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서론
II. 본론
1) 세계 제2차 대전 전의 한국과 미국의 관계
① 세계 제2차 대전 전의 교류 상황. - ‘무관심의 정책’
2) 냉전시대의 본격화와 분열된 한국 정부
① 카이로 회담(1943)으로 본 한국에 대한 정책.
②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1945).
③ Truman의 잘못된 판단과 소련의 한반도 개입.
④ 모스크바 3상회의와 한국임시정부와의 관계
⑤ Roosevelt와 Truman의 정책 기조 비교.
⑥ 한국 내 찬탁/반탁과 정치적 분열
⑦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 실패와 UN의 한반도 개입.
⑧ 두 정부의 출범
⑨ 미군정 이후의 한국엘리트 종속화 과정
3) 강대국의 이해논리와 원조정책을 통해 본 한국의 정치․경제적 변화
① 6.25 발발 요인
② 케넌 정책
a. 캐넌이론이란?
b. 기본전제
c. 케넌의 봉쇄이론과 원조
③ 니츠 정책
a. 니츠 정책 대두 배경
b. 「NSC 68」 보고서의 대 한국 정책
c. 「NSC 68」의 미국 경제 성장요인과 관련된 한국전쟁에서의 미군 참전요인
④ 미국의 대 한국 경제부흥계획
a. ECA의 한국경제 부흥계획
b. ECA의 대규모 대한 부흥정책 이유
III. 결론
II. 본론
1) 세계 제2차 대전 전의 한국과 미국의 관계
① 세계 제2차 대전 전의 교류 상황. - ‘무관심의 정책’
2) 냉전시대의 본격화와 분열된 한국 정부
① 카이로 회담(1943)으로 본 한국에 대한 정책.
②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1945).
③ Truman의 잘못된 판단과 소련의 한반도 개입.
④ 모스크바 3상회의와 한국임시정부와의 관계
⑤ Roosevelt와 Truman의 정책 기조 비교.
⑥ 한국 내 찬탁/반탁과 정치적 분열
⑦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 실패와 UN의 한반도 개입.
⑧ 두 정부의 출범
⑨ 미군정 이후의 한국엘리트 종속화 과정
3) 강대국의 이해논리와 원조정책을 통해 본 한국의 정치․경제적 변화
① 6.25 발발 요인
② 케넌 정책
a. 캐넌이론이란?
b. 기본전제
c. 케넌의 봉쇄이론과 원조
③ 니츠 정책
a. 니츠 정책 대두 배경
b. 「NSC 68」 보고서의 대 한국 정책
c. 「NSC 68」의 미국 경제 성장요인과 관련된 한국전쟁에서의 미군 참전요인
④ 미국의 대 한국 경제부흥계획
a. ECA의 한국경제 부흥계획
b. ECA의 대규모 대한 부흥정책 이유
III. 결론
본문내용
다음과 같다.
※ 쌀 생산 : 1948년 약 230만톤에서 1950년 270만톤, 1952년 280만톤
※ 전력생산 : 1948년 5천만 KW에서 1950년 8,200만KW, 1952년 1억 2천만KW로 상정. 이 중 수력발전에 의한 전력 생산은 거의 변동이 없는 가운데, 바지선에 의한 전력 생산을 약 2~ 3배 증가시키고 화력발전을 3배 이상으로 증가 시킬 것으로 예상.
※ 무연탄 생산 : 1948년 7만 5천톤에서 1949 회계연도에 14만톤, 1951회계연도에 23만톤으로 증산할 계획(이에 반해 역청탄 생산량은 줄일 계획).
※ 어업 생산 : 1940년 수준으로 회복. 1952년에 1948년의 2배인 55만톤.
결국 ECA 계획은 한국이 경제부흥을 이룩해 외부의 거대한 원조를 받지 않고도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경제 구조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며, 1949년 하반기부터 1952년 상반기까지 3개년에 걸쳐 실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b. ECA의 대규모 대한 부흥정책 이유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부의 관리들이 이처럼 대한 ECA 원조를 강조한 것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그러한 원조가 없을 경우 한국정부가 외부로부터의 위협보다는 정권 자체의 불안정으로 인해 자체붕괴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트루먼과 국무부 관리들이 공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당시 ECA 원조계획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NSC 8」씨리즈에 제시된 군사경제원조 역시 한국정부의 자체붕괴 가능성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미중앙정보부 역시 "정치안정은 경제안정에 달려있고 정치적 생존은 대부분 미국의 지속적인 보조"에 의존해 있으며, "미국의 원조가 체제를 압박하는 경제군사적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만큼 충분하게 이루어진 다면 공화국의 생존 가능성은 매우높다"고 평가했다.
