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필자는 과학적인 역사와 비과학적인 역사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2.필자는 민족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3. 국민, 인종은 각각 민족 개념과 어떻게 다른 개념인가?
4.부족사회와 군장사회의 정의는? 군장사회와 도시국가는 어떻게 다른가?
5.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은 무엇인가?
6.기마민족의 신라 정복설과 기마민족 백제의 마한 정복설은 무엇인가?
7.백정은 한반도에 들어온 유목민의 후예이다라는 주장은 무엇인가?
...........
32.국사 연구를 국책 사업으로 대폭 지원하자라는 주장의 문제점은?
2.필자는 민족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3. 국민, 인종은 각각 민족 개념과 어떻게 다른 개념인가?
4.부족사회와 군장사회의 정의는? 군장사회와 도시국가는 어떻게 다른가?
5.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은 무엇인가?
6.기마민족의 신라 정복설과 기마민족 백제의 마한 정복설은 무엇인가?
7.백정은 한반도에 들어온 유목민의 후예이다라는 주장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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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국사 연구를 국책 사업으로 대폭 지원하자라는 주장의 문제점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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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와 중원 사이에 축조된 만리장성은 단순히 군사적인 경계선이 아니었고 문화적인 경계선이었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만리장성 북쪽의 만주와 한반도에는 지석묘와 비파형 동검문화로 대표되는 독자적인 문화가 존재하였고, 이 문화는 만리장성 남쪽의 청동기 문화와 확연히 구분되었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 만리장성 북쪽의 민족들은 우랄알타이어족의 언어들을 사용하였고, 남쪽의 민족들은 중국-티베트어족의 언어들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만리장성을 경계로 서로 다른 어족의 언어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만리장성이 군사적인 경계선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경계선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인들은 그들 자신을 북방아시아계의 민족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축조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원의 한족이 만리장성을 넘어 북방아시아 계통의 민족을 복속시킨 적이 있고 또한 북방아시아의 민족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지배한 적이 있지만, 만리장성은 오랫동안 중원의 한족과 북방아시아계 민족들 간의 경계선이 되어 왔다. 오늘날 중국의 영토가 만리장성을 넘어 만주 일대를 전부 포함하고 있음에 틀림없고, 이러한 현실은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28.고구려가 중국의 일개 지방 정권이었다는 주장의 문제점은?
고구려를 고대 중국의 일개 지방 정권에 불과한 소수민족정권이였다고 주장하는 근거 중의 하나는 고구려족이 한족의 한 갈래였다는 점이다. 즉, 고구려 선조가 한족에서 불리되었다는 가설을 제기하거나, 고이족을 중국 전설상의 인물 고양씨의 후예로 설정하여 고구려왕조의 후예임을 주장하고 있다 . 그러나 그것을 주장하는 [일주서]는 문제가 많은 서사이며, 고이족은 BC 10세기경에 등장하는 민족으로 BC 1세기경에 등장하는 고구려와 시기가 맞지 않는다. 고양씨는 전설상의 인물인데, 이 전설상의 인물과 고구려를 연관시키는 것은 과학적인 주앙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의 한족들은 주변의 민족을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란 멸시하면서 한족과 구별하여 왔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서는 부여, 고구려, 동옥저, 예, 마한, 진한, 변한, 왜에 대한 기록을 동이에 속하는 민족으로 묶고 있는데, 이것이 마로 고구려를 중국의 한족과 상당히 거리가 먼 민족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명확한 근거가 된다.
언어인류학적으로 볼 때도 고구려를 건설한 민족은 한족과 상당히 다른 민족임에 틀림없다. 고구려를 건설한 민족은 예족, 맥족, 혹은 예맥족 계열의 사람들임에 틀림없는데, 이들은 한족과 상당한 거리를 군 북방아시아계 민족에 속한다. 고구려를 포함하여 만주와 한반도에는 북방아시아계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 북방아시아계 민족들은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었다, 이들은 만리장성 남쪽의 중국-티베어족의 민족들과는 매우 다른 민족들이었다.
한족이 북방아시아계 민족들을 자국민으로 생각하였다면, 그들과 한족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리장성의 축조는 북방아시아에 중국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또한 북방아시아계 민족들과 한족 사이를 어떤 방식으로든 단절시키려는 한족들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북방아시아계 민족들이 세운 국가들을 모두 중국의 변방 소수민족의 국가라고 표현하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는다.
