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1) 김동리의 생애
2) 김동리의 작품 세계
2. 본론
1) 해방 전 초기 소설
- <김동리의 유, 소년기 및 세계관 형성>
- 작품 - 화랑의 후예, 山火, 무녀도
2) 해방기 작품 및 문학적 동향
- 작품 - 지연기, 달, 윤회설, 역마
- <김동리와 순수문학>
3) 해방기 이후 작품 (해방기 이후 ① - 6, 25 전쟁 후 60년대 초까지 )
- 작품 - 흥남철수, 사반의 십자가, 등신불
4) 해방기 이후 작품 (해방 이후② - 1960년대 중반 이후)
- 작품 - 까치소리
3. 결론
* 참고문헌
1) 김동리의 생애
2) 김동리의 작품 세계
2. 본론
1) 해방 전 초기 소설
- <김동리의 유, 소년기 및 세계관 형성>
- 작품 - 화랑의 후예, 山火, 무녀도
2) 해방기 작품 및 문학적 동향
- 작품 - 지연기, 달, 윤회설, 역마
- <김동리와 순수문학>
3) 해방기 이후 작품 (해방기 이후 ① - 6, 25 전쟁 후 60년대 초까지 )
- 작품 - 흥남철수, 사반의 십자가, 등신불
4) 해방기 이후 작품 (해방 이후② - 1960년대 중반 이후)
- 작품 - 까치소리
3.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었다. 이 작품에 나타난 바람직한 지식인이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주인공 백정후인 것이다. 그의 이름 ‘白正厚’자체가 이미 작가의 이상을 암암리에 반영한 것이거니와 과연 그는 매사에 결백하고 정정당당하며 또한 관후한 태도로 임할 줄 안다.
달
<달>에서 <달이>는 그 어머니 <모랭이>무당이 박수무당과 하룻밤의 인연을 맺어 태어난 달의 정기를 받은 아들이다. 그러므로 모랭이에게 달이는 아들이기 이전에 그녀가 존중하는 달의 화신이다. 이러한 모자관계는 <무녀도>에서 수국 꽃님의 화신인 <낭이>와 <모화>의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달이는 글방 사장의 딸 <정국>과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현실적인 제약으로 비극적 파국이 예비 된 것이었다. 그는 달의 화신이지만 세속적으로는 천한 무당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달이를 사랑한 정국은 그들의 관계가 마을에 알려지고 사랑이 금지되자 결국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그녀에게 주어진 비극적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달이 역시 재생의 공간인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써 자연의 달과 합일한다. 그가 달에게 정신을 빼앗긴 사람처럼 보인 것은 실연으로 인한 고적감 때문이 아니다. 정국의 죽음은 달이의 행위에 있어 단지 부수적인 동기일 뿐이다. 열아흐레 스무날 즈음하여 하늘의 달이 기울기 시작하면 그의 가슴은 그지없이 어둡고 쓸쓸하여졌다. 스무 사흘, 나흘 즈음에 , 밤도 이슥하여, 동쪽 하늘 끝에 떠오르는 그믐달을 바라볼 때엔 자기의 자신이 임종이나 하는 것처럼 숨이 가쁘고 가슴이 답답했다. 한 달에도 달을 못 보는 한 열흘 동안 그는 동면하는 파충류처럼 방 한구석에 이불을 뒤쓴 채 낮이고 밤이고 잠으로만 세월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초사흘 초나흘께부터 다시 서쪽 하늘가에 실낱같은 초생달이 비치기 시작하면 날로 더 차 가는 달의 얼굴과 함께 그의 가슴은 차츰 부풀어 오르면 숨결도 높아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초아흐레에서 열아흐레까지
한 열흘 동안이 그에게 있어서는 행복의 절정인 듯했다.
“달득은 달을 보고 반드시 정국을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달을 보는 것만이 즐겁고 자꾸 그리운 것 같았다”
라고 하듯이, 그의 의식과 행동은 달 자체에 대한 끌림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 역시 세속적인 죽음이라기보다는 달에 융합하는 운명의 실현이며 재생이 된다. 달이는 신령님께서 무당 모랭이에게 달님을 점지한 것이기에 자연스레 달님으로 돌아 간 것이다.
