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머리말
Ⅰ. 人口增加와 그에 따른 사회문제
Ⅱ. 廣西地方의 상황
Ⅲ. 拜上帝會의 성립과 발전
1. 홍수전-좌절 속에서 기독교와의 첫만남
2. 배상제회의 성립과 발전
Ⅳ. 廣西蜂起의 구호
맺음말
참고문헌
Ⅰ. 人口增加와 그에 따른 사회문제
Ⅱ. 廣西地方의 상황
Ⅲ. 拜上帝會의 성립과 발전
1. 홍수전-좌절 속에서 기독교와의 첫만남
2. 배상제회의 성립과 발전
Ⅳ. 廣西蜂起의 구호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지만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는 바람에 上海가 개항하였고, 광동성의 무역항으로서의 가치는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광동성의 背後地 역할을 하고 있던 광서성마저 같은 衰落의 길로 빠지게 된 것이다. 광서성에서는 당시 壯族이나 瑤族과 같은 소수민족들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고, 하층민들은 무장집단을 구성하기도 했다. 天地會와 같은 비밀결사의 반란도 끊임없이 광서성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광동성에서 이주해 온 客家들은 자기들만의 언어와 풍습을 가지고 광서성으로 흘러들어와 있었는데, 그들보다 먼저 광서성으로 이주해 온 本地人들과의 마찰이 심화되고 있었다. 본지인들은 향촌지주들을 중심으로 團練이라는 조직으로 객가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객가는 소외계층이었고 구심점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홍수전의 拜上帝敎였던 것이다.
Ⅲ장에서는 배상제회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홍수전은 廣東省 花縣에서 객가 출신의 中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때부터 꾸준히 과거를 준비해왔지만 낙방을 거듭하고 말았고, 어느 날 광주의 시장에서 『勸世良言』이라는 양아발이 쓴 기독교 선교 책을 얻었다. 그는 책을 읽고 나서 환몽을 꾸게 되는데, 꿈속에서 여호와가 자신에게 사명을 내리면서 현세의 妖魔를 무찌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환몽을 꾸게 된 이후부터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 지상천국을 건설하고 요마인 청조를 타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는 동향의 친구인 풍운산을 개종시켜 광서성의 산간지방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향촌사회에서 소외받고 있던 객가들을 개종시켜 나가면서 세력을 확장하였고 신도들이 상당수 모이자 새로운 종교조직이자 비밀결사의 형태를 띠었던 拜上帝會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광서성에서 새로운 지도자들이 浮上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양수청, 소조귀, 위창휘, 석달개 등이었다. 그들은 홍수전이 부재할 때마다 자신들이 상제와 홍수전의 종교적인 권위를 대신하면서 신도들을 이끌었고 회원들은 끈끈하게 뭉쳐나갔다. 그리고 향촌사회의 조직인 단련과 무장충돌이 잦아졌다. 결국, 1850년에 광서성의 배상제회원들은 紫荊山 근처 金田村으로 소집하여 봉기를 준비하였다. 남녀회원들은 가옥과 재산을 처분하여 공동재산으로 삼았고 개인의 소유는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남자는 男營, 여자는 女營으로 편제되서 군사조직으로 삼았다. 마침내 청군과의 충돌 속에서 배상제회 지도자들은 홍수전을 중심으로 국호를 太平天國이라고 하고 天王으로 홍수전을 꼽았다. 아직 불완전한 정치적 구현체였지만 태평천국의 군대는 강력하였다.
