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월터 브루거만의 『성서로 본 땅』
제1장 약속으로서의 땅, 문젯거리로서의 땅
제2장 “내가 너에게 그 땅을 보여 주리라”
제3장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제4장 약속의 땅 앞에서
제5장 “네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
제6장 “네가 나를 잊었기 때문에”
제7장 땅 상실에로 나아감, 그리고 그 후
제8정 “위로할 자가 없도다”
제9장 예루살렘을 위한 열심
제10장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젠11장 결론 : 해석학적인 성찰들
결론
제1장 약속으로서의 땅, 문젯거리로서의 땅
제2장 “내가 너에게 그 땅을 보여 주리라”
제3장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제4장 약속의 땅 앞에서
제5장 “네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
제6장 “네가 나를 잊었기 때문에”
제7장 땅 상실에로 나아감, 그리고 그 후
제8정 “위로할 자가 없도다”
제9장 예루살렘을 위한 열심
제10장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젠11장 결론 : 해석학적인 성찰들
결론
본문내용
나님께 굴복하고 그를 신뢰하는 데에 있다. 이스라엘이 하지 못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제7장 땅 상실에로 나아감, 그리고 그 후
예언자들이 하는 일은 왕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분별하고 왕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밝히는 데에 있다. 그들의 기대 영역과 그들의 엄격함 및 정직성은 제왕억인 가능성들을 뛰어넘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왕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고 왕들이 결코 관용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들을 말한다.
1. 예레미야와 땅 상실의 두려움
예레미야는 다른 누구보다도 두려움을 몸으로 보여 주고 있는 사람이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 영원한 효력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던 약속의 파기 및 영원히 보장되던 것들의 붕괴 등이 그의 삶 안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는 자기들이 궁극적으로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이스라엘에게 궁극적인 땅 상실이 임박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어머니로서의 이스라엘-땅에 있는 이스라엘-은 기쁨의 잔치를 가져야 하지만 자녀로서의 이스라엘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예레미야의 소명 속에는 땅에 안연하게 거하는 자들을 멸시하는 하나님의 활동의 시작이 나타나고 있다.
상실되는 땅에 대한 개념과 회복될 땅에 대한 개념 사이에 있는 이러한 갈등은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답변은 단호하고 엄중한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야웨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깊은 번민, 곧 소중한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번민을 자신의 시 속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반면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사로잡힘으로 끝날 그들의 역사를 알게 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그의 말은 그의 백성에게 닥칠 충격적인 미래를 선포한다.
더 나아가 에레미야는 자신이 땅 상실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정념, 곧 야웨의 정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아마도 땅 상실이나 정념 상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신앙의 내적인 특성에 있을 것이다.
땅 상실은 곧 역사의 종말을 뜻한다. 그래서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땅을 빼앗길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야웨께서 그 일을 하시리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의 핵심은 야웨께서 땅에 거하는 이스라엘을 끝장내기로 작정하셨다는 선언에 있다.
2. 땅 상실을 초래한 왕들
땅의 상실은 모든 공공 제도들, 행복과 일체에 관함 모든 상징적인 표현들의 붕괴를 뜻한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여호야김(살롬)과 요시야는 땅을 잃는 왕들이나 땅을 보존하는 왕들의 모델에 해당한다.
3. 포로기와 새 역사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미묘하면서도 변증법적이다. 물론 그는 땅 상실을 슬퍼한다. 그는 땅에 거하던 이스라엘의 해체에 대해서 하나님 자신의 정념을 느낀다. 그는 파멸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것으로부터 움츠린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단순한 땅 상실의 선포가 아니라 그것은 땅 상실이 새로운 땅에 이르기 위한 신앙의 길임을 선언하는 것으로서 땅 상실을 기이한 방법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즉, 야웨께서 땅 상실을 의도하셨을 때 땅에 집착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반역의 행위이다.
