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유럽, 이전의 농경과 정착의 사회
Ⅱ. 로마와 그 제국의 문화적 통합의 효과와 한계
Ⅲ. 잃어버린 제국과 이룩한 제국 - 기독교와 로마제국
Ⅱ. 로마와 그 제국의 문화적 통합의 효과와 한계
Ⅲ. 잃어버린 제국과 이룩한 제국 - 기독교와 로마제국
본문내용
통치자인 비겔리우스 사트루니누스가 6명의 기독교인들을 심문했다. 여기서 나타난 기독교인들은 황제의 권위를 신성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여 박해를 당했고, 또한 기독교를 보편적인 종교로서 규정했으며 정치적인 국경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리키니우스 황제와 밀라노에서 회견했을 때 발표한 칙령.
밀라노 칙령을 선포했다. 밀라노 칙령에서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과, 그들에게 로마제국에서 번성하고 있는 다른 종교의 신도들처럼 자신들의 종교를 믿을 똑같은 자유를 줄 것을 지시하고 있다. 이 칙령으로 인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함께 평등을 부여받았고 경제적 이득도 얻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이 칙령이 종교적 신념에 의한 것이었는지 정치적 기회주의의 결과였는지에 관한 역사가들의 견해는 일치하지 않지만, 정치적 필요와 기독교화 과정이 사회문화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대세라는 의식이 황제 스스로의 감수성을 고양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는 곧 격렬한 분파투쟁으로 진동하게 되었다. 황제들은 기독교인들의 견해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결국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의 도리를 재확인하기 위해 4세기 초반부에 니케아에서 범로마제국 차원에서 결정된 신조.
니케아 신경을 공포함으로써 막을 내렸는데, 이 신경은 참석자들의 이견을 해소하고 일치를 회복하도록 하는 교본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에 대한 입장으로 인해 엘리트 계층들도 신념이나 지위를 유지하려는 소망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황제들 대부분도 기독교 문화의 틀 안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칙령 이후 1세기도 안되어 기독교의 승리가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1세기 이후 영토 확장으로 인해 로마제국은 제국 바깥으로부터 수입해야만 했던 자연자원과 인력에 경제적으로 점점 더 의존하게 되어 로마경제가 주변 지역의 경제에 자극제가 되었다. 이 시기 동쪽 변방에서는 게르만 부족 집단과 이들보다도 더욱 느슨한 조직을 가진 타키투스시대(55~120경)에 바이크셀강(江) 하류에 정주하던 동(東)게르만계(系)의 부족.
고트족이 있었다. 이들은 다뉴브 강의 로마 국경지역 근처에 정착했고 4세기 말경 중앙아시아의 스텝지대(地帶)에 거주하였던 투르크계(系)의 유목기마민족.
훈족이 유라시아 평원으로부터 침략해 왔을 때 로마제국의 비교적 안정적인 중심권 속으로 깊이 진출했다. 이러한 훈족의 침입으로 서부유럽 민족들도 이동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로마제국은 국경에 대한 외부 압력이 증가하게 되었고 그 사이 제국의 구조적 결함들이 점점 드러나게 되었다. 마침내 로마제국은 병참과 군사적 성격을 고려해 공식적으로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누어 주 황제가 협약하여 다스리게 되었다.
로마 제국은 제국의 마지막 100년 동안 화해정책을 채택하여 그 결과 이방민족들의 유입이 허락되었고, 결국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 북부 및 서부는 비 로마 지역 출신의 장군들에 의해 권력이 통제되다가 마침내 이주민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로마인들의 오만한 체념의 태도는 제국의 종말을 막지 못했고 5세기 말경에 제국 내 라인, 프랑스 독일에 걸쳐 흐르는 라인강의 지류.
모젤, 프랑스 피카르디주(州)를 흐르는 강.
솜, 프랑스 중앙부를 거쳐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강.
루아르 등 여러 강의 유역에 정착한 몇몇 전사단 들은 클로드비히의 영도 아래 통일되어 프랑크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전의 무수한 게르만 전쟁 지도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클로드비히도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자신과 백성들을 로마의 문화와 연계시켰다.
5세기경 유럽의 언어 지도는 완전히 뒤죽박죽이었는데 대부분의 언어는 원시 인도유럽어라 불리는 언어로부터 유래했다. 이 언어 문화적 저수지에서 하나 이상의 부족의 언어는 인도이란어계로 발전했다. 유럽에서 인도유럽어는 기원전 3세기로부터 기원 후 7세기에 아랍어도 대체되기까지 지중해 동부 지역의 공용어였다. 이 같은 복합적인 상황 때문에 소위 라틴어가 로마제국이 붕괴한 후 옛 제국 영역 내의 각지에서 지방적으로 분화하여 변천을 거듭하다가, 중세기에 이르러 다시 탄생과 성장의 길을 밟아 이루어진 근대어(近代語)의 총칭.
