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 4.19와 5.18의 명칭에 대한 견해
Ⅱ 4.19와 5.18의 배경
* 4.19와 5.18의 시대상황
* 4.19와 5.18의 증폭되는 계기
Ⅲ 4.19와 5.18의 비교분석(공통점과 차이점)
Ⅳ 4.19와 5.18에 대한 의의와 한계 그리고 평가
Ⅴ 결론
* 4.19와 5.18의 명칭에 대한 견해
Ⅱ 4.19와 5.18의 배경
* 4.19와 5.18의 시대상황
* 4.19와 5.18의 증폭되는 계기
Ⅲ 4.19와 5.18의 비교분석(공통점과 차이점)
Ⅳ 4.19와 5.18에 대한 의의와 한계 그리고 평가
Ⅴ 결론
본문내용
그리고 평가
지금까지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았다. 두 사건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꽤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만 애기할 것이 아니라, 이 두 사건의 의의와 그리고 한계, 평가를 통해서 우리가 얻거나 배울수 있었던 점에 대해서 유추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조사하고 정리하면서 우리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최상의 접근방법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각 4.19혁명과 5.18 민주화운동이 우리 현대사에서 갖고있는 의의에 대해서 애기해보겠다.
우선, 4.19혁명에 대해서 애기해보면 4.19 혁명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시민적 자유를 피로써 전취한 민주혁명이다. 따라서 이런 4.19 혁명은 여러 가지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 첫째로 애기하자면 이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성공한 시민, 민주혁명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한국 국민의 민주의식의 발전을 의미하며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불가피한 진통과 자기투쟁을 의미한 것이라 볼수 있다. 국민은 해방과 더불어 도입되기 시작한 서구민주주의가 그 제도와 운영절차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삭만 하면 그대로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직접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이식이나 운영절차의 모방만으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투쟁을 통해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러한 국민적 각성에 따른 투쟁이 바로 4.19혁명으로 나타났다. 4.19혁명을 한국 민주투쟁사의 제일보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4.19혁명은 공권력의 횡포에 대한 국민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리를 그대로 입증하였다.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받지 못하는 이승만 정권은 결코 존립할 수 없음을 보여준것이다.
셋째, 20세기 후반 전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이른바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의 한국적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한국 학생들은 19년 3.1독립운동과 26년 6.10만세사건, 그리고 29 년 광주학생사건을 통해서 강한 저항의식과 열렬한 애족애국심을 발휘한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4.19혁명은 그러한 전통적 저항의식이나 애국심의 발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4.19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미완의 상태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에게 또 하나의 귀중한 각성과 교훈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4.19 혁명은 우리에게 있어서 많은 의의와 이념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지금부터는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의의 「다시쓰는 한국현대사에서 참고하였음.」
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5.18 민주화운동은 결국 죽음과도 같은 침묵속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도 실패한 운동이였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죽지 않았다. 광주는 다시한번 살아 꿈틀거리면서 쓰러져 가는 역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첫째, 광주민주화운동은 미군과 군부독재의 정체를 명확히 폭로하였다. 그들은 미군과 군부독재가 권력유지를 위해서라면 대량학살을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하였다.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수호자, 경제 성장의 주역 등 그동안 미국과 군부독재의 얼굴에 씌어 있던 온갖 가면들을 한순간에 날려버린것이다. 그로부터 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 민중 속에 세찬 반미 반독재 투쟁의 돌풍을 불러일으키는 진원지가 되었다. 학살자를 눈앞에 두고 더 이상 그가 좋으냐 나쁘냐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둘째, 군부독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결사항전의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20여 년 전 5.16 군사쿠데타 당시 우리 민중은 총칼의 위협 앞에서 맥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 민중은 군부독재의 폭력 아래서 굴종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게다가 얼마전 5.17 군사쿠데타를 눈앞에 두고서도 대다수 민중들은 군대 투입의 위협에 그만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려야만 했다. 이런 지겨운 굴종의 시대는 광주민주화운동에서의 엄청난 피흘림을 대가로 치르고서야 끝내 자신을 마감할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우리 민중들은 광주에서의 피의 항쟁을 목도하면서 비로소 고통스런 참회에 젖어 들었고 그리하여 총칼과 위협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고 또한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것이다.
셋째, 민중의 자치 능력을 입증하였다. 해방 광주, 그것은 기존의 낡은 질서가 무너진 속에서 민중 자신들의 손에 의해 창조되고 유지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 준 감격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기존의 지배 질서가 붕괴되면 오직 혼란만 존재한다는 통치자들의교설이 갖는 기만성이 낱낱이 폭로된 것이다. 즉 해방 광주에서 분명하게 억압의 질서가 붕괴되고, 해방의 질서를 맞는다는 것을 통해 알수있다. 이렇듯 광주는 허위와 기만에 가린 역사의 장막을 과감하게 걷어냈다. 비록 실패하였기는 하였지만, 좌절한 민중들의 가슴속을 파고들면서 새로운 투쟁의 각오를 불러 일으킨것이다.
지금까지 4.19 혁명과 5.18 8민주화운동에 대한 의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는 서서히 결말을 내릴때가 된것같다. 결말을 맺기전 이제, 지금까지 애기한 4.19혁명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한계와 평가에 대해서 간단하게 애기하고, 최종적인 결론을 맺고자 한다. 먼저 4.19혁명과 5.18 민주화운동의 한계와 평가에 대해 애기해보겠다.