고구려를 고대 중국의 리개 지방 정권에 불과한 소수민족정권이었다고 주장하는 다른 근거는 고구려의 기원지가 한제국의 영역이었다는 점이다. BC 108년 한제국이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소수 민족들을 지배하기 위해 현도, 낙랑, 임둔, 진번의 한사군을 배치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현도군에 소속된 고구려 현을 지방관리로 하여금 실제적으로 관할하도록 한것도 사실일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라는 국가가 한제국의 영역에 위치하였고 한제국의 통치를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고구려를 중국의 일개 지방정권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제국주의(패권주의)적 발상이다.
29.만주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중국측의 학자들은 고구려와 수, 당나라와의 전쟁을 어떤 식으로 왜곡하여 설명하고 있는가?
만주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중국측의 학자들은 수와 당이 고구려와 전쟁을 치른 것을 국가와 국가간 전쟁이 아닌 중앙정권과 지방정권의 통일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고구려와 중원왕조의 관계는 지방정권과 중앙정권의 관계이기 때문에 수와 당에서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은 침략전쟁이 아닌 중앙에서 지방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통일전쟁이라는 것이다. 중국측 학자들은 수와 당의 황제가 고구려에 보낸 조서를 근거로 양자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으나, 황제의 조서가 정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고려하여야 한다.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은 7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수나라가 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왕조가 멸망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은 지방정권과 중앙정권의 전쟁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와의 관계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구당서]는 당의 고조가 AD622년 고구려 영류왕에게 보내 공문편지에서 ‘이제 두 나라가 서로 화평을 통하게 되었으니’라고 쓰고,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때 잡힌 수나라 군인 포로들을 돌려달라고 요청한 기록을 수록했다. 이 기록은 고구려가 당과 어깨를 나란히 한 당당한 독립국이었다는 의미이다.
30.일부 재야 사학자들의 민족주의 사관이 갖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19세기 말 이루 제국주의 세력이 침략에 따라 민족의 정체성과 단결을 강조하는 주장들이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그리고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10년의 일제강점에 대응하는 반일 감정으로 인하여 이른바 민족주의 사학이 등장하였다. 신채호의 [독사신론]에 의하여 토대가 마련된 민족주의 사학은 근대 사학의 단서을 열어 놓았고, 일본의 황국사관과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그런데 일부 재야 사학자들이 민족주의 사학에 너무 집착하여 역사학을 ‘비과학적인 역사’에 근거한 이데올로기 학문으로 몰고 있다. 일부 재야 사학자들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에 지나치게 매달려 있어서 역사를 너무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우리의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국수주의 성향을 불어넣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혈기왕성한
만주와 중원 사이에 축조된 만리장성은 단순히 군사적인 경계선이 아니었고 문화적인 경계선이었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만리장성 북쪽의 만주와 한반도에는 지석묘와 비파형 동검문화로 대표되는 독자적인 문화가 존재하였고, 이 문화는 만리장성 남쪽의 청동기 문화와 확연히 구분되었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 만리장성 북쪽의 민족들은 우랄알타이어족의 언어들을 사용하였고, 남쪽의 민족들은 중국-티베트어족의 언어들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만리장성을 경계로 서로 다른 어족의 언어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만리장성이 군사적인 경계선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경계선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인들은 그들 자신을 북방아시아계의 민족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축조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원의 한족이 만리장성을 넘어 북방아시아 계통의 민족을 복속시킨 적이 있고 또한 북방아시아의 민족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지배한 적이 있지만, 만리장성은 오랫동안 중원의 한족과 북방아시아계 민족들 간의 경계선이 되어 왔다. 오늘날 중국의 영토가 만리장성을 넘어 만주 일대를 전부 포함하고 있음에 틀림없고, 이러한 현실은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28.고구려가 중국의 일개 지방 정권이었다는 주장의 문제점은?
