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호족 세력과 후삼국의 분립
1. 견훤과 호족 세력 과의 관계
2. 궁예와 호족 세력 과의 관계
Ⅲ. 왕건계 호족 세력의 성격
1. 왕건의 출신과 대신라관
2. 왕건계 호족 세력의 성격과 그 의미
Ⅳ. 호족과 사회 변동
Ⅳ. 맺음말
Ⅱ. 호족 세력과 후삼국의 분립
1. 견훤과 호족 세력 과의 관계
2. 궁예와 호족 세력 과의 관계
Ⅲ. 왕건계 호족 세력의 성격
1. 왕건의 출신과 대신라관
2. 왕건계 호족 세력의 성격과 그 의미
Ⅳ. 호족과 사회 변동
Ⅳ. 맺음말
본문내용
人)의 거의 대부분이 이 토성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토성은 중앙관인을 산출하는 공급원으로서 지배세력에 신진세력을 끊임없이 공급하였다.
이처럼 호족이 각지의 토성이 되고, 토성의 사회적 진출이 뚜렷했다는 것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지방사회의 성장이 주목할 만하였고, 지방사회가 사회발전의 저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또한 고려사회의 기층인 지방사회가 매우 건실한 토대 위에서 유지되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나말여초의 호족과 고려 건국에서 후백제의 견훤 궁예 왕건의 사회적 성격을 알아보고, 그들의 출신과 대신라관, 호족세력의 성격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려의 건국자인 왕건은 송악지방의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이었다. 송악지방에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그의 정치적 진출의 토대가 되었고 이어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호족 출신으로서 호족의 실태와 생리를 잘 알았기 때문에 호족세력의 동향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는 호족연합정책으로 정치를 이끌어 갔으며, 호족들을 포섭하고 그들과 연합하는 데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왕건은 고구려 유민의 후예, 즉 비신라계 인물로서 변경지역에서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골품제도 밖에 위치하는 평범한 지방민으로서 신라의 중앙정치체제와 연결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적 성격을 가진 왕건은 전형적인 지방인 변경인으로서 신라의 사회체제나 정치체제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신라골품제사회를 해체시키고 새로운 사회체제나 정치체제를 창출해내는 데 적합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신라를 멸망시켜 병합시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였지만, 신라에 대해서 친(親)신라정책을 취하였다. 신라를 무력으로 멸망시키지 않고 귀부를 유도해냈으며, 이는 그의 친신라정책은 신라의 귀부를 목적으로 시도된 것으로서 당시 정세로 보아 적절한 것이었다.
왕건은 주로 패서지역, 근기지역, 그리고 서남해안지역의 호족들을 결집하였다. 패서 근기 서남해안지역은 지리적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경주와 쉽게 연결되지 않는 변경지역이었다. 또한 이들 지역은 원(原)신라지역이 아니라 비(非)신라지역, 즉 고구려 백제의 고토로서 해상무역이 활발히 전개되거나 군(軍)진(鎭)이 설치된 곳이었다. 그래서 이들 지역에는 해상세력이나 군진세력 출신의 호족세력이 많았다. 따라서 이들 지역의 호족세력은 신라사회의 전통에 구속받은 바가 적었다. 이들 호족세력은 대체로 골품제도 밖에서 새롭게 성장한 평민 지방민출신이었다. 이들은 골품제도에 의한 신분적 특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경제적 군사적 능력이나 지적 능력에 의해서 성장한 새로운 사회세력이었다. 요컨대 왕건의 호족세력은 비신라계의 지방민 출신이었다. 그런 만큼 이 지역의 호족 세력은 골품제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나 보다 개방적인 체질을 소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호족세력은 새로운 사회체제나 정치체제를 창출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패서 근기 서남해안지역은 농업 뿐만 아니라 상업이 주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다. 농업 상업경제에 기반을 둔 이들 지역의 호족세력들은 그들의 풍부한 경제력으로 막대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후삼국통일 전쟁에서 농민들에게 군비 부담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부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들 호족세력들은 육군력뿐만 아니라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농업 상업 양면의 경제적 기반과 육군력 해군력을 동시에 보유한 호족세력이 후삼국 쟁패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고 믿어진다.
