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종묘의 역사
2. 종묘의 구석구석
① 외대문 (정문)
② 망묘루
③ 공민왕신당
④ 향대청
⑤ 어숙실
⑥ 공신당
⑦ 칠사당
⑧ 정전
⑨ 정전수복방
⑩ 전사청
⑪ 제정
⑫ 영녕전
⑬ 정전 악공청
⑭ 영녕전 악공청
⑮ 창경궁 연결문
3.결론.
2. 종묘의 구석구석
① 외대문 (정문)
② 망묘루
③ 공민왕신당
④ 향대청
⑤ 어숙실
⑥ 공신당
⑦ 칠사당
⑧ 정전
⑨ 정전수복방
⑩ 전사청
⑪ 제정
⑫ 영녕전
⑬ 정전 악공청
⑭ 영녕전 악공청
⑮ 창경궁 연결문
3.결론.
본문내용
왕조를 건국한 태조는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궁궐(창경궁)의 동쪽에 종묘를 건립하고 서쪽에 사직단을 세웠다. 현재의 종묘는 정전과 영녕전으로 되어 있는데, 종묘는 원래 정전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정전 건물은 태조 3년(1394)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되었고, 영녕전은 세종3년(1421)에 완공되었다. 정전과 영녕전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광해군 즉위년(1608)에 재건 되었으며, 그 후 몇차례의 증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사적 제125호인 종묘는 뛰어난 건축적 가치와 600년이 넘도록 이어져 온 제례 행사 등의 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2001년에는 종묘제례 및 제례악이 국내 최초로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록되었다.
종묘의 구석구석 살펴보기
① 외대문 (정문)
② 망묘루
③ 공민왕신당
④ 향대청
⑤ 어숙실
⑥ 공신당
⑦ 칠사당
⑧ 정전
⑨ 정전수복방
⑩ 전사청
⑪ 제정
⑫ 영녕전
⑬ 정전 악공청
⑭ 영녕전 악공청
⑮ 창경궁 연결문
① 외대문 (정문) - ☆☆☆
종묘는 왕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서, 임진왜란시 모두 불에 타 없어졌지만 왜란이 끝나자 마자 궁궐보다 먼저 복원한 사실로 보아 그만큼 신성시 했던 공간이었음을 알수가 있다.
외대문 앞에 서 있는
왼쪽의 비를 보아도 그 당시의 종묘가 어느만큼
신성한 곳이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대소인원 하마비” 이 말의 뜻은...
‘계급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모두 가마와 말에서 내려라’
라는 뜻으로서 그 당시 사람들은 종묘를 지날 때
모두 말과 가마에서 내려 종묘의 신들께
인사를 하고 지나갔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위의 사진이 외대문의 모습이며, 남쪽에 사묘의 표문답게 정면 세 칸의 평삼문으로 되었고, 정문 좌우로는 종묘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종묘 정문은 외대문 또는 외삼문이라고도 한다. 정문은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 형태가 아주 검박하고 단순하다.
외대문에서 종묘를 바라보면 건물이 남향임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양지바르고 이슬이 스미지 않는 풍수지리상 적합한 위치라 할 수가 있다. 또한 건물 뒤로 자리 잡고 있는 비봉을 관찰 할 수가 있는데, 이는 자연경관과의 조화와 풍수지리적 사상을 중시한 우리나라 건축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② 망 묘 루
왕이 제향시 이곳에 들러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나라와 백성을 돌보고자
마음을 가다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을 가진 건물이다.
③ 공민왕신당 - ☆☆☆
조선태조가 종묘를 지을 때 공민왕의
업적을 기리고 제사 지내기 위해
지은 곳으로 전해 진다.
신당에는 공민왕과 노곡공주를 함께 그린
영정과 준마도가 모셔져 있다.
공민왕의 신당과 관련한 일화도 전해 지는데, 태조가 종묘를 건설할 때 하늘에서 공민왕과 노곡공주의 초상화가 날아와 태조 앞에 떨어져서 그를 신기하게 여기어 신당에 공민왕의 초상화를 모시게 되었다는 일화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화일 뿐이고, 공민왕의 신당은 몇가지 시사점을 가진다. 일단 공민왕의 초상화는 고려시대 왕의 초상화로는 유일하게 현존한다. 그 이유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성계가 섬기던 황제였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싶다. 또한 조선 건국시 백성들의 친 고려사상을 엿볼수가 있는데, 고려는 적과 아군의 구분이 없는 포용정책을 썼으나 조선의 이성계는 말 그대로 폭군이었다. 자신의 길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쓸어버렸고, 폭압적 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아마도 조선의 건국을 그다지 반기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 때문에 공민왕의 신당을 만들어 백성들의 마음을 사려 한 것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④ 향 대 청
향대청은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폐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왼쪽의 사진은 향대청 내부모습이다.
