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중국의 구석기시대
2. 전기 구석기시대
1) 전기 구석기시대의 인류
2) 전기 구석기 시대의 도구
3) 전기 구석기시대 사회상
4) 전기 구석기시대 경제생활
3. 중기 구석기시대
1) 중기 구석기시대의 인류
2) 중기 구석기시대의 도구
3) 중기 구석기시대의 사회상
4) 중기 구석기시대의 경제생활
4. 후기 구석기시대
1) 후기 구석기시대의 인류
2) 후기 구석기시대의 도구
3) 후기 구석기시대의 사회상
4) 후기 구석기시대의 경제생활
5. 구석기시대인의 생활변화 : 분업의 출현
《 참고문헌 》
2. 전기 구석기시대
1) 전기 구석기시대의 인류
2) 전기 구석기 시대의 도구
3) 전기 구석기시대 사회상
4) 전기 구석기시대 경제생활
3. 중기 구석기시대
1) 중기 구석기시대의 인류
2) 중기 구석기시대의 도구
3) 중기 구석기시대의 사회상
4) 중기 구석기시대의 경제생활
4. 후기 구석기시대
1) 후기 구석기시대의 인류
2) 후기 구석기시대의 도구
3) 후기 구석기시대의 사회상
4) 후기 구석기시대의 경제생활
5. 구석기시대인의 생활변화 : 분업의 출현
《 참고문헌 》
본문내용
국 원인들이 사용했던 석기는 석영암이나 조약돌의 격지를 이용하여 만든 찍개, 밀개, 긁개등의 소위 격지석기가 주류인데 이것은 중국의 초기석기문화가 지니는 공통된 성질인 것이다. 이러한 중국원인(中國猿人)이 사용한 타제석기의 형태[剝片石器]는 동부 인도로부터 동남아시아와 중국에 걸쳐 분포하는 것으로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발견되는 깎여진 돌의 양쪽 끝을 사용하는 석기[石核石器]와 제작기술면에서 다른 계통에 속한다. 구석기문화의 지역적인 특색이 일찍부터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貝塚茂樹, 伊藤道治,《중국의 역사 Ⅰ》(서울, 이론과 실천, 1991), p.32-33
3) 전기 구석기시대의 사회생활
남전원인과 북경원인은 불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세계의 인류사상 가장 오래 된 것이고 가장 일찍부터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주구점(周口店)에서는 목탄·재 등과 더불어 불에 그을린 동물의 뼈도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이미 북경원인은 고기를 익혀 먹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음식물의 소화를 용이하게 하여 육체적 발달을 촉진했을 뿐 아니라 아래 턱 뼈를 음식물을 씹어 으깨기 위한 강한 운동으로부터 해방시켜 보다 경쾌하게 음직일 수 있게 함으로써 언어의 발성을 보다 섬세하고 원활하게 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인류는 추위를 막고 야수의 위협에서 자신들을 방어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불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은 동물의 고기를 식용하는 것을 용이하게 했을 것이며, 추위를 몰아내거나 혹은 들짐승을 쫓아내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식인(食人)의 풍습이 있었다는 점이다. 주구점에서 발견된 원인의 두개골 다수는 두개골 바닥을 정성들여 판 흔적이 있고, 더욱이 체골(體骨)의 수에 비해 두개골이 많았다. 이 사실에서 주구점 동굴에 살고 있던 원인(原人)이 다른 원인의 시체에서 두부(頭部)를 떼내어 뇌를 식용한 후, 특히 두개골을 동굴 내에 가지고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학자가 있다. 또 사지의 뼈 중에 세로로 쪼개어진 것이 있는 것은 골수를 식용으로 채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중국의 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거의 무시해 버리고 있다. 그러나 식인의 풍습이 있었는가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두개골에 대한 무엇인가 특별한 생각이 있었던 것은 인정하여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사실이 곧 종교 혹은 주술의 존재와 결부되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 당시에 두개골, 혹은 두부에 대한 어떤 관심이 쏟아지고 있었음은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원인들은 가장 가까운 유인원이 초식동물이었던 것과는 달리, 과일등 식물성 식료와 함께 동물의 고기도 중요한 식료의 하나로 삼는 잡식성 동물이었다. 아마도 인류가 삼림의 나무위에서의[樹上] 생활로부터 초원으로 나와 동굴에서 생활하게 되었을 때, 다른 동물을 붙잡아 이렇게 식료로 삼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석기나 나무막대기 등을 무기로 삼아 집단을 이루어 스테고돈이나 검치호 등 대형 포유동물을 상대했을 것이다. 집단의 행동통일을 위해 분절언어(分節言語)가 큰 작용을 하게 되고, 동물과 인류를 명확히 구분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군집생활로 인해 상호간의 의사소통의 필요성으로 인해 언어의 사용이 이뤄졌다. 예전에는 이 시대의 인류 집단은 난혼(亂婚)을 행하는 상당히 잡다한 관계를 가진 자들의 집합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유인원이나 원숭이의 생태학적 연구로 미루어 보아, 보통 집단은 일부일처와 아이, 또는 적어도 일부다처와 아이들로 이루어진 비교적 적은 사람 수가 모인 단위 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수렵은 남자의 일인데 반해 식물이나 곤충 등 작은 동물의 채집은 여자의 일이라는 식으로 분업이 이루어졌고, 양자의 협력으로 자식이 양육되고 생존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貝塚茂樹, 伊藤道治,《중국의 역사 Ⅰ》(서울, 이론과 실천, 1991), p.32-33
4) 전기 구석기시대 경제생활
베이징원인들은 도구를 공동으로 제작하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는데 공동체의 생활을 통하여 언어가 발생하였다. 베이징원인의 뇌막 가운데 언어와 관계있는 부분이 두드러진 것은 그들이 이미 언어를 사용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언어의 사용은 두뇌발달에 매우 크게 작용하였다.
