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사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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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경제사 연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년 이이와 성흔 사이에 사단 칠정에 관한 서신 왕래가 시작됨(-1578)
1575년
(선조 8)년 7월 동서분당.
1577년
이이, 《격몽요결》 간행
1580년
(선조 13)년 정철, 「관동별곡」을 지음.
1589년
(선조 22)년 10월 정여립 모반 사건 발생.
1590년
(선조 23)년 3월 황윤길, 김성일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 이 무렵,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뉨.
1592년
임진왜란
1592년
4.30일 선조, 한성을 떠나 피난길에 오름.
1592년
5.29일 사천 해전에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
1592년
7월 말 곽재우가 경상도 의령, 현풍, 영산 등지에서 왜군 격파.
1592년
8월 금산 전투에서 조헌과 영규의 의병 전산
1592년
10월 진주대첩
1592년
6월 일본군, 진주성 공격, 논개 사망.
1593년
(선조 26)년 2월 행주대첩 : 함경, 평안도의 일본군, 한성으로 퇴각.
1594년
(선조 27)년 2월 훈련도감 설치.
1597년
(선조 30)년 1월 정유재란 발발.
1598년
(선조 31)년 11월 노량 해전 : 이순신 함대, 일본 수군을 대파시킴. 이순신(李舜臣) 전사.
1605년
(선조 38)년 4월 유정, 일본에서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옴.
1607년
(선조 40)년 이 해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음.
1608년
(선조 41)년 2월 광해군 즉위. 이 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함
1609년
기유조약
일본과 맺은 전문 13조의 송사조약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국교의 재개를 위해 일본은 끈기 있게 통교 요청을 해 왔고, 이에 대해 우리 조정에서는 찬 ·반 양론이 대두되었으나 일본측이 대조선통교재개를 위해 적극적인 태도로 나오자 우리측은 국서 요구문제, 범능적의 압송문제, 피로인의 송환문제 등 대일강화조약의 성립조건을 제시
1610년
허준, 《동의보감》 완성
1618년
(광해군 10)년 1월 인목대비의 호를 삭탈하고 서궁이라 칭함.
1619년
(광해군 11)년 3월 명에 보낸 원군 패배, 도원수 강홍립은 금에 항복.
1623년
(광해군 15)년 3월 인조 반정 발생 : 이귀를 비롯한 서인이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를 추대함.
1624년
이괄의 난
평안병사 이괄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
1627년
정묘호란
조선 인조 5년(1627)에 후금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이다. 인조가 강화로 피란했다가 강화 조약을 맺었다.
1636년
(인조 14)년 2월 후금이 보낸 국서를 받지 않고 거절함.
1652년
(효종 5)년 이 해, 효종의 북벌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됨.
1653년
하멜 일행, 제주도 표착
1658년
나선 정벌 등 효종의 북벌정책
1658년
전라도에 대동법 실시
1659년
(효종 10)년 5월 제1차 예송논쟁
1662년
제언사 설치
1674년
(현종 15)년 2월 제2차 예송논쟁
1678년
상평통보 전국에 유통
1680년
(숙종 6)년 4월 경신환국 :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
1683년
(숙종 9)년 4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뉨.
1689년
2월 기사환국(己巳換局) : 세자책봉문제로 노론 실각, 남인 집권.
1689년
6월 송시열(宋時烈), 사약을 받음.
1693년
(숙종 19)년 이 해 안용복이 독도에서 일본인을 쫓아 내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일본에 확인시킴.
1694년
(숙종 20)년 3월 갑술옥사 : 노론이 정권을 잡고 남인은 몰락함.
1697년
장길산의 농민군 봉기
1701년
(숙종 27)년 10월 장희빈, 사약을 받음.
1708년
대동법 전국적으로 실시
1712년
백두산정계비 건립
1725년
탕평책 실시
1728년
(영조 4)년 3월 이인좌의 난 발생.
1741년
(영조 17)년 9월 난전을 엄히 금지함.
1750년
균역법 실시
1760년
(영조 36)년 6월 『일성록』 기록 시작(-1910) : 국왕의 언행과 정사를 기록한 책. 세손인 정조가 일기를 쓰면서 시작. 정조 즉위후 정부의 공식문서로 기록됨.
1762년
(영조 38)년 윤5월 사도세자, 뒤주 속에 갇혀 죽음.
1764년
장예원 혁파
1770년
(영조 46)년 8월 『동국문헌비고』 완성 : 정치, 경제, 문화 등 각종 제도와 문물을 분류하여 설명한 책.
1776년
(영조 52)년 3월 정조즉위.
1776년
7월 홍국영, 도승지로서 세도를 부림.
1776년
9월 규장각 설치.
1781년
정조, 개혁정치의 선봉. 규장각 이전
1783년
(정조 7)년. 이 무렵.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지음.
1784년
천주교 전도
1786년
서학의 금지
1790년
(정조 14)년. 안정복, 『동사강목』을 지음
1791년
(정조 15)년 2월, 신해통공 : 금난전권을 폐지함.
1797년
(정조 21)년 이긍익, 『연려실기술』편찬 : 조선태조부터 숙종대까지의 야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역사책.
1801년
(순조 1)년 9월 황사영 백서 사건 일어남.
1801년
신유박해
박해의 원인
“정도인 유학은 \'사학\'인 천주교를 소멸시킬 것”이라면서, 쳔주교에 대해서 온화한 정책을 써 오던 정조가 별세한 뒤, 순조가 11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여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벽파가 정순왕후를 움직이면서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박해의 진짜 이유는 남인숙청이었다. 야당인 남인 중에서 천주교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순왕후 자신도 정조의 사도세자 사건 연루자 숙청으로 가문이 몰락하여 정조에 대해서 원한을 갖고 있었으므로, 천주교에 대한 강경책을 통해 정조의 온건정책을 부정하고자 하였다.
박해결과
이 사건으로 중국인 천주교 신부이자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를 비롯하여 만천 이승훈, 정약종(다산 정약용의 형), 여성 평신도 지도자인 강완숙 등이 사형당했고, 한때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념의 차이로 멀리한[2]정약용 등은 귀양보내져 박해 피해자는 수백명에 달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오가작통법을 통해 다섯 집 중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적발되면 모두 처벌하는 가혹한 연좌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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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6.26
  • 저작시기20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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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7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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