로망스 언어가 탄생했다.
4, 5 세기의 로마제국의 지도를 보면, 군사적 국경지대가 대부분 문화적 및 언어적 경계선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며 언어의 성공비결은 첫째가 완력의 힘이고, 포교와 돈이 그 다음인 것처럼 보인다.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리키니우스 황제와 밀라노에서 회견했을 때 발표한 칙령.
밀라노 칙령을 선포했다. 밀라노 칙령에서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과, 그들에게 로마제국에서 번성하고 있는 다른 종교의 신도들처럼 자신들의 종교를 믿을 똑같은 자유를 줄 것을 지시하고 있다. 이 칙령으로 인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함께 평등을 부여받았고 경제적 이득도 얻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이 칙령이 종교적 신념에 의한 것이었는지 정치적 기회주의의 결과였는지에 관한 역사가들의 견해는 일치하지 않지만, 정치적 필요와 기독교화 과정이 사회문화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대세라는 의식이 황제 스스로의 감수성을 고양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는 곧 격렬한 분파투쟁으로 진동하게 되었다. 황제들은 기독교인들의 견해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결국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의 도리를 재확인하기 위해 4세기 초반부에 니케아에서 범로마제국 차원에서 결정된 신조.
니케아 신경을 공포함으로써 막을 내렸는데, 이 신경은 참석자들의 이견을 해소하고 일치를 회복하도록 하는 교본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에 대한 입장으로 인해 엘리트 계층들도 신념이나 지위를 유지하려는 소망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황제들 대부분도 기독교 문화의 틀 안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칙령 이후 1세기도 안되어 기독교의 승리가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1세기 이후 영토 확장으로 인해 로마제국은 제국 바깥으로부터 수입해야만 했던 자연자원과 인력에 경제적으로 점점 더 의존하게 되어 로마경제가 주변 지역의 경제에 자극제가 되었다. 이 시기 동쪽 변방에서는 게르만 부족 집단과 이들보다도 더욱 느슨한 조직을 가진 타키투스시대(55~120경)에 바이크셀강(江) 하류에 정주하던 동(東)게르만계(系)의 부족.
고트족이 있었다. 이들은 다뉴브 강의 로마 국경지역 근처에 정착했고 4세기 말경 중앙아시아의 스텝지대(地帶)에 거주하였던 투르크계(系)의 유목기마민족.
훈족이 유라시아 평원으로부터 침략해 왔을 때 로마제국의 비교적 안정적인 중심권 속으로 깊이 진출했다. 이러한 훈족의 침입으로 서부유럽 민족들도 이동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로마제국은 국경에 대한 외부 압력이 증가하게 되었고 그 사이 제국의 구조적 결함들이 점점 드러나게 되었다. 마침내 로마제국은 병참과 군사적 성격을 고려해 공식적으로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누어 주 황제가 협약하여 다스리게 되었다.
로마 제국은 제국의 마지막 100년 동안 화해정책을 채택하여 그 결과 이방민족들의 유입이 허락되었고, 결국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 북부 및 서부는 비 로마 지역 출신의 장군들에 의해 권력이 통제되다가 마침내 이주민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로마인들의 오만한 체념의 태도는 제국의 종말을 막지 못했고 5세기 말경에 제국 내 라인, 프랑스 독일에 걸쳐 흐르는 라인강의 지류.
모젤, 프랑스 피카르디주(州)를 흐르는 강.
솜, 프랑스 중앙부를 거쳐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강.
루아르 등 여러 강의 유역에 정착한 몇몇 전사단 들은 클로드비히의 영도 아래 통일되어 프랑크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전의 무수한 게르만 전쟁 지도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클로드비히도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자신과 백성들을 로마의 문화와 연계시켰다.
5세기경 유럽의 언어 지도는 완전히 뒤죽박죽이었는데 대부분의 언어는 원시 인도유럽어라 불리는 언어로부터 유래했다. 이 언어 문화적 저수지에서 하나 이상의 부족의 언어는 인도이란어계로 발전했다. 유럽에서 인도유럽어는 기원전 3세기로부터 기원 후 7세기에 아랍어도 대체되기까지 지중해 동부 지역의 공용어였다. 이 같은 복합적인 상황 때문에 소위 라틴어가 로마제국이 붕괴한 후 옛 제국 영역 내의 각지에서 지방적으로 분화하여 변천을 거듭하다가, 중세기에 이르러 다시 탄생과 성장의 길을 밟아 이루어진 근대어(近代語)의 총칭.
로망스 언어가 탄생했다.
4, 5 세기의 로마제국의 지도를 보면, 군사적 국경지대가 대부분 문화적 및 언어적 경계선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며 언어의 성공비결은 첫째가 완력의 힘이고, 포교와 돈이 그 다음인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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