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요약] 문화로 읽는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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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책요약] 문화로 읽는 세계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뒤에 바이킹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대략 750년부터 1050년까지의 3세기 정도를 ‘바이킹의 시대’라 한다. 바이킹들은 노략질을 할 때 아이들을 죽여서 머리를 자르고 그것을 창끝에 꽂고 다니는 것이 관례였다. 어떤 사람이 그 짓을 차마 하지 못하자 동료들이 그를 보고 ‘어린이들의 친구’라 놀려 댔다는 것이다. 9세기에 들어서자 바이킹들은 더욱 자신감이 생겼는지 약탈을 한 후 바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월동도 하고 아예 땅을 차지하고 눌러앉기도 했다. 인구과잉, 농토 부족, 또는 호전적 엘리트 집단 사이의 갈등 따위를 꼽는다.
- 바이킹의 팽창은 크게 세 방향 : 하나는 남쪽 방향으로서, 영국 제도와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으로부터 차츰 남하해서 결국에는 지중해까지 도달하였다. 또 한 갈래는 서쪽 방향으로서, 북대서양의 섬들(오크니, 셰틀랜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을 차례로 항해하여 거주지를 만들고 마지막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해서 한때 정착지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갈래는 동쪽 방향으로서, 핀란드, 발트해 연안 지역, 그리고 이곳을 넘어 볼가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러시아를 지나고 비잔틴 제국까지 가서 교역을 했으며, 아마도 바그다드나 그보다 더 먼 지역까지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이킹들은 콜럼버스보다 약 500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과 주변의 여러 섬에 들어갔다. 예컨대 캐나다 뉴펀들랜드 주에서 바이킹들의 거주지를 발굴해본 결과, 철을 용해하고 대장간 일을 한 흔적을 찾아 낼 수 있었다. 또, 미국 메인 주와 북극 지방에서 바이킹과 관련된 물건들과 동전이 발견되었다.
12. 낙원의 역사
- 낙원은 어떤 곳인가? : 낙원, 곧 파라다이스 라는 낱말은 원래 고대 페르시아어 ‘아피리다에자(벽으로 둘러싸인 과수원)’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 히브리어에 받아들여져서 ‘파르데스’가 되었고, 다음에 그리스어 구약 번역 과정에서 ‘파라데이소스’로 되었다. 핀다로스의 『올림픽 찬가』에는 ‘행운의 섬’이라는 낙원이 나온다.
- 지상낙원은 보통의 인간들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있다. 높은 산에 걸려 있든지 대양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땅과 아무 관계가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큰 강물이 흘러나와서 이 땅을 적시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되 sdbfur한 주장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 대한 전설이다. 노아는 땅을 세 등분하여 셈, 함, 야벳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중 셈에게 돌아간 땅이 가장 좋은 땅인데, 이는 북쪽의 티나 강(다뉴브 강)과 남쪽의 기혼 강(나일 강)을 경계로 하고 있다. 바로 이땅의 동쪽 끝에 에덴동산이 있고 중간에 시온산이 솟아 있으며 남족에 시나이 산이 있다.
- 낙원을 찾아서 : 콜럼버스는 지상낙원이 아주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고, 그곳의 날씨는 온화하며, 엄청난 양의 물이 나오는 곳에 있다고 자기 나름대로 정리했다. 유럽인이 지상낙원에 도착하는 날 그곳의 힘과 부를 이용해 이교도들을 모두 정복하고 세계 만방에 기독교를 전파하며, 그때 인류는 마침내 잃었던 낙원을 되찾고 역사가 완수된다는 종말론적인 사고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앵무새는 낙원의 새로 알려지게 되었다. 원죄 이후 모든 동물들이 말을 잃었다고 한다. 그런데 새가 인간의 말을 흉내내다니! 그래서 앵무새는 낙원에 아직 남아 있는 새로 알려진 것이다.
- 낙원의 상실은 곧 복수하는 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내면의 의식은 어떻게 해서든 지상의 낙원을 찾고 그곳에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증을 낳았다. 무엇엔가 내몰리는 사람처럼 끊임없이 찾아 헤매고 무엇인가를 향해 전진해야 하는 문명의 성격, 아시아로, 또 아메리카로 공격해 들어가서 땅을 빼앗고 사람을 짓밟았던 역사, 이런 흐름의 저 깊은 뿌리에는 낙원의 상실과 지옥의 공포라는 근원적인 갈등이 존재한다.
13. 아시아에 대한 꿈
사제 요한이 비잔틴 제국 황제에게 보냈다는 편지
- 중세의 세계 지도 : 노아는 세 아들 셈, 함, 야벳에게 각각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분배해 주었다고 한다. 세계의 중심(지도의 한가운데)에는 예루살렘이 있다. 사제 요한의 전설이다. 그 기본 생각은 이교도 지역 너머에 강력한 기독교 왕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8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이 강력해져서 기독교권 유럽과 원수지간이 된 후에는 이슬람권을 양쪽에서 협공할 우군으로서 이 전설의 기독교 왕국은 더 큰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 사제 요한 왕국 이야기 : 에티오피아의 콥트교, 일부 역사가들은 사제 요한의 이름 ‘Jean’이 에티오피아의 지배자 \'Zan\'의 변형이 아닐까 추론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사제 요한 왕국의 소재지로서 아프리카도 후보에 올라가 있었으나 대체로 12세기경에 사제 요한 왕국은 아시아에 있는 것으로 확정되기에 이른다. 사제 요한이라는 직위가 처음 명시적으로 나오는 문건은 1145년의 오토 폰 프라이징의 서술이다. 십자군 지휘부가 교황에게 원군을 더 보내 달라는 요청을 하였는데, 교황이 그 사자를 만나는 자리에 배석했던 오토 폰 프라이징이 이 일을 기록하면서 사제 요한에 대해 쓰고 있다. 그 내용은 동방의 왕이며 네스토리우스파 사제인 요한이 예루살렘 교회를 구하기 위해 티그리스 강까지 진격해 왔으나 아직 강을 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20년쯤 뒤에는 사제 요한이 비잔틴 제국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나돌았다. 아마도 이것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위조 문서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사제 요한이 통치하는 동양의 왕국은 엄청난 부와 힘과 덕성을 자랑하는 강국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 시기에 아시아에서 대제국을 건설하던 칭기즈칸을 전설의 사제 요한으로 오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 네스토리우스는 시리아에서 태어나 428년에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지만 ‘신의어머니’는 아니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결국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정통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 교리에 맞서는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431년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이단 판정을 받고 추방 당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지역으로 퍼

키워드

중세,   문명,   문화
  • 가격3,500
  • 페이지수21페이지
  • 등록일2007.06.20
  • 저작시기2006.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15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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