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신조과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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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니케아신조과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의 비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1. 니케아 신조의 배경 - 아리우스 논쟁의 발발과 니케아 회의; A.D. 318-325.
1.1. 아리우스 논쟁의 발단
1.1.1. 속사도에서 오리겐까지
1.1.2. 아리우스 논쟁의 발발과 전개
1.2. 니케아 회의
2. 니케아 신조 및 분석
2.1. 니케아 신조
2.2. 니케아 신조 분석
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경
3.1.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의 응전과 이들의 우세 시기인 콘스탄틴 황제의 사망시까지; A.D. 325-361.
3.2. 정통 기독교의 최종 승리와 니케아 신경이 완성된 콘스탄티노플 회의시까지; A.D. 361-381.
3.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4. 니케아 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비교

결론

본문내용

시우스가 수도에 대한 이집트의 곡물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는 말로 황제를 설득했다. 이것은 반역죄에 해당했으며, 그 말을 조사해 보지도 않고 콘스탄틴은 아다나시우스를 독일의 트리어로 귀양보냈다. 바로 이것이 아다나시우스의 생애에서 일어난 첫 번째 귀양이었다.
유세비우스가 거둔 마지막 승리는 또 다른 반(反)오리겐주의자인 안키라의 마르셀루스를 폐위하고 귀양보내는 일이었다. Gonzalez, 기독교 사상사, 328쪽.
그는 아리우스에 대해 아주 공격적이며 확고한 입장을 취했던 동방 감독이었으나 단일신론적 경향을 분명하게 지님으로써 쉽게 정죄받고 말았다.
이상 요약하면, 330년부터 7년 후 콘스탄틴이 죽는 때까지 니케아 회의의 옹호자들은 빈번히 패했다. Ibid., 328쪽.
황제의 주된 관심은 신학적인 면보다는 정치적인 데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을 잘 활용한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정치적 수완의 덕분으로 아리우스주의는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니케아의 옹호자들 가운데는 그들의 이론이 사벨리우스주의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어려웠다. 니케아파의 패배는 콘스탄틴 자신이 임종시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손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콘스탄틴 황제 사후에 로마제국은 콘스탄틴의 세 아들에 의해 삼분되었다. 맏아들 콘스탄틴 2세(Constantine II)는 주로 영국, 갈리아, 스페인 등 서방을,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는 주로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등 동방을, 셋째 아들인 콘스탄스(Constans)는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제국의 중앙부를 차지했다. 박용규, 상게서, 352쪽.
콘스탄틴 2세와 콘스탄스는 서방의 입장을 따라 아다나시우스를 지지했다. 콘스탄스는 338년에 아다나시우스를 다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 복귀시켰다. 339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아다나시우스의 주도로 약 백여명의 감독들이 모여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였다. 피영민, 상게서, 157쪽.
340년 장자 콘스탄틴 2세가 막내 동생 콘스탄스에 대한 주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기습을 당하여 전사하자 콘스탄스가 서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제국은 이제 서방의 콘스탄스와 동방의 콘스탄티우스로 양분되었다. 동방의 통치자가 된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를 지지했고, 서방의 통치자 콘스탄스는 니케아 신조를 옹호했다. 콘스탄티우스가 동방의 통치자가 되자 아다나시우스는 두 번째로 추방되어 로마로 피신하게 되었다(339년 혹은 340년). Ibid., 157쪽.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재기를 노리는 아다나시우스, 마르셀루스 그리고 다른 감독들은 유배지에서 귀환의 기회를 노렸고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황제의 신임을 등에 업고 세력 구축에 나섰다. 그런데 이즈음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 등 동방교회 지도자들이 폐위한 바 있는 감독들의 지위를 둘러싸고 일련의 논쟁이 일었다. Walker, 상게서, 159쪽.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자들을 복직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고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는 자기들을 정죄한 자들이 이단들이었으므로 그 결정이 무효라는 입장을 취했다. 박용규, 상게서, 353쪽.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는 로마 감독 율리우스(Julius)에게 동정을 호소했고, 율리우스는 340년 교회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교회회의는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에 대한 페위조치의 부당함을 공포하였다.
자기들이 요청한 교회회의에 참석을 거부당한 동방교회 지도자들, 특히 동방에서 세력을 장악한 반(半)아리우스파는 341년에 안디옥에 모여 회의를 개최했다. 피영민, 상게서, 157쪽.
97명의 감독들은 모여서 네 개의 신조를 발표했는데, 극단적인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면서도 니케아 신조의 핵심 단어인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를 회피하였다. 안디옥 회의는 니케아 신조에 대해서 공식적인 교리적 반발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회의였다.
반(半)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간의 대립이 심화되자 콘스탄티우스와 콘스탄스 형제는 지루한 논쟁을 해결해 보고자 343년에 현재의 소피아에 해당하는 사르디카(Sardica)에서 동서방을 다 포함한 대규모 종교회의를 개최했다. Schaff, Ibid., 634.
서방의 감독들이 주종을 이룬 이 회의는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였고, 동방측은 아다나시우스의 감독 복직, 서방측은 마르셀루스에 대한 후원 중단이라는 화해안에 합의하였다. 박용규, 상게서, 353쪽.
그러나 일부 동방의 감독들이 사르디카 회의에 폐위된 감독 아다나시우스가 참석한 데 반발하여 사르디카 근처에 있는 빌립보폴리스(Philippopolis)에서 별도의 회의를 개최하고 안디옥 회의의 결과를 재확인할 뿐만 아니라 니케아 신조를 선언한 감독들에게 강한 분개심을 표현하였다. Schaff, Ibid., p. 635. 피영민, 상게서, 157쪽.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콘스탄스의 압력에 의해서 346년에 아다나시우스를 다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직에 복귀시켰다. 그러나 350년에 서방 황제 콘스탄스는 왕위찬탈자 마그넨티우스(Magnentius)의 지지자들에 의해 살해당했고, 콘스탄티우스는 반란을 진압하고 동서방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353년부터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한 361년까지 8년 동안은 니케아파의 철저한 패배기였다. 콘스탄티우스는 열렬한 아리우스 지지자인 무르사의 감독 발렌스(Valens)를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이어 황제 고문에 위촉했다. 콘스탄티우스가 취한 첫 버째 조치는 아다나시우스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351년 시르미움(Sirmium) 회의, 353년 알레스(Arles) 회의, 355년에 밀라노(Milan) 회의 등의 일련의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그는 감독들에게 아다나시우스를 포기하고 동방 교회들과 충분한 교제를 재개하도록 강요하였으며, 니케아파 감독들을 폐위 혹은 추방시키고 반아리우스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Schaff, Ibid., 635. 박용규, 상게서, 353-354쪽.
아다나시우스도 356년에 다시 감독직에서 추방되었는데, 이것이 세 번째 추방이었다. 그는 감독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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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24
  • 저작시기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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