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냉수리 신라비의 발견과 내용
1)냉수리 신라비는 언제 어떻게 발견 되었나요?
1)냉수리 신라비에는 무엇이라 쓰여 있나요?
2.냉수리 신라비로부터 알 수 있는 신라
1) 비문에서 알 수 있는 당시 신라의 정치
(1)국가가 개인 재산상속에 관여한 이유는?
(2)냉수리신라비가 전하는 새로운 사실!?
(3)냉수리 신라비가 비추어주는 신라의 정치적인 의의
2) 비문에서 알 수 있는 당시 신라의 경제
(1)비문 내용에서의 주요 쟁점은?
(2) 財가 무엇이었기에 이리 다툰 것일까?
(3)당시 신라의 재산상속형태는?
3)비문에서 알 수 있는 당시 신라의 사회·문화
3. 냉수리 신라비의 의의와 한계
1)의의
2)한계
1)냉수리 신라비는 언제 어떻게 발견 되었나요?
1)냉수리 신라비에는 무엇이라 쓰여 있나요?
2.냉수리 신라비로부터 알 수 있는 신라
1) 비문에서 알 수 있는 당시 신라의 정치
(1)국가가 개인 재산상속에 관여한 이유는?
(2)냉수리신라비가 전하는 새로운 사실!?
(3)냉수리 신라비가 비추어주는 신라의 정치적인 의의
2) 비문에서 알 수 있는 당시 신라의 경제
(1)비문 내용에서의 주요 쟁점은?
(2) 財가 무엇이었기에 이리 다툰 것일까?
(3)당시 신라의 재산상속형태는?
3)비문에서 알 수 있는 당시 신라의 사회·문화
3. 냉수리 신라비의 의의와 한계
1)의의
2)한계
본문내용
에 참석하는 모든 구성원들을 왕이라고 불렀던 새로운 사실도 비에서 전하고 있다. 더구나 왕경 6부 대표를 사덕지아간지, 자숙지거벌간지, 훼부 이부지일간지, 지심지거벌간지, 본피부 두복지간지, 사피부모사지간지 등 간지(干支)라 칭하고 있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앞면에 此七王等(차칠왕등)이라 새겨져 있지만 해석은 두 갈래로 나뉜다. 그리고 그 해석에 따라 신라와 왕권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나뉠 수밖에 없다. 차칠왕 등 이라고 해석을 하게 되면 왕은 7명이라는 뜻이 되므로 신라의 왕은 다른 왕들의 견제를 받는 권력이 약한 왕으로 해석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차칠 왕등이라고 해석을 하게 되면 지도로 갈문왕과 그 신하 6명을 합쳐서 7명이라는 뜻이 되므로 위와는 완전히 다른 뜻이 되고 신라의 왕권은 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금석문의 내용으로 보아 어떤 회의를 할 때에는 왕을 비롯한 여러 신하와 함께 회의를 이끌어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재판이라는 것을 행했다는 점에서 비롯하여 법이란 것이 존재하여 귀족들뿐만 아니라 일반민에게도 법의 보호가 적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뒷면의 내용에서 다시 이의가 제기 될 경우에는 중죄로 처벌하겠다고 함으로써 법의 계속 적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판의 주된 내용으로는 절거리라는 인물의 재산 상속에 관한 것인데 여기서도 재산과 상속 이 2가지를 알 수 있다. 비문의 소유권 분쟁에 휘말린 재산은 철광산이나 거기에서 생산된 철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4~6세기에 철제 농기구가 널리 보급되었고, 이것을 농사에 활용하면서 농업 생산이 크게 증대되었다. 이래서 당시 지배층은 철제 농기구를 앞 다투어 소유하려고 하였고, 4~6세기 삼국시대 지배층 고분에서 철제 농기구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재산 품목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철제 농기구가 경제적 부를 확대하는 데 직접 도움이 되었기에 그 재료인 철을 확보하는 일이 당시 지배층이 크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100여 년에 걸쳐 진마이촌에서 철광산이나 그곳에서 생산된 철을 둘러싸고 소유권 분쟁을 벌인 까닭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재산의 취득이 인정되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재산의 상속 역시 공식적으로 인정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판결을 공표하는 데 있어서 소를 잡았다는 것을 보면 신라의 제천의식도 조금은 엿 볼 수 있다. 소를 잡아 하늘에 알렸다는 것은 하늘에게 틀린 점이 없는 공정한 판결이었다는 것을 맹세하는 의미로도 볼 수 있으며, 그 맹세로 인해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릴 수 있는 자리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판결에 대한 결과를 기록하여 남김으로서 차후에 다른 이견이 제기될 수 없도록 조치하였다.
그것은 냉수리비 윗면에 “촌주 유지간지와 수지일금지 이 두 사람이 이해에 일을 마쳤다. 이에 기록한다.” 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으며, 절거리의 후손들은 대대로 냉수리비를 보관하며 자신들의 소유임을 증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냉수리 신라비의 의의와 한계
1)의의
첫째,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의 비 중에서 연대가 가장 빠르다는 점,
둘째, 한 인물의 재산 소유와 상속 문제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어 이 시기 경제 관계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
셋째, 6부·갈문왕·사라·관등·촌주·도사 등 정치·제도사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다수 보이고 있다는 점,
넷째, 국어학적으로 이두(吏讀)의 성립 시기와 성립 과정을 추정하게 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2)한계
이 비는 이처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학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미해결의 문제가 없지 않다.