그런데 고려의 건국은 궁예의 호족세력에서 왕건의 호족세력으로 교체된 것이었다. 궁예의 호족세력은 친신라지역의 신라계 낙향귀족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였고, 왕건의 호족세력은 고구려 백제 고토의 비신라계 지방민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궁예세력과 왕건세력의 대립은 신라계 낙향귀족 출신의 호족세력과 비신라계 지방민 출신의 호족세력 사이의 갈등이란 측면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고 믿어진다. 궁예세력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골품체제의 전통을 답습하는 데 머물렀다. 반면에 왕건세력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고 골품체제와는 다르거나 반대되는 사회체제와 정치체제를 창출하였다. 그러므로 궁예세력의 몰락과 왕건세력의 등장은 신라말 고려초의 사회변동에 있어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신라말 고려초의 사회변동은 신라골품제사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체제를 창출해내는것이었다. 이러한 사회변동을 주도한 사회세력은 물론 호족세력이었다. 이 사회변동은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의해서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새로 성립된 고려사회는 신라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로서, 신라사회보다 여러 측면에서 한 단계 더 발전된 사회였다. 고려사회는 신라사회에 비하여 훨씬 개방적인 사회였다. 고려사회는 중앙인과 지방민의 차별이 없는 사회였다. 중앙인의 배타적인 특권이 존재하지 않았고, 지방인도 중앙으로 진출하여 중앙인과 동등한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전국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출신 지역에 따라 차별대우를 받지 않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고려사회는 지방세력인 호족세력에 의해서 성립되었고, 그런 만큼 지방세력의 사회적 진출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사회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호족은 신라말 고려초의 사회변동을 주도한 지방세력이었다. 호족은 경주 중심 진골 중심의 신라골품제사회를 해체하고 각지의 지방민과 다양한 계층(階層)의 인물들이 지배(支配)체제(體制)에 참여할 수 있는 보다 개방적(開放的)이 사회체제(社會體制)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하현강, <韓國中世史硏究>, 일조각 , 1984
박용운, <高麗時代史> 上, 일지사, 2004
박종기, <五百年 高麗史>, 푸른역사, 1999
정청주, <신라말 , 고려초 지배세력의 사회적 성격>, 호남사학회, 1995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의 실제와 그 기능>, 한국사연구회, 1982
박재우, <고려 군주의 국제적 위상>, 고려사학회, 2005
장동익, <고려왕조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하나의 소견>, 한국중세사학회, 2001
이처럼 호족이 각지의 토성이 되고, 토성의 사회적 진출이 뚜렷했다는 것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지방사회의 성장이 주목할 만하였고, 지방사회가 사회발전의 저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또한 고려사회의 기층인 지방사회가 매우 건실한 토대 위에서 유지되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나말여초의 호족과 고려 건국에서 후백제의 견훤 궁예 왕건의 사회적 성격을 알아보고, 그들의 출신과 대신라관, 호족세력의 성격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려의 건국자인 왕건은 송악지방의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이었다. 송악지방에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그의 정치적 진출의 토대가 되었고 이어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호족 출신으로서 호족의 실태와 생리를 잘 알았기 때문에 호족세력의 동향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는 호족연합정책으로 정치를 이끌어 갔으며, 호족들을 포섭하고 그들과 연합하는 데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왕건은 고구려 유민의 후예, 즉 비신라계 인물로서 변경지역에서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골품제도 밖에 위치하는 평범한 지방민으로서 신라의 중앙정치체제와 연결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적 성격을 가진 왕건은 전형적인 지방인 변경인으로서 신라의 사회체제나 정치체제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신라골품제사회를 해체시키고 새로운 사회체제나 정치체제를 창출해내는 데 적합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신라를 멸망시켜 병합시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였지만, 신라에 대해서 친(親)신라정책을 취하였다. 신라를 무력으로 멸망시키지 않고 귀부를 유도해냈으며, 이는 그의 친신라정책은 신라의 귀부를 목적으로 시도된 것으로서 당시 정세로 보아 적절한 것이었다.
