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목차
서 론
1.모택동
2.김일성
본 론
Ⅰ.사상
1. 공산당의 모택동 사상
모택동 어록
모택동사상에 대한 평가
2. 북한 노동당의 김일성 주체사상
Ⅱ.정치 체제
1. 중국
1-1. 중국의 정치 체제 변화 요인
1-2. 중국의 현 정치 체제로의 변화 과정
①1949년 - 1953년(중화인민공화국 건국 - 한국전쟁종결)
②1953년- 1956년(중국지도부의 ‘과도기 총노선’ 공식표명 - 제8차전당대회)
③1956년 - 1958년(제8차전당대회 - 인민공사운동의 추진시기)
④1958년 - 1966년(대약진운동 - 문화대혁명)
⑤1966년 - 1976년(문화대혁명 - 모택동의 사망)
1-3. 현 정치 체제로 정착
2. 북한
2-1. 해방정국의 정치상황과 북조선로동당
2-2.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북한정권의 수립
Ⅲ. 경제
1. 중국
1-1.대약진운동
1-2. 중국의 대외경제정책
2.북한
2-1.사회주의경제 건설노선
2-2. 북한의 토지개혁
2-3. 북한의 대외경제정책
3. 중국과 북한의 사회주의와 계획경제
결 론
1.모택동
2.김일성
본 론
Ⅰ.사상
1. 공산당의 모택동 사상
모택동 어록
모택동사상에 대한 평가
2. 북한 노동당의 김일성 주체사상
Ⅱ.정치 체제
1. 중국
1-1. 중국의 정치 체제 변화 요인
1-2. 중국의 현 정치 체제로의 변화 과정
①1949년 - 1953년(중화인민공화국 건국 - 한국전쟁종결)
②1953년- 1956년(중국지도부의 ‘과도기 총노선’ 공식표명 - 제8차전당대회)
③1956년 - 1958년(제8차전당대회 - 인민공사운동의 추진시기)
④1958년 - 1966년(대약진운동 - 문화대혁명)
⑤1966년 - 1976년(문화대혁명 - 모택동의 사망)
1-3. 현 정치 체제로 정착
2. 북한
2-1. 해방정국의 정치상황과 북조선로동당
2-2.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북한정권의 수립
Ⅲ. 경제
1. 중국
1-1.대약진운동
1-2. 중국의 대외경제정책
2.북한
2-1.사회주의경제 건설노선
2-2. 북한의 토지개혁
2-3. 북한의 대외경제정책
3. 중국과 북한의 사회주의와 계획경제
결 론
본문내용
변질됨. 한편 당의 집체적 지도는 수령의 유일적 영도를 철저히 보장할 수 있 었으나 공장의 자율권을 박탈하고 기업의 창의력과 창발력을 위축시키는 결과 초래.
④ 거의 전산업 분야에 걸친 기술 수준의 낙후와 산업시설의 노후 - 자력갱생의 원칙으로 인해. 다른 나라와 교류로 인한 기술 발전 기회를 놓침.
⑤ 중공업 우선 정책 - 산업 부문간의 불균형 심화. 이를 보조지원하는 국방산업의 육성 으로 인민들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과 소비재마저 제대로 공급할 수 없는 국가로 전락. 중공업 우선 정책을 기조로 한 자력갱생노선에 의해 국제 분업에 참여 하지 않음으로써 산업의 세분화를 조장하고 기계산업의 저해 요인인 비효율적인 소규모 생산시설을 갖추어 나가는 추세가 가속화됨.
⑥ 스타하노프주의의 고수정책 - 기술 진보를 통한 상대적 잉여가치의 증대보다 노동력 투입 증대를 통한 절대적 잉여가치의 증대를 추구하는 스타하노프주의가 경제건설의 수단 으로 보편화되어 장기간 지속됨에 따라 한계효용의 체감 단계에 도달.