베이징원인의 주된 생산 활동은 사냥과 그러모으기였다. 그들이 살았던 산굴 안에서는 부서졌거나 불에 탄 동물뼈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사슴뼈가 가장 많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일상적인 수렵대상이 사슴이었음을 알게 한다.
베이징원인의 생활은 매우 힘든 원시적인 집단생활이었다. 원시적인 도구, 충분하지 못한 생활경험, 단순한 협동생활을 가지고 자연계의 온갖 재난에 대처해야 했고 자주 습격해 오는 맹수와도 싸워야 했으며 필요한 식료도 구해야 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약 40여 구의 원인유골을 살펴보면 그들의 수명은 일반적으로 길지 못하였다. 약1/3은 14살 전에 요절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삶이 매우 어려웠음을 알게 해준다. 윤내현,《중국사1》(서울, 믿음사, 1995), p.42-43
3. 중기 구석기시대
중국의 중기 구석기시대는 지질학적으로 간빙기에 해당한다. 석기문화의 분류에서 중기가 되면 인류는 차츰 현대인에 가까운 슬기사람이라 불리고 석기제작에서도 진전이 보인다.
1) 중기 구석기시대의 인류
고인시대
중기 구석기시대는 약 20만년~10만년 전 무렵에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인류는 고인(古人)이라 일컬어지는데 뇌의 구조도 한층 진화하고 석기의 제조 방식에도 진보가 보인다. 예를 들면 1954년 정촌인(丁村人)의 화석이 출토된 산서성 양분현(襄汾縣) 정촌(丁村)부근은 지질학적 연대로나 조잡하고 큰 석기의 형태로 보면 조기 구석기 시대와 유사하지만 이차적인 조정가공을 가한 첨상기(尖狀器)와 다변석기(多邊石器)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전시기에 비하여 명확히 진보된 문화층임이 확인되었다.
정촌인보다 시기적으로 약간 이른 이 시대의 인류[古人]로 마패인(馬人) 장양인(長陽人) 등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마패인의 화석은 1958년 광동성 소관시(紹關市) 마패향(馬鄕)에서 출토되었는데 그 두개골의 골벽은 원인에 비하여
3) 전기 구석기시대의 사회생활
남전원인과 북경원인은 불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세계의 인류사상 가장 오래 된 것이고 가장 일찍부터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주구점(周口店)에서는 목탄·재 등과 더불어 불에 그을린 동물의 뼈도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이미 북경원인은 고기를 익혀 먹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음식물의 소화를 용이하게 하여 육체적 발달을 촉진했을 뿐 아니라 아래 턱 뼈를 음식물을 씹어 으깨기 위한 강한 운동으로부터 해방시켜 보다 경쾌하게 음직일 수 있게 함으로써 언어의 발성을 보다 섬세하고 원활하게 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인류는 추위를 막고 야수의 위협에서 자신들을 방어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불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은 동물의 고기를 식용하는 것을 용이하게 했을 것이며, 추위를 몰아내거나 혹은 들짐승을 쫓아내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식인(食人)의 풍습이 있었다는 점이다. 주구점에서 발견된 원인의 두개골 다수는 두개골 바닥을 정성들여 판 흔적이 있고, 더욱이 체골(體骨)의 수에 비해 두개골이 많았다. 이 사실에서 주구점 동굴에 살고 있던 원인(原人)이 다른 원인의 시체에서 두부(頭部)를 떼내어 뇌를 식용한 후, 특히 두개골을 동굴 내에 가지고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학자가 있다. 또 사지의 뼈 중에 세로로 쪼개어진 것이 있는 것은 골수를 식용으로 채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중국의 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거의 무시해 버리고 있다. 