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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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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 미당 서정주의 서정시

3. 서정주 시 분석

본문내용

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 힘은 기다림의 대상으로만, 부재의 기표로서만 제시됨으로, 이 시가 낭만주의의 상징적 합일의 순간을 표현한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존재가 아니라 비존재를 예비하는 힘이다. 니체의 사상이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거부하고 세계를 오직 가상으로만 파악한다면, 존재와 비존재의 구별 자체가 무의미할 것이다. 모든 것은 베일에 불과할 뿐이고 존재를 가능케 하는 그 베일 이면의 어떤 궁극적인 근거도 거부되기 때문이다. 다시 인용된 시의 3연을 주목하면, 화자가 자신의 육체를 완전히 해체시키려는 의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의지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관계망이 사라질 것을 덩달아 요구하고 있다. 2연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읽으면, 화자가 요구하는 ‘時間’이 폐허에서 피어난 꽃으로 비유되고 있고, 불에 탄 시체가 직립하는 순간으로 제시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퍅허나 시체는 비존재를 예시하는 이미지이다. <폐와 발톱만> 남겨진 자아 역시 존재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 이미지는 모두 주체가 파열된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주체의 파열, 주관성의 파열은 시간의 파열을 가져온다. 마지막 연으로 가면, 상형문자로 표기된 ‘門’이 그것이 쓰여 있는 종이 아래로의 공간을 열어주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門’이라는 문자 혹은 기호는 그것의 의미에 덧붙여진 시각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것이다. 텅 빈 공간, 공허한 백지 상태가 그 시각적인 효과에 의해 연상된다. 이러한 사실은 앞 항에서 검토한 바와 정반대의 해석을 강요한다. 즉, 바슐라르가 <뒤카쓰적 순간>이라고 명명한 순간이 무의 상태에서 존재가 튀어오르는 순간을 지칭했다면, 門이 보여주는 순간은 오히려 텅 빈 공허, 말로 규정될 수 없는 순간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의 심연은 그것이 無의 완전한 실현이라는 점에서 <뒤카쓰적 순간>이 예비하는 고양된 存在의 순간과 구별된다. 그러나 이 구별은 바슐라르의 존재와 무의 이원론 역시 근대 철학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바슐라르의 존재가 객관적 대상을 전제로 한 사르트르의 이원론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다소 제한적인 의미만을 갖는다. 바슐라르에게 있어서 존재는 오히려 주관과 객관의 이항대립을 초월하는 개념이다. 이렇게 보면, 니체의 순간과 바슐라르의 순간은 서로 겹치는 개념이다. 다만, 니체의 순간이 보다 급진적인데, 이는 그가 일체의 세계를 가상으로만 여기고 이 가상의 세계를 정당화해주는 것으로 가상의 가상(예술)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시적 순간 혹은 도취의 순간이 가상을 뛰어 넘는 경험의 본질적인 실재성 actuality 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상의 진면목을 보다 생생하게 경험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미적 현상은 이 세계가 오직 가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떤 이념적 눈가리개 없이 적나라하게 제시함으로써, 그것을 긍정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극적 세계관의 본질에 해당한다. 인용시 門을 놓고 보았을 때, 어떤 한 순간에 대한 일체의 규정도 불가능한 상태, 오직 <머리털이 흔들흔들 흔들리우는> 공포의 감정만이 팽배해지는 순간이 바로 이 세계의 심연에 맞딱드릴 때의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門이 보여주는 시간성은 앞 항에서 검토했던 웅계, 대낮, 바다 등의 시에 나타난 현재 순간에의 몰입을, 파열된 시간성으로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이들 시에 나타난 관능적이고 공격적인 순간을 <뒤카쓰적 순간>으로 명명케 하면서, 동시에 그 순간에 대한 이념적인 규정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니체적 순간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사정은 ‘門’모티프가 다르게 나타난 시인 復活을 검토해보면 보다 명백해질 것이다.
내 너를 찾어왔다…臾娜. 너참 내앞에 많이있구나 내가 혼자서 鐘路를 거러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오는구나. 臾娜, 이것이 며萬時間만이냐. 그날 꽃喪阜 山넘어서 간다음 내눈동자속에는 빈하눌만 남드니, 매만저볼 머릿카락 하나 머릿카락 하나 없드니, 비만 자꾸오고… 燭불밖에 부흥이 우는 돌門을열고가면 江물은 또 며천린지, 한번가선 소식없든 그 어려운 住所에서 너무슨 무지개로 네려왔느냐, 鐘路네거리에 뿌우여니 흐터저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애들. 그중에도 열아홉살쯤 스무살쯤 되는애들. 그들의눈망울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드러앉어 臾娜! 臾娜! 臾娜! 너 인제 모두다 내앞에 오는구나.
- 復活 전문 (조선일보, 1939. 7. 19)
이 시에서 보면, ‘門’모티프가 門과는 반대로 파열된 시간을 통합하는 계기로 나타난다. <燭불밖에 부흥이 우는 돌門>을 열면 강물이 나온다. 그 강물은 사랑했던 여자의 죽음과 화자의 삶 사이를 갈라 놓는다. 그 사이는 공간적으로도 <며천리>나 되지만, 시간적으로도 <며萬時間>이다. 그러나 이토록 멀리 갈라져 있는 시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종로 네거리에서 수많은 臾娜를 만난다. 비록 문을 통해서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의 문이 표상하는 이미지는 門과 질적으로 달라져 있다. 문은 이제 저승과 이승을 가르면서 이어주는 경계선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사실은 앞에서의 門이 어떤 순간에서 맞이할 경험에 대한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만 촉발되었음에 비해, 미리 알고 있는 예견된 순간을 지탱하는 이미지로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이 시가 과거의 영상을 끌어 들이는 것이 그 순간을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과거가 현재로 틈입해 들어오면서, 앞에서 검토했던 ‘門’모티프의 파열된 시간은 서로 봉합된다. 따라서 이 시는 ‘復活’모티프를 예비하는 시로 읽혀진다. 재생에 의해 죽은 자와 산 자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경향은 앞으로 서정주 시의 중요한 특질이 되는 것이다.
이 시외에 ‘門’모티프가 나타나는 시는 密語, 누님의 집, 門열어라 鄭道令아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귀촉도에 실려 있고 復活과 동일한 양상를 보여준다. 모두 과거의 영상 혹은 이상적인 이미지를 끌어들임으로써, 시간의 통합에 기여하는 것이다. 다만 신라초에 실린 꽃밭의 獨白이 약간 예외적으로 門의 시간성과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이 특기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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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6.15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15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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