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킬링필드를 통해 본 캄보디아의 정치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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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1945년 이전

Ⅱ. 시하누크 시대

Ⅲ. 크메르 공화정 및 내전

Ⅳ. 민주 캄푸치아

Ⅴ.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Ⅵ. 그 이후와 현재

본문내용

게 대립하며 유지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캄보디아의 두 세력은 캄푸치아의 이런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캄보디아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중국과 소련, 베트남과 전후 복구에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미국, 일본 그리고 아세안 등을 포함한 국가들을 통한 신질서의 조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소련과 중국은 캄푸치아 사태의 조속하고 명예로운 종결을 희망하게 되었고 소련은 베트남에게 경제적, 군사적 압력을 통해 캄푸치아에 주둔한 베트남군의 철수에 영향을 행사하게 되었고 이런 극적인 변화에 따라 1988년 7월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캄푸치아 문제를 위한 ‘JIM(Jakarta Informal Meeting)’이라 칭한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를 통해 캄보디아의 양대 세력과 중국, 소련, 베트남, 아세안, 미국, 일본 등이 참가해 캄보디아 평화정착을 위한 노력에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1989년 7월 사흘 간 파리에서 열린 캄보디아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 평화회담은 민주 방식에 의한 총선 실시 및 외세 개입 종식 방안 등에 대한 문제 해결을 위한 3개 실무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또한 실질적으로 캄보디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앞선 회의에서 말한 원칙들보다는 캄보디아 내의 양대세력에게 주는 군사적 지원의 중지가 더욱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이 회의를 통해 국제감시기구 설치문제와 총선거를 위한 과도정부 구성문제, 정전 등을 주로 다루었는데 캄보디아 국내의 양 세력은 1989년 7월 원탁회의를 통해 원칙적인 문제에 대한 합의를 했다. 그러나 상기 3가지 방안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크메르 루즈의 역할을 놓고 이견이 속출하여 돌연 결렬되었다. 훈센 수상은 크메르 루즈의 실권자인 폴 포트가 200만명 크메르 인을 학살한 것을 이유로 잠정정부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시하누크는 군사적으로 가장 강한 조직을 가지고 있는 크메르 루즈세력을 참가 시키지 않으면 새로운 내전을 야기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시하누크를 지원하던 미국과 베트남, 소련도 마찬가지로 반대했는데 크메를 루즈를 지지해온 중국만이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한편 1989년 7월 훈 센 정부는 베트남군이 철수하자 세력기반 상실을 우려하여 중립국 선언을 한다. 이들은 국명을 캄푸치아인민공화국에서 캄보디아국으로 개칭하고 국가와 국기도 바꾸었다.
파리회담의 낙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베트남군이 철수한 뒤 캄보디아의 국내세력 간의 정권을 잡기위한 투쟁을 끊이지 않았다. 미국의회는 시하누크에게 추가 군사지원을 승인하였고 중국은 크메르 루즈에게 각종 지상전 무기를 공급했다. 또한 베트남과 소련은 대대 규모의 MIG-21기를 캄보디아에 파견했다. 이에 따라 캄보디아 사태가 제 2의 아프가니스탄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에 유엔 안보리 5개국은 1990년 1월 파리에서 회담을 열어 캄보디아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국제평화유지군이 안보를 담당한다는데 합의하였다. 또한 유엔캄보디아과도행정기구(UNTAC)의 유엔평화유지활동이 여러차례 파리회담의 결실로 1992년부터 본격화 되어 22.000명의 인원과 20억 달러에 달하는 유엔 예산이 투입되었다. 또한 UNTAC는 40만에 육박하는 캄보디아 난민을 본국으로 귀환시키고 각 정파에 대한 무장해제를 실시하는 등 많은 실적을 쌓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 크메르 루즈가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지도자인 키우 삼판이 총선을 거부하여 문제를 낳기도 했다. 어쨌든 1993년 5월 캄보디아 자유총선이 실시되었고 결과는 훈센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시하누크가의 재집권을 뒷받침하는 결과를 낳았다. 20여개의 정당이 참가한 선거에서 시하누크와 그의 아들 라나리드가 이끄는 ‘캄보디아 자주중립평화협력을 위한 민족연합전선’이 훈 센 정권을 제치고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 총선 이후 라나리드와 훈 센이 정치체제에 대한 만족할 만한 결론을 끌어내는 데 실패하여 시하누크를 국왕에 추대하는 입헌군주제로 회귀하였다. 권력구조에는 1차 내각에 한해 5년간 제 1 수상에 라나리드, 제 2 수상에 훈 센을 임명하여 각 정파 간의 배분을 원칙에 따라 이중체제를 형성하였다. 한편 새롭게 형성된 정부는 크메르 루즈 세력을 고립시키기 위해 아세안 국가들과 관계개선에 노력했다. 또한 중국이 군사 경제적으로 크메르 루즈에 대한 원조를 중지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캄보디아와 중국의 관계도 점차 개선되고 있다. “동남아와 ASEAN" 양승윤. p37-44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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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9.23
  • 저작시기20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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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29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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