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교자는 강대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니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해야 한다. 성경을 올바로 전하기 위하여서는 준비하는데 있어서 성경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두 기준 중의 하나는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형식이다. 성경이 형성될 말처럼 성경과 유사하게 전하면그것은 성경적이다. 즉, 성경의 형식에 따라 성경의 모양대로 설교해야 한다. 성경은 다양한 장르로 이루어져 있다. 형식에는 1) 내러티브(narative), 2) 시(poet), 3) 지혜서(wisdom) 4) 예언(prophecy) 묵시문학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장르 미스테이크를 많이 한다. 예를들어 기적의 이야기가 있다. 기적의목적은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인데 변증하느라고 시간을 보내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설교라고 볼 수는 없다. 설교는 장르에 맞게 하여야 한다. 사건 전개에따라 성경이 전개되고 있다면 그 방법을 따라야 한다. 이미지의 전개에 따라 설교를 작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장르가 무엇인지에 따라 장르에 맞게 설교해야 성경적 설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아가서는 연애편지(love letter)로 보는가? 이제까지 이 아가서에 대한알레고리칼한 해석이 있었다. 1차적 의미는 사랑 서신으로 본다. 2차적 의미로는그리스도와 그의 백성간의 사랑이다. 따라서 장르 이해는 장르 본문 이해의 열쇠이며 해석자가 그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게끔 하면 된다. 이것은 성경을 그대로베끼는 것이 아니라 plot에 따라 전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서 이해는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설교를 위한 것이다.
성경적 설교의 기준
성경은 이스라엘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역사속에서 말씀하시고 경륜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경은 히브리 언어로 이루어져 있고 장르는 주인공 등 등장인물이 나오는 내러티브이다. 히브리 내러티브 형식으로 기록된 이스라엘 미래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선포이다. 하나님은 언어로 자신이 말을 기록하는 것을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풍부한 표현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시지를 전달하였다. 이러므로 성경은 언어적 구조로 이루어 졌으며 장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적 설교를 하기 위하여서는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들이 어떤 방법으로 의도에 의하여 기록되었는가를 알아야 바로 설교할수 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전달하였는가를 알려면 그의 전한 메시지 보다도 그가 전하여야 할 메시지의 원 양식에 맞게 설교를 하였는가를 알아야 그가 전달한 메시지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알수 있다. 결국 우리는 설교자가 하나님을 말씀을 전하는지는 그 말씀에 의하여 알수 있단는 것이다. 설교자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느냐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리트머스 시험지는 성경 뿐이다.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가 아닌가의 유일한 규범이요 기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성경에 묵여 있어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설교는 성경적이어야 한가고 말하는 것이다.
설교가 성경적인가를 알아보는 기준을 미국의 칼빈 신학교 설교학 교수인 크레이다누스는 두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성경이 설교의 내용을 통제하고 있어야 하며.
둘째: 설교의 기능이 성경 본문의 기능과 유하햐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 의해 형성된 말을 성경의 방식대로 전하면 그것이바로 성경적인 설교인다.
단지 성경의 내용만 성경적이 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며, 설교의 형식마저도 성경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용 뿐 아니라 형식까지도 성경의 통재를 받는 설교가 성경적 설교이다. 설교 본문으로 택한 성경 본문이 어떤 장르로쓰여졌는지를 살펴보고 그 장르에 맞게 설교해야 한다. 다양한 장르를 가지고 있는 성경은 그 모든 장마다 그장에 맞는 해석의 방법과 문예적 고찰을 필요로 하고 있다. 성경은 이런 다양한 문학적인 기교를 사용하여 기록하였으며 이렇것들 가운데 더 풍성하고 정확하게 전달이 되는 것이다. 성경의 이런 다양한 장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성경을 또는 내러티브를 설교할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성경의 올바른 메시지가 전달이 되지 않는다.
만일 선지서를 역사서로, 시편을 교리집으로, 사랑 문학을 알레고리칼한 문학으로, 묵시문학을 미래의 청사진을담은 예언서로 간주하면 전혀 다른 해석이나오기 마련이다.