2-3. 북한의 대외경제정책
북한은 1958년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완전히 구축하고 본격적으로 사회주의경제건설을 해나가는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대외경제관계를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다. 북한의 전후복구와 경제건설에 필요한 원자재를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로부터 무상원조를 받았기 때문이다.15)북한 당국은 대외무역이란 사회주의국가들과의 친선관계 발전을 통해 경제개발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1960년대 들어와 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로부터의 무상원조가 줄어들고 사회주의적 계획경제 건설에 따라 대외경제관계의 확대가 현실적 차원에서 요구되는 상황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북한 당국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외무역을 국내경제 발전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각 나라가 지니고 있는 자연적·인위적 여건에 의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경제적 현상, 그리고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국가들과의 경제교류를 발전시키는 정도로만 인식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소련간의 등거리 외교에 의해 필요한 경제 원조를 얻으려는 정책이 중·소 분쟁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중국의 문화혁명 때문에 중국으로부터의 유상원조도 중단되면서 사회주의국가 일변도의 대외경제교류정책은 재고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북한의 경제규모 확대에 따른‘내포적 공업화’(Intensive Industrialization) 추진을 위해 보다 선진적인 자본설비 및 기술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서방국가와의 대외경제관계가 확대되어 나갈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북한은 70년대 들어오면서부터 서방 선진 국가와의 경제협력관계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이 1970년대부터 비사회주의국가들과 대외경제관계를 추진하려 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국가들과의 대외경제관계란 시장경제원리에 따른 경제거래로서 비계획경제적인 시스템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 대외경제개방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중국과 북한의 사회주의와 계획경제
모택동 시절 중국의 경제 정책은 대약진 운동으로 대표된다. 이는 실패한 정책으로 평가되지만 모택동의 경제 성장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모택동 시대의 중국은 사회주의의 특유의 집체경제로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반면 김일성 시대의 북한은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모순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토지 개혁 이후에 김일성 정부는 경제 성장에 커다란 비중을 두지 않았다. 미국이 자신들의 경제 성장을 위해 한반도를 노린다고 선전하며, 맹목적인 경제 발전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실제로 몇 몇 경제 정책을 내놓긴 하였지만, 그보단 주체사상의 확립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계획경제 체제의 모순을 미리 알아차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었을 것이다. 이강백의 소설 파수꾼의 ‘촌장’은 있지도 않은 이리떼를 만들어 마을을 이끌어 나간다. 김일성도 이 촌장처럼 경제적인 문제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결 론
위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중국과 북한은 실질적으로 일당 독재체제의 공산주의 국가이다. 하지만 현재 두 국가의 세계에서의 힘은 완전히 상반된다.
중국은 13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를 바탕으로 세계의 커다란 시장으로 등장하였다. 세계 경제 대국들이 앞 다투어 중국 진출을 하고 있다. 이에 비해 북한은 경제적으로 완전 고립되어 식량난등의 문제로 허덕이고 있다.
중국은 개혁개방을 반대하던 모택동의 사후, 등소평이 집권하게 되면서 자유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게 된다. 그가 자유 시장경제체제의 도입을 주장하면서 언급한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라는 말은 유명하다. 중국은 공산주의의 강한 집경체제를 바탕으로 한 시장경제체제로 인해 중국만의 독특한 공산주의를 형성하며 중국의 급속한 발전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에 비해 북한은 그 시장 규모 자체가 중국에 비해 극소할 뿐 아니라 금융구조 또한 전무하다. 또한 자국 생산에서 국방비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고 김정일 정권체제의 유지가 가장 큰 목적임으로 국제사회와의 교류 자체가 거의 단절되어 있는 상태이다. 최근 개성공단이나 중국의 투자를 유치하고 있으나 실효성이 없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북핵 문제 등을 비롯하여 정치적으로 불안한데에 있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북한의 폐쇄적인 경제체제하에서는 중국과 같은 경제 성장을 달성 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된다. 북한 역시 소련식 공산주의에서 벋어나 중국과 같이 자유경제체제의 도입을 추진하여야 한다. 물론 북한을 몇 십 배에 달하는 인구를 가진 중국 시장의 성장세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의 경제적 어려움에서 벋어 나기 위해서는 최선책일 듯하다.
두 공산주의 국가와 최 접근해 있는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이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중국은 그 동안 우리의 경쟁 상대라고 생각 하지 않은 국가였다. 하지만 중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시장으로 등장하였다. 그 들의 기술력 또한 크게 향상되고 있어 우리의 뒤를 바짝
④ 거의 전산업 분야에 걸친 기술 수준의 낙후와 산업시설의 노후 - 자력갱생의 원칙으로 인해. 다른 나라와 교류로 인한 기술 발전 기회를 놓침.
⑤ 중공업 우선 정책 - 산업 부문간의 불균형 심화. 이를 보조지원하는 국방산업의 육성 으로 인민들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과 소비재마저 제대로 공급할 수 없는 국가로 전락. 중공업 우선 정책을 기조로 한 자력갱생노선에 의해 국제 분업에 참여 하지 않음으로써 산업의 세분화를 조장하고 기계산업의 저해 요인인 비효율적인 소규모 생산시설을 갖추어 나가는 추세가 가속화됨.
⑥ 스타하노프주의의 고수정책 - 기술 진보를 통한 상대적 잉여가치의 증대보다 노동력 투입 증대를 통한 절대적 잉여가치의 증대를 추구하는 스타하노프주의가 경제건설의 수단 으로 보편화되어 장기간 지속됨에 따라 한계효용의 체감 단계에 도달.
