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백남준의 사상적 배경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의 특징과 미술사적 의미
백남준의 작품세계
참고문헌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의 특징과 미술사적 의미
백남준의 작품세계
참고문헌
본문내용
한 재담으로 예술가의 사회적 위치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작가 백남준은 한국이 낳은 가장 유명한 미술가 중 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를 세계적인 비디오 예술가 혹은 전위 예술가로 알고 있다. 또한 과천 현대 미술관에 있는, 텔레비전을 쌓아 올려 만든 그의 작품 다다익선 또한 많은 미디어들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에게 백남준이란 사람이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 중반이 지나서였다. 1988년 즈음, 올림픽으로 인해 세계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세계 속의 한국인을 소개하면서 백남준을 알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이미 1960년대부터 독일, 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으며 세계 100대 현대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었다.
경성 최고 상인의 다섯 남매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쇤베르크의 음악을 알고, 마르크스 사상에 젖었던 어려서부터 홍콩, 일본, 독일 등지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유학 생활로 인해 그는 보다 자유롭고 폭넓은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
1950년대에는 존 케이지라는 세계적인 현대음악 작곡가가 있었다, 백남준은 그를 스승이라 불렀으며 그는 “당장 죽게 된다면 백남준의 재담을 못듣는 것이 가장 아쉽다” 라고 말할 정도로 백남준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1959년 독일의 쾰른에서 백남준은 “존 케이지에게 경의를” 이라는 퍼포먼스를 발표하면서 피아노 2대를 부수고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당시에 구두에 물을 담아 마시거나, 머리에 먹물을 묻히고 글씨를 쓰는 혹은 죽은 토끼를 들고 나와 토끼에게 그림을 가르치겠다는, 이러한 광적 퍼포먼스를 주로 했던 백남준, 조셉 보이스 등의 예술가들을 플럭서스 예술가라 불렀다. 플럭서스 예술은 사회에 기능하지 않는 예술에 반대한다는 기치를 들고 나타났다. 플럭서스는 난해하고 기이했지만, 재미있었고 충격적이었다. 때문에 대중들은 이 과격한 예술에 환호하고 금새 빠져들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주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백남준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텔레비전 예술을 시작했다. 텔레비전 정원을 만들거나 텔레비전 앞에 부처를 갖다 놓기도 하고, 심지어는 텔레비젼으로 첼로를 만들기도 했다. 늘 공격적이고, 저항적인 그는 대중의 우상과도 같은 텔레비전의 횡포를 예술적으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늘 대중과 교감하는, 가장 일반적인 텔레비전을 통해 수많은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그는 이상을 말하고, 자연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백남준의 작품세계
완전피아노(1960) ]
당시 독일에서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자주 벌렸던 백남준이 가지고 있던 여러 대의 피아노 중 하나를 그의 친구와 함께 제작한 작품이다. 전시회 후에 팔리지 않은 이 피아노 작품을 들고 투덜거리며 길가에서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백남준은 그 당시에는 10년 후 억만금이 될 작품을 부수고 있었던 것를 꿈에도 몰랐다고 고백하였다.
[ TV 부처 (1978) ]
동양적 정서를 갖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며 백남준이기에 가능했다고 서양사람들이 극찬한 작품이다. 그가 조국에 대한 정서로 가지고 있는 부처이미지를 작품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부처는 고고해 보이며 그 앞의 텔레비전은 부처 앞에 놓여있는 우주 공간처럼 보여지고 있다. 그는 TV를 이용하여 TV브라, TV로댕 등 여러 응용작품을 제작하였다.
[굿모닝 오웰 (1984) ]
1984년 백남준은 파리의 퐁피두 센터 앞에서 위성을 이용한 중계 예술 <굿모닝 미스터 오웰>를 보였다. 이 작품은 새벽2시 우리나라에서도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1984년>이란 소설로 텔레비전이 인류를 지배하리라는 조지 오웰의 시각을 부정하고자 그는 참여 TV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텔레비전 예술을 통해 인류에의 희망을 제시하고자 하는 그의 이상이었다.