먼저 4.19혁명에 대해 애기하자면, 4.19 혁명은 앞에서도 애기하였듯이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독재체제를 비판하는 반독재, 민주주의 이념을 지양하고 있습니다. 그러지만, 전국적인 광범위안 시위의 전개라는 외형적 모습과는 달리 4.19를 이끌고자 했던 주도 세력 형성이 미진했다는 점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이승만 하야후 후속정권의 무능으로 또 다른 독재를 부르는 5.16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미완의 혁명이라고 불리기고 하였고 또한 4.10혁명의 한계점으로 볼수있다. 그렇지만 4.19혁명은 당시 실리주의 미만의 가치관의 전도로 인한 기성세대의 무기력과 퇴페의 낙인찍인
지금까지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았다. 두 사건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꽤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만 애기할 것이 아니라, 이 두 사건의 의의와 그리고 한계, 평가를 통해서 우리가 얻거나 배울수 있었던 점에 대해서 유추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조사하고 정리하면서 우리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최상의 접근방법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각 4.19혁명과 5.18 민주화운동이 우리 현대사에서 갖고있는 의의에 대해서 애기해보겠다.
우선, 4.19혁명에 대해서 애기해보면 4.19 혁명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시민적 자유를 피로써 전취한 민주혁명이다. 따라서 이런 4.19 혁명은 여러 가지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 첫째로 애기하자면 이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성공한 시민, 민주혁명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한국 국민의 민주의식의 발전을 의미하며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불가피한 진통과 자기투쟁을 의미한 것이라 볼수 있다. 국민은 해방과 더불어 도입되기 시작한 서구민주주의가 그 제도와 운영절차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삭만 하면 그대로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직접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이식이나 운영절차의 모방만으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투쟁을 통해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러한 국민적 각성에 따른 투쟁이 바로 4.19혁명으로 나타났다. 4.19혁명을 한국 민주투쟁사의 제일보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4.19혁명은 공권력의 횡포에 대한 국민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리를 그대로 입증하였다.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받지 못하는 이승만 정권은 결코 존립할 수 없음을 보여준것이다.
셋째, 20세기 후반 전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이른바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의 한국적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한국 학생들은 19년 3.1독립운동과 26년 6.10만세사건, 그리고 29 년 광주학생사건을 통해서 강한 저항의식과 열렬한 애족애국심을 발휘한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4.19혁명은 그러한 전통적 저항의식이나 애국심의 발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4.19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미완의 상태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에게 또 하나의 귀중한 각성과 교훈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4.19 혁명은 우리에게 있어서 많은 의의와 이념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지금부터는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의의 「다시쓰는 한국현대사에서 참고하였음.」
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5.18 민주화운동은 결국 죽음과도 같은 침묵속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도 실패한 운동이였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죽지 않았다. 광주는 다시한번 살아 꿈틀거리면서 쓰러져 가는 역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첫째, 광주민주화운동은 미군과 군부독재의 정체를 명확히 폭로하였다. 그들은 미군과 군부독재가 권력유지를 위해서라면 대량학살을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하였다.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수호자, 경제 성장의 주역 등 그동안 미국과 군부독재의 얼굴에 씌어 있던 온갖 가면들을 한순간에 날려버린것이다. 그로부터 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 민중 속에 세찬 반미 반독재 투쟁의 돌풍을 불러일으키는 진원지가 되었다. 학살자를 눈앞에 두고 더 이상 그가 좋으냐 나쁘냐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둘째, 군부독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결사항전의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20여 년 전 5.16 군사쿠데타 당시 우리 민중은 총칼의 위협 앞에서 맥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 민중은 군부독재의 폭력 아래서 굴종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게다가 얼마전 5.17 군사쿠데타를 눈앞에 두고서도 대다수 민중들은 군대 투입의 위협에 그만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려야만 했다. 이런 지겨운 굴종의 시대는 광주민주화운동에서의 엄청난 피흘림을 대가로 치르고서야 끝내 자신을 마감할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우리 민중들은 광주에서의 피의 항쟁을 목도하면서 비로소 고통스런 참회에 젖어 들었고 그리하여 총칼과 위협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고 또한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것이다.
셋째, 민중의 자치 능력을 입증하였다. 해방 광주, 그것은 기존의 낡은 질서가 무너진 속에서 민중 자신들의 손에 의해 창조되고 유지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 준 감격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기존의 지배 질서가 붕괴되면 오직 혼란만 존재한다는 통치자들의교설이 갖는 기만성이 낱낱이 폭로된 것이다. 즉 해방 광주에서 분명하게 억압의 질서가 붕괴되고, 해방의 질서를 맞는다는 것을 통해 알수있다. 이렇듯 광주는 허위와 기만에 가린 역사의 장막을 과감하게 걷어냈다. 비록 실패하였기는 하였지만, 좌절한 민중들의 가슴속을 파고들면서 새로운 투쟁의 각오를 불러 일으킨것이다.
지금까지 4.19 혁명과 5.18 8민주화운동에 대한 의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는 서서히 결말을 내릴때가 된것같다. 결말을 맺기전 이제, 지금까지 애기한 4.19혁명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한계와 평가에 대해서 간단하게 애기하고, 최종적인 결론을 맺고자 한다. 먼저 4.19혁명과 5.18 민주화운동의 한계와 평가에 대해 애기해보겠다.
먼저 4.19혁명에 대해 애기하자면, 4.19 혁명은 앞에서도 애기하였듯이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독재체제를 비판하는 반독재, 민주주의 이념을 지양하고 있습니다. 그러지만, 전국적인 광범위안 시위의 전개라는 외형적 모습과는 달리 4.19를 이끌고자 했던 주도 세력 형성이 미진했다는 점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이승만 하야후 후속정권의 무능으로 또 다른 독재를 부르는 5.16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미완의 혁명이라고 불리기고 하였고 또한 4.10혁명의 한계점으로 볼수있다. 그렇지만 4.19혁명은 당시 실리주의 미만의 가치관의 전도로 인한 기성세대의 무기력과 퇴페의 낙인찍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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