마침내 이스라엘의 역사는 땅 상실로 끝장이 났다. 땅을 상실한 자들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역사를 가지기 위해서는 땅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은 땅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모든 것이 끝장난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땅 상실을 야웨의 최종적인 뜻으로 보는 모든 주장을 배격한다. 포로민들은 과거의 유랑민들과 마찬가지고, 이러한 희망을 가진 채로, 그리고 역사에 관한 모든 합리적인 가정들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계획을 염두에 두고서 살아간다. 그들은 마지막의 것들과 기다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역사가 새로 시작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질 새 역사, 곧 땅 잃은 채로 내쫓긴 자들과 함께 시작될 새 역사를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 역사가 어떻게 되어갈 것인지를 보는 것은 그의 선한 말씀(수 23:14~16)을 기다리는 신앙을 뜻한다.
어느 누구도 예레미야만큼 이스라엘로 하여금 철저한 땅 상실의 과정을 거쳐 가게 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스라엘을 포로 상황에로 이끄시고 포로민들 사이에서 자신의 특별한 새 역사를 이루려고 작정하시는 야웨의 측량키 어려운 뜻을 통찰한 예언자인 것이다.
제8정 “위로할 자가 없도다”
두 번째 역사의 마지막에 발생한 위기는 연속성가 불연속성에 관련되어 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연속성들을 고수하기를 원하고 옛 형태들이 확실하게 연속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587년의 재난과 예언자들의 통찰은 불연속성에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표상에 있어서의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성서 신앙 전체를 두고 볼 때 이 순간은 분명하고 명확한 불연속성에 관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번째 역사는 끝나가는 역사의 ‘잔인성’과 다시금 시작하는 역사의 ‘의외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것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반성을 담고 있다.
1. 애가와 하나님의 ‘아니오’
애가의 시보다 더 분명하게 급격한 불연속성을 표현하고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운명 전환은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여겨지던 것의 종말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집을 갖지 못한 채로 버림받은 과부, 그리고 갑작스럽게 모든 것을 잃고서 도움을 호소할 데를 어느 곳에도 갖지 못한 과부로 묘사된다. 그래서 이 시는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땅 상실, 고향 상실, 버림받음 등의 상태를 가장 실감나게 묘하사고 있다.
애가의 시에서 이스라엘은 파괴된 성읍 예루살렘이 그들의 고향임을 배운다. 그것은 그들이 어디에 뿌리박고서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로 하여금 고향 땅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이 약속의 언어에 있다는 것도 배운다.
2. “너희 앞길을 회복시켜 주리라”
포로기로부터 땅에 이르기까지의 새 역사는 희망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땅으로부터 추방된 후로 수 년 동안 새 역사에 관해 논하려는 많은 새로운 작품들이
제7장 땅 상실에로 나아감, 그리고 그 후
예언자들이 하는 일은 왕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분별하고 왕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밝히는 데에 있다. 그들의 기대 영역과 그들의 엄격함 및 정직성은 제왕억인 가능성들을 뛰어넘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왕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고 왕들이 결코 관용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들을 말한다.
1. 예레미야와 땅 상실의 두려움
예레미야는 다른 누구보다도 두려움을 몸으로 보여 주고 있는 사람이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 영원한 효력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던 약속의 파기 및 영원히 보장되던 것들의 붕괴 등이 그의 삶 안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는 자기들이 궁극적으로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이스라엘에게 궁극적인 땅 상실이 임박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어머니로서의 이스라엘-땅에 있는 이스라엘-은 기쁨의 잔치를 가져야 하지만 자녀로서의 이스라엘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예레미야의 소명 속에는 땅에 안연하게 거하는 자들을 멸시하는 하나님의 활동의 시작이 나타나고 있다.
상실되는 땅에 대한 개념과 회복될 땅에 대한 개념 사이에 있는 이러한 갈등은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답변은 단호하고 엄중한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야웨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깊은 번민, 곧 소중한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번민을 자신의 시 속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반면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사로잡힘으로 끝날 그들의 역사를 알게 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그의 말은 그의 백성에게 닥칠 충격적인 미래를 선포한다.