앞쪽에 전석이 깔려있는길은 향로로서,
종묘제례때 향과 축문을 모시는 길이다.
⑤ 어 숙 실 - ☆☆☆
어숙실은 왕이 제례를 올리기 전에 목욕재계 하고 제례를 준비하던 곳이다.
이로써, 조선시대 제사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제사를 지내기 하루 전 왕이 종묘에 와서
우물물로 목욕을 하고 어숙실에서
신과의 교감(기도)를 한 후
제사에 임했던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워낙 제사가 많아 모든 제사를
왕이 전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하가 제사를 대신 하는 ‘섭행’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위의 그림을 보면 어숙실 건물 앞에 쇠로된 넓적한 큰 독이 관찰 되는데, 이는 ‘드므’라 하며 이는 당시 궁궐이 대부분 목재 건물이었기 때문에 화재가 빈번 하였고, 이를 예방하기 위하여 놓아 둔 것이다. 당시에는 화마의 침입으로 인해 화재가 생긴다 믿었기 때문에, 화마가 침입해 오다가 ‘드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라 달아나길 바랬던 것이다.
또 한가지 특징으로서, 어숙실로 들어가는 길을 보게 되면, 검정색 돌길이 3군데로 구분되어 있음을 관찰 할 수가 있다. 이는 가운데의 돌길은 신주가 지나가는 죽은 사람의 길이고, 왼쪽은 주군의 길, 오른쪽은 신하나 왕세자의 길로써 중간의 길이 살짝 높게 튀어나와 있어 인간은 그 길로 다닐수가 없었다. 신적인 존재를 신성시 했던 당시의 사상을 또 한번 엿볼수가 있는 부분이다.
종묘를 답사하다 보면, 거의 모든 길이 이런식으로 3가지 길로 구분되어 있음을 관찰 할 수가 있고 또한 종묘에는 직각의 코너가 없음을 발견 할 수가 있다. 이는 신주를 실은 가마나 또는 그 외의 어떤 기구가 편히 지나갈수 있도록 배려 했음을 시사한다.
⑥ 공 신 당
임금이 살아계실 때 공로가 큰
신하들의 신위판을 모신곳이다.
공신당에는 종묘(정전)의 신실에
모셔져 있는 태조의 공신을 비롯하여
제일 마지막 칸에 모셔져 있는
27대 임금인 순종의 공신까지
정전에 모셔져 있는 역대 왕들의
공신들 위판83위를 모시고 있다.
영녕전에 모셔져 있는 역대 왕들의 배향공신들 위판은 모셔져 있지 않다.
공신당의 위판도 자신의 왕을
정전 건물은 태조 3년(1394)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되었고, 영녕전은 세종3년(1421)에 완공되었다. 정전과 영녕전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광해군 즉위년(1608)에 재건 되었으며, 그 후 몇차례의 증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사적 제125호인 종묘는 뛰어난 건축적 가치와 600년이 넘도록 이어져 온 제례 행사 등의 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2001년에는 종묘제례 및 제례악이 국내 최초로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록되었다.
종묘의 구석구석 살펴보기
① 외대문 (정문)
② 망묘루
③ 공민왕신당
④ 향대청
⑤ 어숙실
⑥ 공신당
⑦ 칠사당
⑧ 정전
⑨ 정전수복방
⑩ 전사청
⑪ 제정
⑫ 영녕전
⑬ 정전 악공청
⑭ 영녕전 악공청
⑮ 창경궁 연결문
① 외대문 (정문) - ☆☆☆
종묘는 왕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서, 임진왜란시 모두 불에 타 없어졌지만 왜란이 끝나자 마자 궁궐보다 먼저 복원한 사실로 보아 그만큼 신성시 했던 공간이었음을 알수가 있다.
외대문 앞에 서 있는
왼쪽의 비를 보아도 그 당시의 종묘가 어느만큼
신성한 곳이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대소인원 하마비” 이 말의 뜻은...
‘계급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모두 가마와 말에서 내려라’
라는 뜻으로서 그 당시 사람들은 종묘를 지날 때
모두 말과 가마에서 내려 종묘의 신들께
인사를 하고 지나갔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위의 사진이 외대문의 모습이며, 남쪽에 사묘의 표문답게 정면 세 칸의 평삼문으로 되었고, 정문 좌우로는 종묘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종묘 정문은 외대문 또는 외삼문이라고도 한다. 정문은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 형태가 아주 검박하고 단순하다.
