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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것은 성취감과 행복이 아니라 종국에는 고통과 수난이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이 고통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었음을 뚜렷이 인식한다. 최소한 24년간 이 세상에서 모든 제한을 뛰어넘은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기독교적 계율이나 사회적 집단의식의 인형이 되지 않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을, 그것이 육체이든 영혼이든, 살과 피와 재산이든, 영원히 악마에게 대가로 치르기로 약속했다. 자신의 명료한 의식과 머리,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피로 악마와의 계약서에 서명을 한 것이다. 기독교의 성서는 악마의 유혹의 대표적 사례로서 황야에서의 예수와 욥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악마의 유혹은 신에 의한 시험이었고 이들은 이 시험의 피동적 객체에 불과했다. 예수와 욥과는 달리 파우스트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악마의 유혹은 스스로 불렀다. 더 이상 어둠 속에서 더듬어대지 않으려고, 더 이상 궁핍 속에 빈둥대지 않으려고 말이다. 그래서 앎과 능력과 향유를 그는 원했다. 그래야 그는 완전한 인간적 인간이 될 수 있고 하늘의 신을, 위에서 군림하는 주인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이 지상의 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니체가 ‘가장 고유한 프로메테우스적 덕성’으로 규정한 파우스트의 이 같은 능동적 죄악에 대한 숭고한 견해가 신에 대한 배반이자 악마에 대한 숭배로 단죄된다면, 이는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시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처럼 파우스트의 삶이 고통으로 대가를 치른 인간의 자력 구조를 의미한다기에 그는 휴머니즘의 이상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순교자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고통은 종교적 수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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