샤머니즘의 신은 자연 속에도 있고, 사람 속에도 깃들어 있는데, 달이 물에 몸을 던진 것은 그 모체에 대한 향수랄까 그런 것에 이끌리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달이의 이러한 운명은 <무녀도>에서 <모화>가 예기소에 빠져 죽는 것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행위였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비극의 세계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은 것이로되 서양 비극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며 그러한 차이의 바탕에는 자연에의 융합귀일이라는 전통적 도양 정신의 작용이 개재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달이의 죽음은 모화의 죽음에 비해, 그가 자연의 달에 합일하여 운명을 초극했다는 점을 보다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달>에서 달이는 물 속에 몸을 던져서 오히려 달과 합일되었다. <역마>에서 성기가 실연의 상처에서 혼연히 일어나 엿판을 둘러메고 육자배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집을 떠는 것과 마찬가지로 둘 다 김동리가 추구하는 문학의 “구경적 생의 형식”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윤회설
윤회설은 단편소설로 1939년의 <두꺼비>를 개작하여 쓴 것에 해당한다. <두꺼비>에서 말하는 ‘두꺼비 설화’는 이 해방공간에서도 밀접한 관련은 가진다. 두꺼비는 구렁이에게 잡아먹힘으로써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리고 “능구렁이는 과연 죽음”을 맞게 된다. 이는 역사의 종언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능구렁이 속에 새로운 두꺼비 새끼들은 새로운 역사를 상징하게 된다.
그 죽은 능구렁이의 뼈 마디마디 생겨난 그 수많은 두꺼비들의 새끼들은, 그 형제들을, 또 서로 싸우고 서로 미워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였다.
라고 작가는 적고 있다. 즉 김동리는 이 생(生)의 반복을 인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제 식민지 시기 능구렁이와 같은 운명의 큰 수레 앞에서 두꺼비가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뿐이었다. 두꺼비가 능구렁이에게 먹히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죽음과 비극, 실패로 드러나지만 심층적으로는 두꺼비가 능구렁이의 뱃속에서 죽음으로 능구렁이를 함께 죽이고 두꺼비는 새끼들을 그곳에 잉태한다는 논리이다. 새로운 새끼들의 탄생은 역사의 새로운 시작과 결부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새끼들 속에서 강자와 약자, 능구렁이와 두꺼비로 갈라지게 된다. 두꺼비와 능구렁이의 끝없는 싸움은 “윤회”라는 “구경적 삶”의 한 부분으로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며, 이것은 김동리의 역사의식과도 깊은 관련을 맺는다. 작품 <윤회설>은 인간 운명의 불변성을 해방 공간에서 재확인한 작품으로 규정된다. <두꺼비>가 1930년의 그것을 확인한 것이라면 <두꺼비>와 <윤회설>사이의 거리는 불과 7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7년의 거리란, 시대적 성격으로 보면 천지개벽에 해당된다.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시대적 성격으로 보아 새로운 역사의 시작 그러니까 천지개벽이라 해도, 그 사상적 본질에서는 개벽이기는커녕 단지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동일한 것의 반복 사상에서 바라보면 해방 공간이란 없다. 즉, 일제시대에도 두꺼비와 능구렁이의 싸움은 계속 되었고, 해방공간에서도 두꺼비와 능구렁이의 싸움은 계속되는 것처럼 “사회”라는 문학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는 곳일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간에 정치성이란 한낱 우주의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동리의 문학이 사회를 외면한 것이 아니라, 사회를 내려다보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혈거부족」, 「형제」등이 있다.
역마
백철은 <역마>의 “예술적 분위기의 배경에는 작가의 동양적인 순수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관념이 아니고 생의 영
달
<달>에서 <달이>는 그 어머니 <모랭이>무당이 박수무당과 하룻밤의 인연을 맺어 태어난 달의 정기를 받은 아들이다. 그러므로 모랭이에게 달이는 아들이기 이전에 그녀가 존중하는 달의 화신이다. 이러한 모자관계는 <무녀도>에서 수국 꽃님의 화신인 <낭이>와 <모화>의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달이는 글방 사장의 딸 <정국>과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현실적인 제약으로 비극적 파국이 예비 된 것이었다. 그는 달의 화신이지만 세속적으로는 천한 무당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달이를 사랑한 정국은 그들의 관계가 마을에 알려지고 사랑이 금지되자 결국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그녀에게 주어진 비극적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달이 역시 재생의 공간인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써 자연의 달과 합일한다. 그가 달에게 정신을 빼앗긴 사람처럼 보인 것은 실연으로 인한 고적감 때문이 아니다. 정국의 죽음은 달이의 행위에 있어 단지 부수적인 동기일 뿐이다. 열아흐레 스무날 즈음하여 하늘의 달이 기울기 시작하면 그의 가슴은 그지없이 어둡고 쓸쓸하여졌다. 스무 사흘, 나흘 즈음에 , 밤도 이슥하여, 동쪽 하늘 끝에 떠오르는 그믐달을 바라볼 때엔 자기의 자신이 임종이나 하는 것처럼 숨이 가쁘고 가슴이 답답했다. 한 달에도 달을 못 보는 한 열흘 동안 그는 동면하는 파충류처럼 방 한구석에 이불을 뒤쓴 채 낮이고 밤이고 잠으로만 세월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초사흘 초나흘께부터 다시 서쪽 하늘가에 실낱같은 초생달이 비치기 시작하면 날로 더 차 가는 달의 얼굴과 함께 그의 가슴은 차츰 부풀어 오르면 숨결도 높아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초아흐레에서 열아흐레까지
한 열흘 동안이 그에게 있어서는 행복의 절정인 듯했다.