외대문에서 종묘를 바라보면 건물이 남향임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양지바르고 이슬이 스미지 않는 풍수지리상 적합한 위치라 할 수가 있다. 또한 건물 뒤로 자리 잡고 있는 비봉을 관찰 할 수가 있는데, 이는 자연경관과의 조화와 풍수지리적 사상을 중시한 우리나라 건축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② 망 묘 루
왕이 제향시 이곳에 들러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나라와 백성을 돌보고자
마음을 가다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을 가진 건물이다.
③ 공민왕신당 - ☆☆☆
조선태조가 종묘를 지을 때 공민왕의
업적을 기리고 제사 지내기 위해
지은 곳으로 전해 진다.
신당에는 공민왕과 노곡공주를 함께 그린
영정과 준마도가 모셔져 있다.
공민왕의 신당과 관련한 일화도 전해 지는데, 태조가 종묘를 건설할 때 하늘에서 공민왕과 노곡공주의 초상화가 날아와 태조 앞에 떨어져서 그를 신기하게 여기어 신당에 공민왕의 초상화를 모시게 되었다는 일화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화일 뿐이고, 공민왕의 신당은 몇가지 시사점을 가진다. 일단 공민왕의 초상화는 고려시대 왕의 초상화로는 유일하게 현존한다. 그 이유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성계가 섬기던 황제였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싶다. 또한 조선 건국시 백성들의 친 고려사상을 엿볼수가 있는데, 고려는 적과 아군의 구분이 없는 포용정책을 썼으나 조선의 이성계는 말 그대로 폭군이었다. 자신의 길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쓸어버렸고, 폭압적 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아마도 조선의 건국을 그다지 반기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 때문에 공민왕의 신당을 만들어 백성들의 마음을 사려 한 것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④ 향 대 청
향대청은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폐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왼쪽의 사진은 향대청 내부모습이다.
앞쪽에 전석이 깔려있는길은 향로로서,
종묘제례때 향과 축문을 모시는 길이다.
⑤ 어 숙 실 - ☆☆☆
어숙실은 왕이 제례를 올리기 전에 목욕재계 하고 제례를 준비하던 곳이다.
이로써, 조선시대 제사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제사를 지내기 하루 전 왕이 종묘에 와서
우물물로 목욕을 하고 어숙실에서
신과의 교감(기도)를 한 후
제사에 임했던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워낙 제사가 많아 모든 제사를
왕이 전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하가 제사를 대신 하는 ‘섭행’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위의 그림을 보면 어숙실 건물 앞에 쇠로된 넓적한 큰 독이 관찰 되는데, 이는 ‘드므’라 하며 이는 당시 궁궐이 대부분 목재 건물이었기 때문에 화재가 빈번 하였고, 이를 예방하기 위하여 놓아 둔 것이다. 당시에는 화마의 침입으로 인해 화재가 생긴다 믿었기 때문에, 화마가 침입해 오다가 ‘드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라 달아나길 바랬던 것이다.
또 한가지 특징으로서, 어숙실로 들어가는 길을 보게 되면, 검정색 돌길이 3군데로 구분되어 있음을 관찰 할 수가 있다. 이는 가운데의 돌길은 신주가 지나가는 죽은 사람의 길이고, 왼쪽은 주군의 길, 오른쪽은 신하나 왕세자의 길로써 중간의 길이 살짝 높게 튀어나와 있어 인간은 그 길로 다닐수가 없었다. 신적인 존재를 신성시 했던 당시의 사상을 또 한번 엿볼수가 있는 부분이다.
종묘를 답사하다 보면, 거의 모든 길이 이런식으로 3가지 길로 구분되어 있음을 관찰 할 수가 있고 또한 종묘에는 직각의 코너가 없음을 발견 할 수가 있다. 이는 신주를 실은 가마나 또는 그 외의 어떤 기구가 편히 지나갈수 있도록 배려 했음을 시사한다.
⑥ 공 신 당
임금이 살아계실 때 공로가 큰
신하들의 신위판을 모신곳이다.
공신당에는 종묘(정전)의 신실에
모셔져 있는 태조의 공신을 비롯하여
제일 마지막 칸에 모셔져 있는
27대 임금인 순종의 공신까지
정전에 모셔져 있는 역대 왕들의
공신들 위판83위를 모시고 있다.
영녕전에 모셔져 있는 역대 왕들의 배향공신들 위판은 모셔져 있지 않다.
공신당의 위판도 자신의 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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