둘째, 북한의 경제적 발전에 대응하는 성격을 띠는 것이기도 했다. 미국은 1948년 남북한에서 단독정권이 수립된 이후 북한의 경제적 성장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으며, 이에 상응하는 남한의 경제적 성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북한의 경제성장에 많은 제약이 있을 것이라고 분석하면서도 북한 경제가 실질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것 역시 중요한 이데올로기적심리적 요인이었다. 1950년 대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일원으로 활동한 한 이사는 "미국은 한국정부 수립 이후 긍정적인 원조계획을 통한 아시아에서 안정적인 요소 만들고 민주주의의 전시장(a diplay window of democracy)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당시 미국의 대한정책을 설명했다.
셋째, 당시 미국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소한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플랜 그리고 일본 복구계획은 미국의 재정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합동참모본부와 국무부 전략기획참모본부에서 대외원조의 순위를 정하고 조정을 추진한 것도 미국의 이러한 사정과 관련된 것이었다. 게다가 1948년말부터 미국경제가 불황국면을 맞자. 미국은 대외원조의 부담을 줄이는 정책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국무부와 ECA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대한부흥정책 입안자들은 미국의 원조가 처음에는 재정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지만, 한국이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경제를 갖추게 함으로써 머지않은 미래에 한국에 대한 미국의 부담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주아했다.
III. 결론
일제로부터의 해방 및 광복, 그리고 6·25 전쟁까지 경험한 시기의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동등한 위치를 갖는 하나의 국가가 아닌, 자주 독립 능력이 없는 식민지 경험이 있는 국가로 간주해 한국 내의 의견을 존중하는 대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책을 펼쳤다.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신탁통치’를 실시하려 하고, 일본과의 전쟁에서 미국의 잘못된 판단으로 소련이 한반도 내에 진출함으로써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한 분단까지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한반도는 국제연합을 통해 독립을 선포하게 되지만 서로 다른 이념을 목표로 하는 두 국가가 한반도 내에 나타남에 따라 6?25전쟁까지 발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한반도 내의 분단은 지금까지 이어져 결국 계속해서 불안한 분단 상태를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한국의 현대 민주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분단을 통해 단일민족이 살던 한반도를 이질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두 국가가 존재하게 만들었다는 게 가장 큰 영향일 것이다. 게다가 한국엘리트들의 미국에 대한 종속화 과정을 통해 한국을 친미국가로 만들었으며, 한국 내의 미국의 역할 및 위상을 높였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야 되지 말아야 할 것은 단지 이러한 강대국의 식민지관으로 인해 우리가 냉전시대의 피해자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분단되기 이전의 38선은 단지 경계지점에 불과했다는 사실과 우리 위정자들의 냉정한 판단과 서로의 기득권을 잡기 위해서만 급급한 점, 그리고 좌우 합작이 물거품으로 된 것에 반성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 기회였던 좌우 합작마저도 서로의 생각만을 내세우는 한국 위정자들의 부족한 양보와 타협이 한반도에서 반세기가 넘는 비극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지나간 과거에 있어 우리는 반성을 하고 앞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통일 한국이 가야할 방향과 통일을 위한 노력에 있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수동적인 모습만을 보일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민족의 단결로 세계 속의 한국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에 두루 걸친 노력으로 통일 한국에 이바지해야 한다. 현재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는 대륙으로 나아가기 위한 교두보일 뿐만 아니라 태평양으로 향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의 위치에 놓여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이용하여 통일 후의 경제적인 파급 효과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선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강대국이 인정할 만큼의 정치 경제적인 효과가 있는 지역이다. 하루 빨리 통일을 하여 외국인 투자 유치와 아시아의 4龍으로 다시금 발돋움해야 할 것이다.
※ 쌀 생산 : 1948년 약 230만톤에서 1950년 270만톤, 1952년 280만톤
※ 전력생산 : 1948년 5천만 KW에서 1950년 8,200만KW, 1952년 1억 2천만KW로 상정. 이 중 수력발전에 의한 전력 생산은 거의 변동이 없는 가운데, 바지선에 의한 전력 생산을 약 2~ 3배 증가시키고 화력발전을 3배 이상으로 증가 시킬 것으로 예상.
※ 무연탄 생산 : 1948년 7만 5천톤에서 1949 회계연도에 14만톤, 1951회계연도에 23만톤으로 증산할 계획(이에 반해 역청탄 생산량은 줄일 계획).
※ 어업 생산 : 1940년 수준으로 회복. 1952년에 1948년의 2배인 55만톤.