“달득은 달을 보고 반드시 정국을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달을 보는 것만이 즐겁고 자꾸 그리운 것 같았다”
라고 하듯이, 그의 의식과 행동은 달 자체에 대한 끌림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 역시 세속적인 죽음이라기보다는 달에 융합하는 운명의 실현이며 재생이 된다. 달이는 신령님께서 무당 모랭이에게 달님을 점지한 것이기에 자연스레 달님으로 돌아 간 것이다.
샤머니즘의 신은 자연 속에도 있고, 사람 속에도 깃들어 있는데, 달이 물에 몸을 던진 것은 그 모체에 대한 향수랄까 그런 것에 이끌리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달이의 이러한 운명은 <무녀도>에서 <모화>가 예기소에 빠져 죽는 것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행위였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비극의 세계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은 것이로되 서양 비극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며 그러한 차이의 바탕에는 자연에의 융합귀일이라는 전통적 도양 정신의 작용이 개재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달이의 죽음은 모화의 죽음에 비해, 그가 자연의 달에 합일하여 운명을 초극했다는 점을 보다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달>에서 달이는 물 속에 몸을 던져서 오히려 달과 합일되었다. <역마>에서 성기가 실연의 상처에서 혼연히 일어나 엿판을 둘러메고 육자배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집을 떠는 것과 마찬가지로 둘 다 김동리가 추구하는 문학의 “구경적 생의 형식”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윤회설
윤회설은 단편소설로 1939년의 <두꺼비>를 개작하여 쓴 것에 해당한다. <두꺼비>에서 말하는 ‘두꺼비 설화’는 이 해방공간에서도 밀접한 관련은 가진다. 두꺼비는 구렁이에게 잡아먹힘으로써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리고 “능구렁이는 과연 죽음”을 맞게 된다. 이는 역사의 종언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능구렁이 속에 새로운 두꺼비 새끼들은 새로운 역사를 상징하게 된다.
그 죽은 능구렁이의 뼈 마디마디 생겨난 그 수많은 두꺼비들의 새끼들은, 그 형제들을, 또 서로 싸우고 서로 미워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였다.
라고 작가는 적고 있다. 즉 김동리는 이 생(生)의 반복을 인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제 식민지 시기 능구렁이와 같은 운명의 큰 수레 앞에서 두꺼비가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뿐이었다. 두꺼비가 능구렁이에게 먹히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죽음과 비극, 실패로 드러나지만 심층적으로는 두꺼비가 능구렁이의 뱃속에서 죽음으로 능구렁이를 함께 죽이고 두꺼비는 새끼들을 그곳에 잉태한다는 논리이다. 새로운 새끼들의 탄생은 역사의 새로운 시작과 결부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새끼들 속에서 강자와 약자, 능구렁이와 두꺼비로 갈라지게 된다. 두꺼비와 능구렁이의 끝없는 싸움은 “윤회”라는 “구경적 삶”의 한 부분으로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며, 이것은 김동리의 역사의식과도 깊은 관련을 맺는다. 작품 <윤회설>은 인간 운명의 불변성을 해방 공간에서 재확인한 작품으로 규정된다. <두꺼비>가 1930년의 그것을 확인한 것이라면 <두꺼비>와 <윤회설>사이의 거리는 불과 7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7년의 거리란, 시대적 성격으로 보면 천지개벽에 해당된다.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시대적 성격으로 보아 새로운 역사의 시작 그러니까 천지개벽이라 해도, 그 사상적 본질에서는 개벽이기는커녕 단지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동일한 것의 반복 사상에서 바라보면 해방 공간이란 없다. 즉, 일제시대에도 두꺼비와 능구렁이의 싸움은 계속 되었고, 해방공간에서도 두꺼비와 능구렁이의 싸움은 계속되는 것처럼 “사회”라는 문학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는 곳일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간에 정치성이란 한낱 우주의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동리의 문학이 사회를 외면한 것이 아니라, 사회를 내려다보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혈거부족」, 「형제」등이 있다.
역마
백철은 <역마>의 “예술적 분위기의 배경에는 작가의 동양적인 순수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관념이 아니고 생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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