[ 다다익선 (1988) ]
과천 현대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다. 88올림픽을 기념하여 제작된 것으로 텔레비전들을 탑처럼 쌓아 높이만 해도 18미터가 넘는 작품이다. “언젠가는 전세계 TV를 한 집안에서 보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 그는 전세계의 이미지를 1003대의 모니터에서 쏟아내는 현란한 이미지들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백남준의 생애를 정리하며...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백남준이란 사람의 이름을 생소하게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사람도 아니고, 예술에 대해 많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디지털쪽에 이전부터 관심이 많아서 백남준이란 사람을 관심 있게 지켜봐 왔다. 그가 비록 한국보다는 외국에서 더 인정받았지만, 그의 작품 속에서는 항상 조국인 대한민국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히 보였다.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로써 미술사에 중요한 한 획을 긋는 아주 혁신적인 사람이다. 그의 일생의 겨우 20%만이 대한민국이 존재하지만 그의 작품과 그의 사상, 가치관 속에서는 늘 존재해왔다. 그가 한국의 백남준에서 세계적인 백남준이 된 이면에는 이렇게 한국성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함께 그것을 작품에 녹여내는 미학적, 조형적 탐구 의자가 깔려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샤머니즘은 사유방식에 대한 참조, 그 문화적 기능과 의미에 대한 숙고를 통해 대중소통, 관객참여, 나아가 전지구적 문화교류를 추구하는 상호성의 예술을 개념화한 것이다. 그는 예술적 영감과 과학 정신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다. 백남준이 남겨 준 예술적 유산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현대미술의 지형도의 대부분은 백남준이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백남준을 우리는 그저 비디오아트 창시자 백남준 그 하나로만 정의내리기엔 너무 아쉽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참고문헌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에 관한 연구 - 박 혜정(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
월간미술 life story of NAM JUNE PAIK (백남준 특집호)2006년 3월호
백남준(21권)-백남준, 엮은이: 김 세 실 출판사: 한국 퍼 킨 스
20세기 현대미술-백남준 http://blog.naver.com/doolyking
우리에게 백남준이란 사람이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 중반이 지나서였다. 1988년 즈음, 올림픽으로 인해 세계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세계 속의 한국인을 소개하면서 백남준을 알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이미 1960년대부터 독일, 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으며 세계 100대 현대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었다.
경성 최고 상인의 다섯 남매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쇤베르크의 음악을 알고, 마르크스 사상에 젖었던 어려서부터 홍콩, 일본, 독일 등지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유학 생활로 인해 그는 보다 자유롭고 폭넓은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
1950년대에는 존 케이지라는 세계적인 현대음악 작곡가가 있었다, 백남준은 그를 스승이라 불렀으며 그는 “당장 죽게 된다면 백남준의 재담을 못듣는 것이 가장 아쉽다” 라고 말할 정도로 백남준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1959년 독일의 쾰른에서 백남준은 “존 케이지에게 경의를” 이라는 퍼포먼스를 발표하면서 피아노 2대를 부수고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당시에 구두에 물을 담아 마시거나, 머리에 먹물을 묻히고 글씨를 쓰는 혹은 죽은 토끼를 들고 나와 토끼에게 그림을 가르치겠다는, 이러한 광적 퍼포먼스를 주로 했던 백남준, 조셉 보이스 등의 예술가들을 플럭서스 예술가라 불렀다. 플럭서스 예술은 사회에 기능하지 않는 예술에 반대한다는 기치를 들고 나타났다. 플럭서스는 난해하고 기이했지만, 재미있었고 충격적이었다. 때문에 대중들은 이 과격한 예술에 환호하고 금새 빠져들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주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백남준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텔레비전 예술을 시작했다. 텔레비전 정원을 만들거나 텔레비전 앞에 부처를 갖다 놓기도 하고, 심지어는 텔레비젼으로 첼로를 만들기도 했다. 늘 공격적이고, 저항적인 그는 대중의 우상과도 같은 텔레비전의 횡포를 예술적으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늘 대중과 교감하는, 가장 일반적인 텔레비전을 통해 수많은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그는 이상을 말하고, 자연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백남준의 작품세계
완전피아노(1960) ]
당시 독일에서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자주 벌렸던 백남준이 가지고 있던 여러 대의 피아노 중 하나를 그의 친구와 함께 제작한 작품이다. 전시회 후에 팔리지 않은 이 피아노 작품을 들고 투덜거리며 길가에서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백남준은 그 당시에는 10년 후 억만금이 될 작품을 부수고 있었던 것를 꿈에도 몰랐다고 고백하였다.