그러나 식인의 풍습이 있었는가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두개골에 대한 무엇인가 특별한 생각이 있었던 것은 인정하여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사실이 곧 종교 혹은 주술의 존재와 결부되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 당시에 두개골, 혹은 두부에 대한 어떤 관심이 쏟아지고 있었음은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원인들은 가장 가까운 유인원이 초식동물이었던 것과는 달리, 과일등 식물성 식료와 함께 동물의 고기도 중요한 식료의 하나로 삼는 잡식성 동물이었다. 아마도 인류가 삼림의 나무위에서의[樹上] 생활로부터 초원으로 나와 동굴에서 생활하게 되었을 때, 다른 동물을 붙잡아 이렇게 식료로 삼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석기나 나무막대기 등을 무기로 삼아 집단을 이루어 스테고돈이나 검치호 등 대형 포유동물을 상대했을 것이다. 집단의 행동통일을 위해 분절언어(分節言語)가 큰 작용을 하게 되고, 동물과 인류를 명확히 구분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군집생활로 인해 상호간의 의사소통의 필요성으로 인해 언어의 사용이 이뤄졌다. 예전에는 이 시대의 인류 집단은 난혼(亂婚)을 행하는 상당히 잡다한 관계를 가진 자들의 집합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유인원이나 원숭이의 생태학적 연구로 미루어 보아, 보통 집단은 일부일처와 아이, 또는 적어도 일부다처와 아이들로 이루어진 비교적 적은 사람 수가 모인 단위 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수렵은 남자의 일인데 반해 식물이나 곤충 등 작은 동물의 채집은 여자의 일이라는 식으로 분업이 이루어졌고, 양자의 협력으로 자식이 양육되고 생존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貝塚茂樹, 伊藤道治,《중국의 역사 Ⅰ》(서울, 이론과 실천, 1991), p.32-33
4) 전기 구석기시대 경제생활
베이징원인들은 도구를 공동으로 제작하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는데 공동체의 생활을 통하여 언어가 발생하였다. 베이징원인의 뇌막 가운데 언어와 관계있는 부분이 두드러진 것은 그들이 이미 언어를 사용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언어의 사용은 두뇌발달에 매우 크게 작용하였다.
베이징원인의 주된 생산 활동은 사냥과 그러모으기였다. 그들이 살았던 산굴 안에서는 부서졌거나 불에 탄 동물뼈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사슴뼈가 가장 많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일상적인 수렵대상이 사슴이었음을 알게 한다.
베이징원인의 생활은 매우 힘든 원시적인 집단생활이었다. 원시적인 도구, 충분하지 못한 생활경험, 단순한 협동생활을 가지고 자연계의 온갖 재난에 대처해야 했고 자주 습격해 오는 맹수와도 싸워야 했으며 필요한 식료도 구해야 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약 40여 구의 원인유골을 살펴보면 그들의 수명은 일반적으로 길지 못하였다. 약1/3은 14살 전에 요절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삶이 매우 어려웠음을 알게 해준다. 윤내현,《중국사1》(서울, 믿음사, 1995), p.42-43
3. 중기 구석기시대
중국의 중기 구석기시대는 지질학적으로 간빙기에 해당한다. 석기문화의 분류에서 중기가 되면 인류는 차츰 현대인에 가까운 슬기사람이라 불리고 석기제작에서도 진전이 보인다.
1) 중기 구석기시대의 인류
고인시대
중기 구석기시대는 약 20만년~10만년 전 무렵에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인류는 고인(古人)이라 일컬어지는데 뇌의 구조도 한층 진화하고 석기의 제조 방식에도 진보가 보인다. 예를 들면 1954년 정촌인(丁村人)의 화석이 출토된 산서성 양분현(襄汾縣) 정촌(丁村)부근은 지질학적 연대로나 조잡하고 큰 석기의 형태로 보면 조기 구석기 시대와 유사하지만 이차적인 조정가공을 가한 첨상기(尖狀器)와 다변석기(多邊石器)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전시기에 비하여 명확히 진보된 문화층임이 확인되었다.
정촌인보다 시기적으로 약간 이른 이 시대의 인류[古人]로 마패인(馬人) 장양인(長陽人) 등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마패인의 화석은 1958년 광동성 소관시(紹關市) 마패향(馬鄕)에서 출토되었는데 그 두개골의 골벽은 원인에 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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