Ⅳ장에서는 광서봉기의 구호를 알아보았다. 광서봉기에서 제기된 口號는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劫富濟貧, 사회의 구현을 내세우는 替天行道, 개인적 원한을 갚고자 하는 回鄕報仇, 천지회의 전통적 구호인 反淸復明, 그리고 관리의 폭정에 반대하는 殺官留民 등이 있었다. 광서봉기가 대부분 천지회 봉기라고 본다면 당연히 반청복명이라는 구호가 활발하게 제기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미 사회적 불평등, 경제적 착취의 정도가 심화된 상태 속에서 피지배계급에 대한 봉건적 수탈을 자행하였던 明朝의 회복을 주장하는 반청복명 구호는 설득력이 없어졌고, 따라서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거나 사회정의를 구현하자고 하는 구호가 보편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늘을 대신해서 정의를 실현시키겠다는 체천행도의 구호는 이미 北宋 末에 제기된 것이었고, 水滸誌의 내용에 친밀감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은 당시의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현실 속에서 이 구호를 자연스럽게 제기하였다. 개인적 원한을 갚으려는 구호도 그것이 단지 개인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현실 속에서는 그와 같은 원한이 봉기민중에게 공감을 주는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합리화되었다. 또한 도적보다 더 탐욕스럽다는 광서지방 관료의 가혹한 민중수탈은 살관류민이라는 反官的인 구호를 제기하게 하였다. 특히 張嘉祥의 군대가 하층민의 참가를 촉구하며 내걸었던 구호에는 지주 등 지배계급의 착취를 부정하면서 그들이 착취해 간 잉여생산물을 생산자가 되찾겠다는 사상이 표현되고 있다. 동시에 지주제의 모순된 생산구조도 부정되고 있다. 이러한 구호들을 통하여 광서민중봉기가 反支配階級的이며 반관적 지향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태평천국운동의 원인을 광서지방을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나름대로 광서지방을 중심으로 태평천국운동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면서 논지를 이끌어 나갔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당시 광서지방의 상황은 社會的으로나, 政治的으로나, 經濟的으로나 심각했고, 민중들은 종교라는 대상에 의지하여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결국에는 태평천국운동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폭발하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요인들을 충족시킨 것은 광서지방이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광서지방에서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광서봉기가 어떤 근거로 태평천국운동의 발생배경이 되었는가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광서봉기와 태평천국운동의 관련, 영향 등이 앞으로도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講座中國史4』. 지식산업사. 1989.
________________________. 『講座中國史5』. 지식산업사. 1989.
________________________. 『講座中國史6』. 지식산업사. 1989.
참고논문
金誠贊. 「太平天國 拜上帝 集團의 性格에 대한 社會史的 理解에의 一展望」.『동양사학연구』Vol.45. 東洋史學會. 1993.
朴基水. 「太平天國 이전(1830~1850) 廣西民衆蜂起」.『동양사학연구』.Vol.31. 東洋史學會. 1989.
全海宗. 「太平天國亂의 動機와 性格에 對한 考察」.『역사학보』.Vol.3. 역사학회. 1952.
鄭 先. 「太平天國에 관한 一考察」.『이대사원』Vol.18-19. 1982.
崔震奎. 「太平天國과 上帝敎-建國過程에서의 理念을 中心으로」.『동양사학연구』.Vol.55. 東洋史學會. 1996.
崔震奎. 「太平天國 上帝敎와 傳統宗敎」.『전남사학』.Vol.18. 전남사학회. 2002.
Ⅲ장에서는 배상제회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홍수전은 廣東省 花縣에서 객가 출신의 中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때부터 꾸준히 과거를 준비해왔지만 낙방을 거듭하고 말았고, 어느 날 광주의 시장에서 『勸世良言』이라는 양아발이 쓴 기독교 선교 책을 얻었다. 그는 책을 읽고 나서 환몽을 꾸게 되는데, 꿈속에서 여호와가 자신에게 사명을 내리면서 현세의 妖魔를 무찌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환몽을 꾸게 된 이후부터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 지상천국을 건설하고 요마인 청조를 타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는 동향의 친구인 풍운산을 개종시켜 광서성의 산간지방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향촌사회에서 소외받고 있던 객가들을 개종시켜 나가면서 세력을 확장하였고 신도들이 상당수 모이자 새로운 종교조직이자 비밀결사의 형태를 띠었던 拜上帝會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광서성에서 새로운 지도자들이 浮上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양수청, 소조귀, 위창휘, 석달개 등이었다. 그들은 홍수전이 부재할 때마다 자신들이 상제와 홍수전의 종교적인 권위를 대신하면서 신도들을 이끌었고 회원들은 끈끈하게 뭉쳐나갔다. 그리고 향촌사회의 조직인 단련과 무장충돌이 잦아졌다. 결국, 1850년에 광서성의 배상제회원들은 紫荊山 근처 金田村으로 소집하여 봉기를 준비하였다. 남녀회원들은 가옥과 재산을 처분하여 공동재산으로 삼았고 개인의 소유는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남자는 男營, 여자는 女營으로 편제되서 군사조직으로 삼았다. 마침내 청군과의 충돌 속에서 배상제회 지도자들은 홍수전을 중심으로 국호를 太平天國이라고 하고 天王으로 홍수전을 꼽았다. 아직 불완전한 정치적 구현체였지만 태평천국의 군대는 강력하였다.