[ TV 부처 (1978) ]
동양적 정서를 갖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며 백남준이기에 가능했다고 서양사람들이 극찬한 작품이다. 그가 조국에 대한 정서로 가지고 있는 부처이미지를 작품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부처는 고고해 보이며 그 앞의 텔레비전은 부처 앞에 놓여있는 우주 공간처럼 보여지고 있다. 그는 TV를 이용하여 TV브라, TV로댕 등 여러 응용작품을 제작하였다.
[굿모닝 오웰 (1984) ]
1984년 백남준은 파리의 퐁피두 센터 앞에서 위성을 이용한 중계 예술 <굿모닝 미스터 오웰>를 보였다. 이 작품은 새벽2시 우리나라에서도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1984년>이란 소설로 텔레비전이 인류를 지배하리라는 조지 오웰의 시각을 부정하고자 그는 참여 TV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텔레비전 예술을 통해 인류에의 희망을 제시하고자 하는 그의 이상이었다.
[ 다다익선 (1988) ]
과천 현대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다. 88올림픽을 기념하여 제작된 것으로 텔레비전들을 탑처럼 쌓아 높이만 해도 18미터가 넘는 작품이다. “언젠가는 전세계 TV를 한 집안에서 보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 그는 전세계의 이미지를 1003대의 모니터에서 쏟아내는 현란한 이미지들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백남준의 생애를 정리하며...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백남준이란 사람의 이름을 생소하게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사람도 아니고, 예술에 대해 많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디지털쪽에 이전부터 관심이 많아서 백남준이란 사람을 관심 있게 지켜봐 왔다. 그가 비록 한국보다는 외국에서 더 인정받았지만, 그의 작품 속에서는 항상 조국인 대한민국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히 보였다.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로써 미술사에 중요한 한 획을 긋는 아주 혁신적인 사람이다. 그의 일생의 겨우 20%만이 대한민국이 존재하지만 그의 작품과 그의 사상, 가치관 속에서는 늘 존재해왔다. 그가 한국의 백남준에서 세계적인 백남준이 된 이면에는 이렇게 한국성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함께 그것을 작품에 녹여내는 미학적, 조형적 탐구 의자가 깔려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샤머니즘은 사유방식에 대한 참조, 그 문화적 기능과 의미에 대한 숙고를 통해 대중소통, 관객참여, 나아가 전지구적 문화교류를 추구하는 상호성의 예술을 개념화한 것이다. 그는 예술적 영감과 과학 정신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다. 백남준이 남겨 준 예술적 유산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현대미술의 지형도의 대부분은 백남준이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백남준을 우리는 그저 비디오아트 창시자 백남준 그 하나로만 정의내리기엔 너무 아쉽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참고문헌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에 관한 연구 - 박 혜정(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
월간미술 life story of NAM JUNE PAIK (백남준 특집호)2006년 3월호
백남준(21권)-백남준, 엮은이: 김 세 실 출판사: 한국 퍼 킨 스
20세기 현대미술-백남준 http://blog.naver.com/doolyk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