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실리적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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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들어가며

2.만주족의 흥기

3.명,후금 충돌이전의 삼국관계
1. 명의 대여진 정책
2.조선의 대여진 정책
3. 조선과 후금의 관계

4. 명, 후금 충돌과 조선의 태도
1.후금의 대면선전포고
2. 명의 파병요청
3. 광해군의 정책

5. 맺으며-광해군 외교의 의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잠통(潛通)케 하였다. 그러므로 심하전역에 있어 노병이 먼저 우리 통역을 부르매, 홍립이 곧 투항한 것이다.
위에서 보이듯 홍립의 투항은 금과의 화호를 도모하고 또 명에 대하여도 그것을 유지하려는 양단정책을 취하고 있던 광해군의 밀지에 의한 투항이 가능하다. 또한 광해군의 생각은 양사가 강홍립의 투항의 죄를 극론하고 그들의 처노를 구수치죄(拘囚治罪)하자는 계청에 대하여 왕이 자못 불쾌히 여기어
내 비록 변변치 못하나 이러한 일(失敗)이 있을 것을 안지 오래 되었다. 그대들은 이 적후금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의 병력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상년에 명으로부터 원병 요청이 있을 때 나의 우려한 바는 우리 나라의 인심이 본래 견고치 못하고 군인의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단 출정하여서는 조전(助戰)의 용이 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상년 출병이후 그대들은 우리 나라 병정이 일격 하에 적을 탕평할 것과 같이 생각하였으리라, 병가의 일이 어찌 두렵지 아니하냐, 고인이 감히 병을 경솔히 쓰지 아니 하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명이 만일 병위를 성히하여 그 국경을 엄수한다면 아무도 이를 침범치 못할 것이다. 이것을 생각지 않고 경솔히 적지에 심입 한다면 패배는 정한 일일 것이다...(중략)... 우리 나라의 계책으로는 군신상하가 한 뜻으로 개선에 힘써 군사를 기르고 장재를 선택하고 민폐를 제거하고 인심을 위열(慰悅)시키고 둔전을 개척하고 병기를 조련하고 성지(城池)와 봉수(烽燧)를 정비한 뒤에야 믿음직하게 될 것이다. 홍립이 적에게 투항하였다고 해서 이렇게 까지 급히 서둘 필요가 이는가, 홍립이 불행히도 적측에 몰입돼서 견문한 바를 비밀히 글로써 들려주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냐. 아- 묘당에 노성한 인재가 거의 다 몰려 나가고 년소미숙한 사람들이 비국(備局)에 충입 되었으니 나라를 꾀하는데 있어 마땅치 못할 것은 물론이다. 光海君日記 卷 139 11年 4月8日 條
라고 하였다. 이는 무조건으로 명을 숭배하고 추종하던 조신들의 언론과 비교하여 왕의 심모원책(深謀遠策)이 보이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Ⅴ. 맺으며 - 광해군 외교의 의의
이상에서 17세기 초반의 명과 후금, 그리고 조선의 관계를 통하여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알아보았다. 명과는 계속해서 사대관계 있던 조선이 그들의 파병 요구를 거절하고 회피하며 명과 반대입장에 있던 후금과의 화친적인 교류는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광해군은 이 두 나라의 속에서의 중립적인 외교를 통해 조선의 위치를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즉, 광해군은 명분과 의리만을 따지는 조정의 대신들과 달리 명과 후금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냉철하게 간파하여 국익에 유리한 정책을 꾀했던 것이다.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거론하며 명분론에 입각한 외교가 아닌 외세의 흐름을 읽고 전력적으로 행한 광해군의 대북 외교는 큰 의의가 있다. 또한 두 나라의 감정을 살피며 자극하지 않는 쪽에서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 내실을 꾀했다는 점도 광해군 외교의 의의라 할 수 있겠다. 단순히 이쪽의 뜻에 맞추고 또 다른 쪽의 뜻에도 맞추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원만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고 그 원만한 관계를 통해 마련한 안정적인 시간을 광해군은 내부의 힘을 키우는데 사용한 것이다. 이렇듯 광해군의 주체적이고 합리적인 외교정책은 세계의 여러 나라와 함께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많은 의의를 줄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 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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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종: 「여진관계」,『한국사』9, 국사편찬위원회, 1977.
김해종: 「對청對여진관계」『韓國史論』4, 국사편찬위원회, 1981.
정홍준:, 「청의 침입과 명청관계의 변화」,『한국사』8, 한길사, 1995.
최호균: 「광해군의 대북방정책에 관한 일고찰 -대명파병과 밀지문제를 중심으로 -」, 성균관대학교, 1983
김구진: 「명대 여진사회의 경제생활양식과 그 변화」,『동양사학연구』17, 서울대 동양사학회, 1982.
이현희: 「조선 전기 내조 야인의 정략적 대우에 대하여」, 『사학연구』18, 신석호 박사화갑기념 특집, 한국사학회, 1964.
오금성: 「명말 청초의 사회변화」,『강좌 중국사』Ⅳ, 지식산업사, 1989.
최소자: 「호란과 조선의 대명청 관계의 변천」,『이대사원』12, 1975.
최영희: 「임진왜란 중의 대명사대에 대하여」,『사학연구』18,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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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9.17
  • 저작시기20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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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28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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