Ⅳ장에서는 광서봉기의 구호를 알아보았다. 광서봉기에서 제기된 口號는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劫富濟貧, 사회의 구현을 내세우는 替天行道, 개인적 원한을 갚고자 하는 回鄕報仇, 천지회의 전통적 구호인 反淸復明, 그리고 관리의 폭정에 반대하는 殺官留民 등이 있었다. 광서봉기가 대부분 천지회 봉기라고 본다면 당연히 반청복명이라는 구호가 활발하게 제기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미 사회적 불평등, 경제적 착취의 정도가 심화된 상태 속에서 피지배계급에 대한 봉건적 수탈을 자행하였던 明朝의 회복을 주장하는 반청복명 구호는 설득력이 없어졌고, 따라서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거나 사회정의를 구현하자고 하는 구호가 보편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늘을 대신해서 정의를 실현시키겠다는 체천행도의 구호는 이미 北宋 末에 제기된 것이었고, 水滸誌의 내용에 친밀감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은 당시의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현실 속에서 이 구호를 자연스럽게 제기하였다. 개인적 원한을 갚으려는 구호도 그것이 단지 개인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현실 속에서는 그와 같은 원한이 봉기민중에게 공감을 주는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합리화되었다. 또한 도적보다 더 탐욕스럽다는 광서지방 관료의 가혹한 민중수탈은 살관류민이라는 反官的인 구호를 제기하게 하였다. 특히 張嘉祥의 군대가 하층민의 참가를 촉구하며 내걸었던 구호에는 지주 등 지배계급의 착취를 부정하면서 그들이 착취해 간 잉여생산물을 생산자가 되찾겠다는 사상이 표현되고 있다. 동시에 지주제의 모순된 생산구조도 부정되고 있다. 이러한 구호들을 통하여 광서민중봉기가 反支配階級的이며 반관적 지향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태평천국운동의 원인을 광서지방을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나름대로 광서지방을 중심으로 태평천국운동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면서 논지를 이끌어 나갔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당시 광서지방의 상황은 社會的으로나, 政治的으로나, 經濟的으로나 심각했고, 민중들은 종교라는 대상에 의지하여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결국에는 태평천국운동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폭발하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요인들을 충족시킨 것은 광서지방이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광서지방에서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광서봉기가 어떤 근거로 태평천국운동의 발생배경이 되었는가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광서봉기와 태평천국운동의 관련, 영향 등이 앞으로도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講座中國史4』. 지식산업사. 1989.
________________________. 『講座中國史5』. 지식산업사. 1989.
________________________. 『講座中國史6』. 지식산업사. 1989.
참고논문
金誠贊. 「太平天國 拜上帝 集團의 性格에 대한 社會史的 理解에의 一展望」.『동양사학연구』Vol.45. 東洋史學會. 1993.
朴基水. 「太平天國 이전(1830~1850) 廣西民衆蜂起」.『동양사학연구』.Vol.31. 東洋史學會. 1989.
全海宗. 「太平天國亂의 動機와 性格에 對한 考察」.『역사학보』.Vol.3. 역사학회. 1952.
鄭 先. 「太平天國에 관한 一考察」.『이대사원』Vol.18-19. 1982.
崔震奎. 「太平天國과 上帝敎-建國過程에서의 理念을 中心으로」.『동양사학연구』.Vol.55. 東洋史學會. 1996.
崔震奎. 「太平天國 上帝敎와 傳統宗敎」.『전남사학』.Vol.18. 전남사학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