첫째, 땅 속에 묻혀 있었던 관계로 비면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전문의 판독이 가능하지만 10여 자 정도는 판독자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어 앞으로 정확한 판독이 요망된다.
둘째, 상면에 글자를 새기고 있어서 이러한 형태를 비로 보아야 할 것인지의 여부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셋째, 비의 건립 연대인 계미년이 연구자 사이에 503년설과 443년설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 건립 연대의 확정은 최대의 연구 과제라 할 수 있다.
넷째, 사부지왕과 내지왕을 전세2왕(前世二王)이라 한 것, 지도로갈문왕 이하 고위 관리 7인을 7왕으로 표현한 것, 본피부와 사피부의 고위 관리와 지방의 촌주가 똑같이 간지라는 관등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치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앞면에 此七王等(차칠왕등)이라 새겨져 있지만 해석은 두 갈래로 나뉜다. 그리고 그 해석에 따라 신라와 왕권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나뉠 수밖에 없다. 차칠왕 등 이라고 해석을 하게 되면 왕은 7명이라는 뜻이 되므로 신라의 왕은 다른 왕들의 견제를 받는 권력이 약한 왕으로 해석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차칠 왕등이라고 해석을 하게 되면 지도로 갈문왕과 그 신하 6명을 합쳐서 7명이라는 뜻이 되므로 위와는 완전히 다른 뜻이 되고 신라의 왕권은 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금석문의 내용으로 보아 어떤 회의를 할 때에는 왕을 비롯한 여러 신하와 함께 회의를 이끌어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재판이라는 것을 행했다는 점에서 비롯하여 법이란 것이 존재하여 귀족들뿐만 아니라 일반민에게도 법의 보호가 적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뒷면의 내용에서 다시 이의가 제기 될 경우에는 중죄로 처벌하겠다고 함으로써 법의 계속 적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판의 주된 내용으로는 절거리라는 인물의 재산 상속에 관한 것인데 여기서도 재산과 상속 이 2가지를 알 수 있다. 비문의 소유권 분쟁에 휘말린 재산은 철광산이나 거기에서 생산된 철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4~6세기에 철제 농기구가 널리 보급되었고, 이것을 농사에 활용하면서 농업 생산이 크게 증대되었다. 이래서 당시 지배층은 철제 농기구를 앞 다투어 소유하려고 하였고, 4~6세기 삼국시대 지배층 고분에서 철제 농기구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재산 품목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철제 농기구가 경제적 부를 확대하는 데 직접 도움이 되었기에 그 재료인 철을 확보하는 일이 당시 지배층이 크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100여 년에 걸쳐 진마이촌에서 철광산이나 그곳에서 생산된 철을 둘러싸고 소유권 분쟁을 벌인 까닭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재산의 취득이 인정되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재산의 상속 역시 공식적으로 인정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판결을 공표하는 데 있어서 소를 잡았다는 것을 보면 신라의 제천의식도 조금은 엿 볼 수 있다. 소를 잡아 하늘에 알렸다는 것은 하늘에게 틀린 점이 없는 공정한 판결이었다는 것을 맹세하는 의미로도 볼 수 있으며, 그 맹세로 인해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릴 수 있는 자리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판결에 대한 결과를 기록하여 남김으로서 차후에 다른 이견이 제기될 수 없도록 조치하였다.
그것은 냉수리비 윗면에 “촌주 유지간지와 수지일금지 이 두 사람이 이해에 일을 마쳤다. 이에 기록한다.” 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으며, 절거리의 후손들은 대대로 냉수리비를 보관하며 자신들의 소유임을 증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냉수리 신라비의 의의와 한계
1)의의
첫째,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의 비 중에서 연대가 가장 빠르다는 점,
둘째, 한 인물의 재산 소유와 상속 문제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어 이 시기 경제 관계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
셋째, 6부·갈문왕·사라·관등·촌주·도사 등 정치·제도사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다수 보이고 있다는 점,
넷째, 국어학적으로 이두(吏讀)의 성립 시기와 성립 과정을 추정하게 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2)한계
이 비는 이처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학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미해결의 문제가 없지 않다.
첫째, 땅 속에 묻혀 있었던 관계로 비면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전문의 판독이 가능하지만 10여 자 정도는 판독자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어 앞으로 정확한 판독이 요망된다.
둘째, 상면에 글자를 새기고 있어서 이러한 형태를 비로 보아야 할 것인지의 여부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셋째, 비의 건립 연대인 계미년이 연구자 사이에 503년설과 443년설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 건립 연대의 확정은 최대의 연구 과제라 할 수 있다.
넷째, 사부지왕과 내지왕을 전세2왕(前世二王)이라 한 것, 지도로갈문왕 이하 고위 관리 7인을 7왕으로 표현한 것, 본피부와 사피부의 고위 관리와 지방의 촌주가 똑같이 간지라는 관등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치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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