고구려를 고대 중국의 일개 지방 정권에 불과한 소수민족정권이였다고 주장하는 근거 중의 하나는 고구려족이 한족의 한 갈래였다는 점이다. 즉, 고구려 선조가 한족에서 불리되었다는 가설을 제기하거나, 고이족을 중국 전설상의 인물 고양씨의 후예로 설정하여 고구려왕조의 후예임을 주장하고 있다 . 그러나 그것을 주장하는 [일주서]는 문제가 많은 서사이며, 고이족은 BC 10세기경에 등장하는 민족으로 BC 1세기경에 등장하는 고구려와 시기가 맞지 않는다. 고양씨는 전설상의 인물인데, 이 전설상의 인물과 고구려를 연관시키는 것은 과학적인 주앙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의 한족들은 주변의 민족을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란 멸시하면서 한족과 구별하여 왔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서는 부여, 고구려, 동옥저, 예, 마한, 진한, 변한, 왜에 대한 기록을 동이에 속하는 민족으로 묶고 있는데, 이것이 마로 고구려를 중국의 한족과 상당히 거리가 먼 민족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명확한 근거가 된다.
언어인류학적으로 볼 때도 고구려를 건설한 민족은 한족과 상당히 다른 민족임에 틀림없다. 고구려를 건설한 민족은 예족, 맥족, 혹은 예맥족 계열의 사람들임에 틀림없는데, 이들은 한족과 상당한 거리를 군 북방아시아계 민족에 속한다. 고구려를 포함하여 만주와 한반도에는 북방아시아계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 북방아시아계 민족들은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었다, 이들은 만리장성 남쪽의 중국-티베어족의 민족들과는 매우 다른 민족들이었다.
한족이 북방아시아계 민족들을 자국민으로 생각하였다면, 그들과 한족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리장성의 축조는 북방아시아에 중국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또한 북방아시아계 민족들과 한족 사이를 어떤 방식으로든 단절시키려는 한족들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북방아시아계 민족들이 세운 국가들을 모두 중국의 변방 소수민족의 국가라고 표현하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는다.
고구려를 고대 중국의 리개 지방 정권에 불과한 소수민족정권이었다고 주장하는 다른 근거는 고구려의 기원지가 한제국의 영역이었다는 점이다. BC 108년 한제국이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소수 민족들을 지배하기 위해 현도, 낙랑, 임둔, 진번의 한사군을 배치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현도군에 소속된 고구려 현을 지방관리로 하여금 실제적으로 관할하도록 한것도 사실일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라는 국가가 한제국의 영역에 위치하였고 한제국의 통치를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고구려를 중국의 일개 지방정권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제국주의(패권주의)적 발상이다.
29.만주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중국측의 학자들은 고구려와 수, 당나라와의 전쟁을 어떤 식으로 왜곡하여 설명하고 있는가?
만주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중국측의 학자들은 수와 당이 고구려와 전쟁을 치른 것을 국가와 국가간 전쟁이 아닌 중앙정권과 지방정권의 통일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고구려와 중원왕조의 관계는 지방정권과 중앙정권의 관계이기 때문에 수와 당에서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은 침략전쟁이 아닌 중앙에서 지방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통일전쟁이라는 것이다. 중국측 학자들은 수와 당의 황제가 고구려에 보낸 조서를 근거로 양자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으나, 황제의 조서가 정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고려하여야 한다.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은 7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수나라가 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왕조가 멸망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은 지방정권과 중앙정권의 전쟁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와의 관계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구당서]는 당의 고조가 AD622년 고구려 영류왕에게 보내 공문편지에서 ‘이제 두 나라가 서로 화평을 통하게 되었으니’라고 쓰고,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때 잡힌 수나라 군인 포로들을 돌려달라고 요청한 기록을 수록했다. 이 기록은 고구려가 당과 어깨를 나란히 한 당당한 독립국이었다는 의미이다.
30.일부 재야 사학자들의 민족주의 사관이 갖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19세기 말 이루 제국주의 세력이 침략에 따라 민족의 정체성과 단결을 강조하는 주장들이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그리고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10년의 일제강점에 대응하는 반일 감정으로 인하여 이른바 민족주의 사학이 등장하였다. 신채호의 [독사신론]에 의하여 토대가 마련된 민족주의 사학은 근대 사학의 단서을 열어 놓았고, 일본의 황국사관과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그런데 일부 재야 사학자들이 민족주의 사학에 너무 집착하여 역사학을 ‘비과학적인 역사’에 근거한 이데올로기 학문으로 몰고 있다. 일부 재야 사학자들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에 지나치게 매달려 있어서 역사를 너무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우리의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국수주의 성향을 불어넣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혈기왕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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