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의 역사와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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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북공정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서론

II. 본론
1. 동북공정의 역사와 현황
2. 당사국의 입장
1) 한국의 입장
2) 중국의 입장
3) 북한의 입장
3. 주변국의 입장
1) 일본의 입장
2) 러시아, 몽골, 터키의 입장
4. 또다른 역사왜곡
1) 발해사
2) 간도협약
5.동북공정의 대응방안
1) 남북공조
2) 국제화와 정보화와 대중화
3) 고구려사 연구 센터의 설립
4) 학․민․관 네트워크 구축
5) 분단사관 넘어서는 공동연구 절실

III.결론

IV.참고문헌

본문내용

정산六頂山의 정혜공주묘를 비롯한 9기의 고분이 발견되었으니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연구가 잠시 중단되었다. 문화대혁명 이후 모든 역사는 중앙에서 관리고 연구하며, 소수민족의 민족사 연구는 허용되지 않게 되었다. 소수민족의 역사나 문화는 모두가 중원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이고 중국의 ‘지방정권’이나 ‘속국’,잘해야 번국이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발해문화의 당나라적 성격을 규명하여 자신들의 이론인 ‘통일적 다민족국가’에 끼워맞추기 위해 발해의 유적과 유물을 발굴한다는 것이다.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의 발해연구성과에 대해 중국학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새로운 문물고고자료가 발견되었다. 둘째, 연구성과 수량이 확대되었다.1978년부터 1999년까지 발표된 논·역저는 650여편에 이른다. 셋째, 연구의 범위가 점차 확대된다. 넷째,300여명에 이르는 발해사 연구진중 100여명은 장기 혹은 전문적으로 발해사 연구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다섯째, 발해학술 전문학술지가 『북방문물』『학습여탐색』『목단강사원학보』『박물관연구』등의 수십종에 달하고 연구기관도 1985년에 흑룡강성발해료금사연구회가 설립되고 1990년에 발해상경박물관이 발해사연구자연의회를 성립시키고 1998년 흑룡강성발해학연구중심이 하얼빈에 성립되었다고 한다. 임상선(한국교과서 연구소) 「중국 역사교과서의 고구려·발해사」『대고구려역사 중국에는 없다』예문당 2004,6 342p
2) 간도협약
2-1) 간도
간도는 넓게는 만주 지역 전체를 일컫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백두산 북쪽의 만주지역일대, 우리가 흔히 연변이라고 부르는 중국 길림성 동쪽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지역인 북간도를 가리킨다. 지형적으로 볼 때 간도는 남서쪽의 백두산을 주봉으로 장백산맥이 자리하고 남쪽으로는 두만강이 흐르고있다. 간도間島라는 지명은 중국 청왕조를 건립한 만주족이 이 지역을 그들의 발상지로 여겨 봉금의 땅으로 삼고 출입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있는 섬과 같은 곳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이 정착해 개간한 땅이라는 뜻에서 간도懇島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찍이 간도는 고조선을 잉태한 우리 만족의 발상지였고 고구려의 북방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했으며,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주활동영역으로 역사속에서 검증된 우리 민족의 영터이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전기에 이르는 기간에는 여진족과 거란족이 각지에서 흩어져 살았으나 이후 우리 민족이 이주해 개척을 시작하면서 실질적인 땅의 주인으로 확고한 위치를 점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간도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따라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설치되어 있으며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이 가운데 조선족이 전체의 약 40%인 80여만명에 달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한족-만주적-회족 순으로 분포하고 있다.
2-2) 중국이 간도를 고집하는 이유
간도는 한중간의 안위를 담보하는 국경문제이자 국가의 존립기반으로 삶의 터전인 영토문제이며 또한 국민의 문제이다. 간도는 실제로 조선인이 거주라며 호흡하고 있는 곳이다. 중국으로서는 소수민족중 하나인 조선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남북한에게는 한 민족인 조선인의 문제이다. 이는 한국의 재외동포법 개정과도 연관되어 있다. 중국이 애써 조선족을 자국민으로 통합하려는 것과 한국에서 조선족을 동포로 간주하는 것과의 역학관계를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간도는 국방상 중요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간도는 강을 끼고 산으로 둘러싸인 사방이 견고한 지역이므로 전투시 천연적인 요새이다. 또한 간도는 각종 광산물과 삼림, 농업, 수렵, 어업 등이 풍부한 곳으로 경제적인 보고이다. 최근 중국은 서부대개발에 버금가는 동북 대 개발을 위해 2003년 말 74억 달러의 투자를 공언하고 적극적인 개발에 힘쓰고 있다. 또한 간도는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이다. 이 곳에 근거지를 두고 육로와 선박과 철도 등을 이용하여 자원을 개발한다면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올릴수 있는 곳이다. 간도는 해안과 대륙을 결합하는 방사선령 교통선로의 집약지이다. 중국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라 러시아 연해주 접경까지 연결되는 1,380Km 의 동부변경철도를 연내에 착공할 계획이다. 이 철도는 이미 건설된 중국 동북 지역의 11개 철도와 연결됨으로써 간도는 그야말로 교통의 중심지로 부각될 것이다. 간도는 전략적 요새로서 동아시아를 제압할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중일 삼국의 세력이 접촉하는 완충지대이자 동서를 장악하고 남북을 감지할 수 있는 잠재력을 구비한 요지이다. 누구든지 이곳을 차지하면 크게는 주변의 세력을 제압할 수 있고 작게는 자국의 국경을 견고히 할 수 있다. 중국은 이 지역을 미래의 중심으로 여기고 있다. 한국일보 2004. 4. 19
2-3) 간도협약
19세기 중엽이후 조선 농민의 두만강 월경 농사가 시작되고 또 1881년 청나라가 봉금封禁을 해제하여 청나라 사람의 간도 이주로 인해 간도의 정치적 영유권문제가 발생했다. 1882년 초 청나라는 우리 정부에 대해 월경을 엄금하도록 요구해왔고, 1883년에는 간도의 조선 농민을 모두 소환하도록 요구하며 정치적 압력을 가해왔다. 이에 우리 정부는 답사 결과와 여러 가지 자료를 제시하면서 토문강은 쑹화 강 상류이며, 간도지방은 우리 영토임을 주장하고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조사를 통해 국경을 확정할 것을 제기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조선의 제의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1885년 간도 일부지방의 조선주민을 강제로 추방하자 우리 정부는 다시금 토문감계를 요청함으로써 간도 귀속문제는 다시금 양국간의 외교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간도 문제 해결을 위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제 1차 회담인 을유감계회담은 우리측의 제안으로 1885년 11월 회령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1888년까지 3차례의 회담이 있었으나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했다. 청나라는 두만강 상류를 투먼강으로 보고 정계비의 토문강이 곧 투먼강을 가리킨다고 강변했기 때문이다. 총일전쟁 후 대한제국은 청나라와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함에 따라 간도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897년 이후 2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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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8.21
  • 저작시기20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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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25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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