2-3. 북한의 대외경제정책
북한은 1958년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완전히 구축하고 본격적으로 사회주의경제건설을 해나가는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대외경제관계를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다. 북한의 전후복구와 경제건설에 필요한 원자재를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로부터 무상원조를 받았기 때문이다.15)북한 당국은 대외무역이란 사회주의국가들과의 친선관계 발전을 통해 경제개발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1960년대 들어와 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로부터의 무상원조가 줄어들고 사회주의적 계획경제 건설에 따라 대외경제관계의 확대가 현실적 차원에서 요구되는 상황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북한 당국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외무역을 국내경제 발전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각 나라가 지니고 있는 자연적·인위적 여건에 의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경제적 현상, 그리고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국가들과의 경제교류를 발전시키는 정도로만 인식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소련간의 등거리 외교에 의해 필요한 경제 원조를 얻으려는 정책이 중·소 분쟁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중국의 문화혁명 때문에 중국으로부터의 유상원조도 중단되면서 사회주의국가 일변도의 대외경제교류정책은 재고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북한의 경제규모 확대에 따른‘내포적 공업화’(Intensive Industrialization) 추진을 위해 보다 선진적인 자본설비 및 기술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서방국가와의 대외경제관계가 확대되어 나갈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북한은 70년대 들어오면서부터 서방 선진 국가와의 경제협력관계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이 1970년대부터 비사회주의국가들과 대외경제관계를 추진하려 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국가들과의 대외경제관계란 시장경제원리에 따른 경제거래로서 비계획경제적인 시스템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 대외경제개방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중국과 북한의 사회주의와 계획경제
모택동 시절 중국의 경제 정책은 대약진 운동으로 대표된다. 이는 실패한 정책으로 평가되지만 모택동의 경제 성장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모택동 시대의 중국은 사회주의의 특유의 집체경제로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반면 김일성 시대의 북한은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모순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토지 개혁 이후에 김일성 정부는 경제 성장에 커다란 비중을 두지 않았다. 미국이 자신들의 경제 성장을 위해 한반도를 노린다고 선전하며, 맹목적인 경제 발전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실제로 몇 몇 경제 정책을 내놓긴 하였지만, 그보단 주체사상의 확립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계획경제 체제의 모순을 미리 알아차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었을 것이다. 이강백의 소설 파수꾼의 ‘촌장’은 있지도 않은 이리떼를 만들어 마을을 이끌어 나간다. 김일성도 이 촌장처럼 경제적인 문제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결 론
위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중국과 북한은 실질적으로 일당 독재체제의 공산주의 국가이다. 하지만 현재 두 국가의 세계에서의 힘은 완전히 상반된다.
중국은 13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를 바탕으로 세계의 커다란 시장으로 등장하였다. 세계 경제 대국들이 앞 다투어 중국 진출을 하고 있다. 이에 비해 북한은 경제적으로 완전 고립되어 식량난등의 문제로 허덕이고 있다.
중국은 개혁개방을 반대하던 모택동의 사후, 등소평이 집권하게 되면서 자유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게 된다. 그가 자유 시장경제체제의 도입을 주장하면서 언급한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라는 말은 유명하다. 중국은 공산주의의 강한 집경체제를 바탕으로 한 시장경제체제로 인해 중국만의 독특한 공산주의를 형성하며 중국의 급속한 발전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에 비해 북한은 그 시장 규모 자체가 중국에 비해 극소할 뿐 아니라 금융구조 또한 전무하다. 또한 자국 생산에서 국방비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고 김정일 정권체제의 유지가 가장 큰 목적임으로 국제사회와의 교류 자체가 거의 단절되어 있는 상태이다. 최근 개성공단이나 중국의 투자를 유치하고 있으나 실효성이 없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북핵 문제 등을 비롯하여 정치적으로 불안한데에 있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북한의 폐쇄적인 경제체제하에서는 중국과 같은 경제 성장을 달성 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된다. 북한 역시 소련식 공산주의에서 벋어나 중국과 같이 자유경제체제의 도입을 추진하여야 한다. 물론 북한을 몇 십 배에 달하는 인구를 가진 중국 시장의 성장세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의 경제적 어려움에서 벋어 나기 위해서는 최선책일 듯하다.
두 공산주의 국가와 최 접근해 있는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이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중국은 그 동안 우리의 경쟁 상대라고 생각 하지 않은 국가였다. 하지만 중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시장으로 등장하였다. 그 들의 기술력 또한 크게 향상되고 있어 우리의 뒤를 바짝
키워드
추천자료
주변국과 북한의 대외관계
중국의 외국기업 진출 환경 분석
한국과 북한에 대한 중국 외교정책의 비교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를 읽고>
[행정학과 - 비교행정론] 20- A. 선진국 행정체제의 역사적 배경과 특징에 관하여 설명하시오.
[경찰행정학]우리나라와 각국의 수사체제 비교
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북한 핵문제에 대한 후진타오체제(중국)의 정책방향과 전망
2008년 1학기 비교행정론 중간시험과제물 D형(독일과 일본의 행정체제의특징)
2010년 1학기 비교행정론 중간시험과제물 D형(일본행정체제의 특징)
2012년 1학기 비교행정론 중간시험과제물 B형(근대적 행정체제의 형성)
미국의 기업문화( GE와 IBM),GE의 경영체제와 경영전략,IBM의 기업 진화 과정,GE와 IBM의 현...
2015년 1학기 비교행정론 중간시험과제물 B형(선진국 행정체제, 근대적 행정체제의 형성)
공직 인사체제(personnel system)의 유형(공무원제도) - 개방형과 폐쇄형, 교류형과 비교류형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