더 나아가 에레미야는 자신이 땅 상실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정념, 곧 야웨의 정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아마도 땅 상실이나 정념 상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신앙의 내적인 특성에 있을 것이다.
땅 상실은 곧 역사의 종말을 뜻한다. 그래서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땅을 빼앗길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야웨께서 그 일을 하시리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의 핵심은 야웨께서 땅에 거하는 이스라엘을 끝장내기로 작정하셨다는 선언에 있다.
2. 땅 상실을 초래한 왕들
땅의 상실은 모든 공공 제도들, 행복과 일체에 관함 모든 상징적인 표현들의 붕괴를 뜻한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여호야김(살롬)과 요시야는 땅을 잃는 왕들이나 땅을 보존하는 왕들의 모델에 해당한다.
3. 포로기와 새 역사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미묘하면서도 변증법적이다. 물론 그는 땅 상실을 슬퍼한다. 그는 땅에 거하던 이스라엘의 해체에 대해서 하나님 자신의 정념을 느낀다. 그는 파멸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것으로부터 움츠린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단순한 땅 상실의 선포가 아니라 그것은 땅 상실이 새로운 땅에 이르기 위한 신앙의 길임을 선언하는 것으로서 땅 상실을 기이한 방법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즉, 야웨께서 땅 상실을 의도하셨을 때 땅에 집착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반역의 행위이다.
마침내 이스라엘의 역사는 땅 상실로 끝장이 났다. 땅을 상실한 자들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역사를 가지기 위해서는 땅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은 땅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모든 것이 끝장난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땅 상실을 야웨의 최종적인 뜻으로 보는 모든 주장을 배격한다. 포로민들은 과거의 유랑민들과 마찬가지고, 이러한 희망을 가진 채로, 그리고 역사에 관한 모든 합리적인 가정들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계획을 염두에 두고서 살아간다. 그들은 마지막의 것들과 기다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역사가 새로 시작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질 새 역사, 곧 땅 잃은 채로 내쫓긴 자들과 함께 시작될 새 역사를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 역사가 어떻게 되어갈 것인지를 보는 것은 그의 선한 말씀(수 23:14~16)을 기다리는 신앙을 뜻한다.
어느 누구도 예레미야만큼 이스라엘로 하여금 철저한 땅 상실의 과정을 거쳐 가게 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스라엘을 포로 상황에로 이끄시고 포로민들 사이에서 자신의 특별한 새 역사를 이루려고 작정하시는 야웨의 측량키 어려운 뜻을 통찰한 예언자인 것이다.
제8정 “위로할 자가 없도다”
두 번째 역사의 마지막에 발생한 위기는 연속성가 불연속성에 관련되어 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연속성들을 고수하기를 원하고 옛 형태들이 확실하게 연속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587년의 재난과 예언자들의 통찰은 불연속성에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표상에 있어서의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성서 신앙 전체를 두고 볼 때 이 순간은 분명하고 명확한 불연속성에 관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번째 역사는 끝나가는 역사의 ‘잔인성’과 다시금 시작하는 역사의 ‘의외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것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반성을 담고 있다.
1. 애가와 하나님의 ‘아니오’
애가의 시보다 더 분명하게 급격한 불연속성을 표현하고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운명 전환은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여겨지던 것의 종말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집을 갖지 못한 채로 버림받은 과부, 그리고 갑작스럽게 모든 것을 잃고서 도움을 호소할 데를 어느 곳에도 갖지 못한 과부로 묘사된다. 그래서 이 시는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땅 상실, 고향 상실, 버림받음 등의 상태를 가장 실감나게 묘하사고 있다.
애가의 시에서 이스라엘은 파괴된 성읍 예루살렘이 그들의 고향임을 배운다. 그것은 그들이 어디에 뿌리박고서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로 하여금 고향 땅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이 약속의 언어에 있다는 것도 배운다.
2. “너희 앞길을 회복시켜 주리라”
포로기로부터 땅에 이르기까지의 새 역사는 희망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땅으로부터 추방된 후로 수 년 동안 새 역사에 관해 논하려는 많은 새로운 작품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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