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의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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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만해 한용운의 일대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역사 앞에서
2.  지견(知見)을 세우다.
3.  불교인으로의 지향
4.  3 1운동의 선봉에 서서
5.  침묵의 미학
6.  설 중 매 화
7.  심우장의 정절

본문내용

무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비장한 각오로 다시 백담사로 들어간 스님은 그 유명한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 1913년 5월 25일 불교서관에서 발행한다. 이 유신론에서 유신운동의 기본적인 목표와 방향이 정신문화의 혁명에 있다고 주창한 그는, 불교인이건 아니건 인간에게는 누구나 정신의 유신을 하여야 하며, 그 길만이 조선이 살아갈 수 있는 길임을 강조했다. 스님은 온 정열을 바쳐 중생구제를 위한 승려교육문제, 포교문제, 경전의 해석 등을 유신론을 통해 불교개혁의 의지를 천명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당시 불교계의 풍토를 좀먹고 있는 비종교적, 비사회적, 비합리적, 토속적, 미신적인 요소와 인습을 타파하고 혁신해서 불교계도 시대적 변화에 부응한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다른 한편으로는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순수한 신앙에 바탕을 둔 윤리관을 확립하여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재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역사적 사회적인 요청에 부응할 대중불교 실현의 사면감을 고취, 촉구하였다.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아들이다.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이다. 천하에 어머니 없는 아들이 없다는 말은 하되 파괴 없는 유신이 없다는 것은 간혹 알지 못한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한 유신론은 당시 조선불교의 난후성과 은둔성을 대담하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제1장에서 제4장까지는 유신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제5장부터 제16장까지는 당시의 조선불교가 직접 부딪치고 있고 또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구체적 문제들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다. 이 논설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첫째 문명의 진보론, 둘째 자유주의와 평등주의, 셋째 불교를 현실과의 적극적 관계 속에서 해석하려는 점으로 요약된다.그리고 승려교육에 대한 체험 이론과 확고한 방법론을 피력했다.그런데 《조선불교유신론》은 한문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한문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들은 읽기가 힘들었다. 스님은 다시 불경 대중화를 위한 작업으로 양산 통도사에서 그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모두 열람하여 《불교대전 佛敎大典》을 편찬하였다. 《불교대전》은 재래식 장경 위주의 편찬방법에서 벗어나 주제별로 엮어진 최초의 책이다. 여기서도 불교 근대화 작업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 대전은 1914년 4월 30일 범어사에서 찬술, 발행되었다.이같은 저술활동을 통하여 그는 포교면에서는  ㄹ렬한 실천론을 주장하였고, 교리면에서는 선(禪), 교(敎) 일치를 제창했다. 만지풍설 같은 일제 치하의 암흑시대에 스님은 그 많은 일을 하셨던 것이다. 그 속에서 스님은 역사 현실을 외면한 불교, 시대정신이 없는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단호히 얘기했다. 그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중생과 함께 하며 보살정신으로서 불교의 이상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실천한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설악산 오세암에서 피나는 선정삼매에 몰입했다. 설악의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다가 자신의 깊은 세계를 관조하면서 그는 \'구름이 흐르거니 누군 나그네 아니며, 국화 이미 피었는데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화두를 들기도 했다. 1917년 12월 3일 밤 10시경 좌선중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무슨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심하던 마음이 씻은 듯 풀렸다. 그래서 오도송을 남겼다.男兒到處是故鄕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幾人長在客愁中그 몇 사람 객수 속에 길이 갇혔나.一聲喝破三千界한 마디 큰소리 질러 삼천대천 세계 뒤흔드니雪裡桃花片片飛눈 속에 복사꽃 붉게 붉게 피네.시대정신을 꿰뚫어 본 한용운은 붉게 붉게 피어나는 그의 마음을 천봉만학이 우쭐대는 설악의 깊은 골짜기에 파묻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봄눈이 미처 녹기도 전에 그는 다시 대중의 품으로 달려왔다.4.3 1운동의 선봉에 서서스님은 늘 마음 속에 세 가지의 커다란 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부처님 정신으로 철저하게 살기 위해 혜초처럼 부처님 땅을 가보는 것이었고, 둘째는 중생제도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언론매체를 생각하고 잡지사와 신문사를 하나 경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것이었다. \'이순신 사공 삼고 을지문덕 마부 삼아 파사검 높이 들고 남선북마 하여볼까\'하는 시의 내용처럼 남아의 이상을 마음껏 펼쳐보고 싶은 그런 원이었다. 그런 원을 거진 스님이었기에 우리 민족 전체를 다 들어 올릴 수 있는 저울추의 역할을 기미년에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는 무단정치 10년을 통하여 민중의 귀와 눈과 입을 다 막아버렸다. 서울로 되돌아온 그는 먼저 민중의 입과 눈과 귀를 열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종합교양잡지 《유심 惟心》(1918년 9월 1일)을 창간하였다. 불교 근대화와 신문화 운동의 전개로서 주로 민족의 정통성과 자존성을 가진 우리 청년들에게 용기와 신념을 잃지 말라는 내용의 잡지였다. 여기에 기미 3 1운동에 동지로 규합될 육당 최남선, 최린 등이 글을 기고했다. 많은 원고를 총독 검열에서 삭제당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스님은 굴하지 않고 언론활동에 필요한 세계정세에까지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기고했다. 《유심》 잡지 제2호를 내고 제3호를 만들 무렵, 세계정세는 급걱히 변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1918년 12월 초에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었는데 때마침 기사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었다. 약소민족은 모두 일어나서 독립운동을 하라는 기사의 내용은 바로 만해 스님의 끓는 가슴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이에 그는 구황실의 귀족들과 종교계 인사는 물론 재력 있는 사람들까지 다 끌어모아 200명 정도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국적인 행사로서 민족의 자존심을 세계만방에 외치자는 의논울 하기로 마음먹었다. 동년 12월 26일 그는 최린을 은밀히 만나 그간의 결심을 텅어 놓으면서 우리도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최린의 동의를 얻은 후 권동진, 오세창도 적극 참여한다는 뜻을 확인했다.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는 자주독립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모으기란 그렇게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대해 소상히 설명하자 그는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다칠 것이니 일본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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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4.13
  • 저작시기2006.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60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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