 다음에 아들 옥남을 베었는데 옥남이 칼날을 피했으므로 죽이지 못했다. 정여립은 즉시 칼을 땅에 거꾸로 꽂고 목을 늘여 꽂아 죽으니 그 소리가 소 울음소리 같았다 신복룡, 논문 : 정여립의 생애와 사상 호남 phobia 을 읽는 한 도구로서, 한국정치학회보, 33권, 1호, 103p
정여립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혹이 많다.
우선 민인백 본관 여흥. 자 백춘(伯春). 호 태천(苔泉). 시호 경정(景靖). 1589년 진안현감(鎭安縣監)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난을 평정하여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황주목사(黃州牧使)로서 왕을 호종하였고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8년 여양군(驪陽君)에 봉하여졌다. 저서에 《태천집(苔泉集)》이 전한다.
의 토역일기에서는
\"정여립이 늘 점치기를, 경인년(1590)은 보통 길하고 임진년(1592)은 크게 길하다고 하며, 홍문관원이 된 지 여러 해가 지나 성사시키기 어려우니, 천명에 따라 경인년에 거사하는 것이 가하기에 경인년 정월 모일 전주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군기와 군량은 가지고 있는 것과 각 관에 있는 것을 빼앗아 쓴다. 전주관원과 전라도 감사 수령들은 금부도사를 가칭하여 모두 죽인다. 천안을 통해 한강까지 가는데, 홍제원에서 모여 진을 치고 용산의 서강창미를 군량으로 쓸 수 있다. 오랫동안 싸우지 않고 기다리며 진을 풀지 않는다. 한양성 밖의 군량과 수운을 통해 오는 팔도 군량이 모두 우리들 것이 된다. 성 안의 사람들과 말이 굶어죽게 되면 세의 어려움을 알아 스스로 성문을 열 것이고, 또 변사邊泗가 무리를 이끌고 성 안에 숨어들어가서 내부 동조자 황억수黃億壽 등과 더불어 병조판서를 죽인다. 종루 앞에 진을 치고 병조의 동서화약고를 쳐서 불지른다.\"
그리고 이어서 정여립의 최후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칼을 가진 자가 말하기를, \'전주의 천 명 만 명이나 되는 군사들 속에서도 능히 몸을 피해 도망쳐왔다. 지금 이곳의 군사는 불과 200명도 되지 않아 칼로 휘둘러치면 탈주할 수 있다\' 했다. 그러나 정여립은 \'저들이 활을 겨누고 있어서 탈주할 방도가 없으며, 어찌 무고한 양민을 죽일 수가 있겠는가. 우리들이 자결하는 것만 못하다\' 하며, 돌아서서 한 사람이 짚고 있는 칼을 빼앗아 턱 밑을 치켜올려 살이 찢어졌다. 정여립이 그자에게 다시 다가가자 그자는 목을 내어 칼을 받고 쓰러졌다. 칼이 번득일 때마다 한 사람씩 쓰러졌다. 정여립은 마침내 칼을 땅에 거꾸로 꽂은 후 칼에 목을 박았다. 바로 군사들을 독려하여 서둘러 가보니 정여립은 몸을 번득여 크게 부르짖기를 마치 소가 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죽었다. 칼을 빼자 칼 구멍으로 피가 흘러나왔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으나 달빛은 없었다. 정여립과 한 사람은 완전히 죽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아직 생기가 있었다. … 바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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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6.06
  • 저작시기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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