결국 ECA 계획은 한국이 경제부흥을 이룩해 외부의 거대한 원조를 받지 않고도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경제 구조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며, 1949년 하반기부터 1952년 상반기까지 3개년에 걸쳐 실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b. ECA의 대규모 대한 부흥정책 이유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부의 관리들이 이처럼 대한 ECA 원조를 강조한 것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그러한 원조가 없을 경우 한국정부가 외부로부터의 위협보다는 정권 자체의 불안정으로 인해 자체붕괴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트루먼과 국무부 관리들이 공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당시 ECA 원조계획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NSC 8」씨리즈에 제시된 군사경제원조 역시 한국정부의 자체붕괴 가능성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미중앙정보부 역시 "정치안정은 경제안정에 달려있고 정치적 생존은 대부분 미국의 지속적인 보조"에 의존해 있으며, "미국의 원조가 체제를 압박하는 경제군사적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만큼 충분하게 이루어진 다면 공화국의 생존 가능성은 매우높다"고 평가했다.
둘째, 북한의 경제적 발전에 대응하는 성격을 띠는 것이기도 했다. 미국은 1948년 남북한에서 단독정권이 수립된 이후 북한의 경제적 성장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으며, 이에 상응하는 남한의 경제적 성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북한의 경제성장에 많은 제약이 있을 것이라고 분석하면서도 북한 경제가 실질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것 역시 중요한 이데올로기적심리적 요인이었다. 1950년 대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일원으로 활동한 한 이사는 "미국은 한국정부 수립 이후 긍정적인 원조계획을 통한 아시아에서 안정적인 요소 만들고 민주주의의 전시장(a diplay window of democracy)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당시 미국의 대한정책을 설명했다.
셋째, 당시 미국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소한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플랜 그리고 일본 복구계획은 미국의 재정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합동참모본부와 국무부 전략기획참모본부에서 대외원조의 순위를 정하고 조정을 추진한 것도 미국의 이러한 사정과 관련된 것이었다. 게다가 1948년말부터 미국경제가 불황국면을 맞자. 미국은 대외원조의 부담을 줄이는 정책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국무부와 ECA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대한부흥정책 입안자들은 미국의 원조가 처음에는 재정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지만, 한국이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경제를 갖추게 함으로써 머지않은 미래에 한국에 대한 미국의 부담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주아했다.
III. 결론
일제로부터의 해방 및 광복, 그리고 6·25 전쟁까지 경험한 시기의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동등한 위치를 갖는 하나의 국가가 아닌, 자주 독립 능력이 없는 식민지 경험이 있는 국가로 간주해 한국 내의 의견을 존중하는 대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책을 펼쳤다.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신탁통치’를 실시하려 하고, 일본과의 전쟁에서 미국의 잘못된 판단으로 소련이 한반도 내에 진출함으로써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한 분단까지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한반도는 국제연합을 통해 독립을 선포하게 되지만 서로 다른 이념을 목표로 하는 두 국가가 한반도 내에 나타남에 따라 6?25전쟁까지 발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한반도 내의 분단은 지금까지 이어져 결국 계속해서 불안한 분단 상태를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한국의 현대 민주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분단을 통해 단일민족이 살던 한반도를 이질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두 국가가 존재하게 만들었다는 게 가장 큰 영향일 것이다. 게다가 한국엘리트들의 미국에 대한 종속화 과정을 통해 한국을 친미국가로 만들었으며, 한국 내의 미국의 역할 및 위상을 높였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야 되지 말아야 할 것은 단지 이러한 강대국의 식민지관으로 인해 우리가 냉전시대의 피해자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분단되기 이전의 38선은 단지 경계지점에 불과했다는 사실과 우리 위정자들의 냉정한 판단과 서로의 기득권을 잡기 위해서만 급급한 점, 그리고 좌우 합작이 물거품으로 된 것에 반성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 기회였던 좌우 합작마저도 서로의 생각만을 내세우는 한국 위정자들의 부족한 양보와 타협이 한반도에서 반세기가 넘는 비극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지나간 과거에 있어 우리는 반성을 하고 앞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통일 한국이 가야할 방향과 통일을 위한 노력에 있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수동적인 모습만을 보일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민족의 단결로 세계 속의 한국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에 두루 걸친 노력으로 통일 한국에 이바지해야 한다. 현재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는 대륙으로 나아가기 위한 교두보일 뿐만 아니라 태평양으로 향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의 위치에 놓여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이용하여 통일 후의 경제적인 파급 효과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선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강대국이 인정할 만큼의 정치 경제적인 효과가 있는 지역이다. 하루 빨리 통일을 하여 외국인 투자 유치와 아시아의 4龍으로 다시금 발돋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