왕건은 주로 패서지역, 근기지역, 그리고 서남해안지역의 호족들을 결집하였다. 패서 근기 서남해안지역은 지리적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경주와 쉽게 연결되지 않는 변경지역이었다. 또한 이들 지역은 원(原)신라지역이 아니라 비(非)신라지역, 즉 고구려 백제의 고토로서 해상무역이 활발히 전개되거나 군(軍)진(鎭)이 설치된 곳이었다. 그래서 이들 지역에는 해상세력이나 군진세력 출신의 호족세력이 많았다. 따라서 이들 지역의 호족세력은 신라사회의 전통에 구속받은 바가 적었다. 이들 호족세력은 대체로 골품제도 밖에서 새롭게 성장한 평민 지방민출신이었다. 이들은 골품제도에 의한 신분적 특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경제적 군사적 능력이나 지적 능력에 의해서 성장한 새로운 사회세력이었다. 요컨대 왕건의 호족세력은 비신라계의 지방민 출신이었다. 그런 만큼 이 지역의 호족 세력은 골품제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나 보다 개방적인 체질을 소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호족세력은 새로운 사회체제나 정치체제를 창출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패서 근기 서남해안지역은 농업 뿐만 아니라 상업이 주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다. 농업 상업경제에 기반을 둔 이들 지역의 호족세력들은 그들의 풍부한 경제력으로 막대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후삼국통일 전쟁에서 농민들에게 군비 부담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부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들 호족세력들은 육군력뿐만 아니라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농업 상업 양면의 경제적 기반과 육군력 해군력을 동시에 보유한 호족세력이 후삼국 쟁패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고 믿어진다.
그런데 고려의 건국은 궁예의 호족세력에서 왕건의 호족세력으로 교체된 것이었다. 궁예의 호족세력은 친신라지역의 신라계 낙향귀족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였고, 왕건의 호족세력은 고구려 백제 고토의 비신라계 지방민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궁예세력과 왕건세력의 대립은 신라계 낙향귀족 출신의 호족세력과 비신라계 지방민 출신의 호족세력 사이의 갈등이란 측면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고 믿어진다. 궁예세력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골품체제의 전통을 답습하는 데 머물렀다. 반면에 왕건세력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고 골품체제와는 다르거나 반대되는 사회체제와 정치체제를 창출하였다. 그러므로 궁예세력의 몰락과 왕건세력의 등장은 신라말 고려초의 사회변동에 있어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신라말 고려초의 사회변동은 신라골품제사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체제를 창출해내는것이었다. 이러한 사회변동을 주도한 사회세력은 물론 호족세력이었다. 이 사회변동은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의해서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새로 성립된 고려사회는 신라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로서, 신라사회보다 여러 측면에서 한 단계 더 발전된 사회였다. 고려사회는 신라사회에 비하여 훨씬 개방적인 사회였다. 고려사회는 중앙인과 지방민의 차별이 없는 사회였다. 중앙인의 배타적인 특권이 존재하지 않았고, 지방인도 중앙으로 진출하여 중앙인과 동등한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전국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출신 지역에 따라 차별대우를 받지 않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고려사회는 지방세력인 호족세력에 의해서 성립되었고, 그런 만큼 지방세력의 사회적 진출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사회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호족은 신라말 고려초의 사회변동을 주도한 지방세력이었다. 호족은 경주 중심 진골 중심의 신라골품제사회를 해체하고 각지의 지방민과 다양한 계층(階層)의 인물들이 지배(支配)체제(體制)에 참여할 수 있는 보다 개방적(開放的)이 사회체제(社會體制)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하현강, <韓國中世史硏究>, 일조각 , 1984
박용운, <高麗時代史> 上, 일지사, 2004
박종기, <五百年 高麗史>, 푸른역사, 1999
정청주, <신라말 , 고려초 지배세력의 사회적 성격>, 호남사학회, 1995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의 실제와 그 기능>, 한국사연구회, 1982
박재우, <고려 군주의 국제적 위상>, 고려사학회, 2005
장동익, <고려왕조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하나의 소견>, 한국중세사학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