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의 역사-근세의 해적시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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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해적의 역사-근세의 해적시대를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머리말-해적에 대한 기존상식에 대한 반론-
해적의 개념 및 기원
해적의 발생원인과 규모
사략선의 역사
해적기의 의미와 상징
황금시대의 유명한 해적들
프랜시스 드레이크

본문내용

기: 해적 이야기(3)》 한국해사문제연구소 2004
사략선의 목적은 적국의 무역을 방해하여 상업을 붕괴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고, 나머지는 식민지의 지사와 선장, 승무원들의 급여를 만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가끔 사략선 들은 고용된 국가 또는 영국국기(Union Jack)를 배에 걸고 항해하기도 하여, 지나가는 각 국의 상선대를 목표로 약탈을 일삼았다. 하지만, Queen Anne의 전쟁(1702-1713)이 끝나자 그들은 할 일을 잃어 버렸고,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해적으로 전향하기도 했다. 1812년 미국의 독립전쟁 후 사선단은 영국의 무기와 군수 물자를 운송해주는 일을 맞아 어느 정도 수입을 올리며 맥을 유지했고, 1856년 파리 선언에 의해 이 파리선언에 강대국 중 미국만이 조인을 거부하였다. 미국은 독립전쟁 당시 영국에 비하여 형편없이 약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할 수 없이 사략선을 동원한 통상파괴전으로 대항하였었다.
사략함대는 공식적으로 완전 폐지되었다. 폐지에 관해서는 1907년에 제 2차 헤이그 평화 회의 결과에서 라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폐지의 배경에는, 유럽 열강들의 해상에서의 활약이 일정 수준에 이르고 각국이 어느 정도의 해군력을 정비하여, 사략선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여론이 나온 점 등이 있다.
사략 행위를 해적 행위와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발전에서 사략선의 공적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해적선이 그랬듯이 해운, 해군, 해적의 기능이 분화되지 않던 시대에는 같은 선박이 어떤 때에는 해적 행위를 하고, 허떤 때에는 군함으로서 기능을 하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해운업에 종사하는 상선 기능을 했다. 다시 말해서, 사략선은 해군활동의 일부이기도 하고, 모험항해 도중 정상거래를 하면 무역업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즉 적어도 17세기경까지만 해도 해운과, 해적과 해운은 미분화된 상태였다. 모험항해를 위하여 미지의 세계로 갈 때 항상 현지 원주민세력의 저항을 염려하기 때문에 상선도 항상 무장하고 다녔으며, 원주민을 무력으로 억제하기도 하였다. 원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해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 상선이 전시에 동원되면 군함으로서 기능함은 당연하였다. 최재수 《오늘날 회사제도의 원조는 해적(海賊)사업》 한국해사문제연구소 2007
그렇다면 사략선과 해적선의 차이는 어떤 것이 있을까? 흥미 있는 사실은 해적행위를 하다가 상대방에게 나포되는 경우의 대우가 다르다는 것이다. 순수한 해적선의 경우, 해적은 극형에 처하는 관례에 따라 참수형 등 사형이 원칙이다. 그러나 사략선의 경우, 사략면장을 제시하면 일단 포로 대우를 받는다. 포로 대우를 받으면 일단 참수형이라는 극형을 면하게 되고, 본국에서 속전을 내면 방면될 수도 있다. 연구소자료 《해적은 반드시 정권의 비호를 받는다》한국해사문제연구소 2000
ⅲ) 해적의 세계관
해적은 혹독하고 절체절명의 상황 가운데 놓여 있던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었다. 물론 이들이 부(富)를 원하기도 했지만, 해적이 된 동기와 해적행위에는 하나의 강력한 사회적 논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노동계급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고, 선원이라는 직업 출신이며, 가족적 유대로부터도 떨어져 나온 해적들은 공동의 상징과 행동의 기준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자발적 동맹을 형성했고, 서로 싸우려고 하지 않았으며, 동류에게 가해진 상해에 대해서 복수하기를 맹세했고, 해적들 사이의 동류의식은 정교한 사회규범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규범은 규율, 관습, 상징 등을 통하여 어떤 특정한 행동기준을 설정함으로써 해적들은 자신들이 창의적으로 건설한 세계를 보존하려 하기도 했다.
해적 마을로 물러가서 살기도 했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이상적인 정의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평등한 사회조직 형태를 고수했으며, 스스로를 다른 사회집단이나 사회유형들과 대립적으로 구별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의 많은 부분이 윤리적이며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해적들은 국제시장경제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불안정한 경제적 변화에 별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자유 임금노동자로서의 경험과 통제받지 않고 자유로이 움직이는 하위문화의 구성원으로서의 경험은 해적들에게 잔학하고 불공정한 권력에 항거해서 싸우며, 염라대왕이 군림하지 않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건설하고자 하는 전망과 계기를 제공했다.
해적들이 세운 사회질서와 관행들은 고대와 중세 해양세계의 핵심적인 특징들을 재현했다. 그들은 돈과 물품을 각 사람의 몫으로 나누었고, 중요한 사안들에 관해서는 집단적이고 민주적으로 협의했다. 그들의 이러한 점은 행선지나 선장을 선정할 때 선원들이 찬반의사표시를 해서 다수결로 결정했다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최초의 의료보험제도와 같은 것도 있었다. 해적들은 잔혹했지만, 상선의 선원들이 반항하거나 반격할 때만 그들을 죽였다. 데이비드 코당리 <낭만적인 무법자 해적> 루비박스 2007
해적들은 주인 없는 자들의 문화를 만들었다. 그들은 18세기 전반 어떤 인간들보다도 전통적인 권위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었다. 교회 저편에, 가족 저편에, 기율 잡힌 노동 저편에 있으면서, 바다를 이용하여 국가권력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던 그들은 하나의 낯선 실험을 수행했던 것이다. 해적행위의 사회적 의미, 특히 일단 족쇄에서 풀려나자 성장한 복합적 의식과 평등주의적 욕구들은 평선원들과 빈민노동 계층 일반 사이에 존재했던 보편적인 사회적, 문화적 유형들을 밝혀주는 귀중한 단서가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 하에서는 일상의 권력관계에 억눌려서 말하지 못했던 열망과 그 성취들이다.
해적 세계의 문화적 측면은 그들의 내면세계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가장 유용한 분석의 대상이 된다. 특히 종교적 활동이나 의식과 같은 문화적 측면은 비단 해적뿐만 아니라 어떤 집단의 경우라도 조직의 단합과 통합을 이끌어 내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 마련이다. 이다이앤 머레이 《그들의 바다: 남부 중국의 해적, 1790~1810》 서울: 심산문화 2003
해적들은 삶의 기회들을 균등하고 우애 있게 분배함으로써, 특권이나 위험으로부터의 면제받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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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6.27
  • 저작시기20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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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17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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