우리는 본문의 장르에 때라 거시에 맞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결국 우리는 성경의 각 문학 형식(장르)에 맞는 설교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 전통적인 설교자들이 “3 대지”의 형태로 설교했다. 역사서를 설교하든 시편을 설교하던 묵시문학을 설교하든 예언서를 설교하든 세가지 요점을 이야기 하는 것이 통례였다. 이것이 교인들로 하여금 식상하게 만든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성경 본문 자체가 스스로 말하게 하기 보다는 다 짜여진 틀을 가지고 본문을 그 틀에 맞게 설교를 하여왔다. 또 이런 식의 방식을 공통적으로 하여 왔기에 본문의 분해를 하였던 것이다. 본문에서 억지로 그런 메시지를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본문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요점을 몇가지 말하는 것은 성경 본문의 다양함과 풍요함을 살실케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장르에 맞는 설교의 형식으로 하여야 한다.
본문이 문예적인 기술방법들을 동원하여 이루어 졌기게 이런 기술방법들을 이해하거나 참고하지 않고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물의가 있다. 장르에 맞는 설교를 하는 것이 정확한 전달이라고 할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본문의 형태를 무작정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역사적 사건들의 기술을 설교함에 있어서 기술의 목적이나 전체적인 의도를 무시하고 한 부분만 해석하여 설교에 적용한다면 자자의 의도를 무시하였을 뿐만이나라 곡해요 오해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그들에게 해당되는 것들을 다시한번 적용할 수는 있지만 그 본문이 그대로 변화가 없이 적용하는것도 잘못이다.
구약의연대적 서술들을 보면 기록자가 무의미하게 숫대로 기록한것처럼 보일때우리에게 보일때가 있지만 실제로 기록자가 그 긴 역사속에소 부명하가 설명하고 기표한 것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이해하거나 새석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무리하게 단정
우리는 장르 미스테이크를 많이 한다. 예를들어 기적의 이야기가 있다. 기적의목적은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인데 변증하느라고 시간을 보내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설교라고 볼 수는 없다. 설교는 장르에 맞게 하여야 한다. 사건 전개에따라 성경이 전개되고 있다면 그 방법을 따라야 한다. 이미지의 전개에 따라 설교를 작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장르가 무엇인지에 따라 장르에 맞게 설교해야 성경적 설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아가서는 연애편지(love letter)로 보는가? 이제까지 이 아가서에 대한알레고리칼한 해석이 있었다. 1차적 의미는 사랑 서신으로 본다. 2차적 의미로는그리스도와 그의 백성간의 사랑이다. 따라서 장르 이해는 장르 본문 이해의 열쇠이며 해석자가 그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게끔 하면 된다. 이것은 성경을 그대로베끼는 것이 아니라 plot에 따라 전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서 이해는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설교를 위한 것이다.
성경적 설교의 기준
성경은 이스라엘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역사속에서 말씀하시고 경륜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경은 히브리 언어로 이루어져 있고 장르는 주인공 등 등장인물이 나오는 내러티브이다. 히브리 내러티브 형식으로 기록된 이스라엘 미래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선포이다. 하나님은 언어로 자신이 말을 기록하는 것을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풍부한 표현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시지를 전달하였다. 이러므로 성경은 언어적 구조로 이루어 졌으며 장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적 설교를 하기 위하여서는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들이 어떤 방법으로 의도에 의하여 기록되었는가를 알아야 바로 설교할수 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전달하였는가를 알려면 그의 전한 메시지 보다도 그가 전하여야 할 메시지의 원 양식에 맞게 설교를 하였는가를 알아야 그가 전달한 메시지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알수 있다. 결국 우리는 설교자가 하나님을 말씀을 전하는지는 그 말씀에 의하여 알수 있단는 것이다. 설교자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느냐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리트머스 시험지는 성경 뿐이다.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가 아닌가의 유일한 규범이요 기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성경에 묵여 있어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설교는 성경적이어야 한가고 말하는 것이다.
설교가 성경적인가를 알아보는 기준을 미국의 칼빈 신학교 설교학 교수인 크레이다누스는 두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성경이 설교의 내용을 통제하고 있어야 하며.
둘째: 설교의 기능이 성경 본문의 기능과 유하햐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 의해 형성된 말을 성경의 방식대로 전하면 그것이바로 성경적인 설교인다.
단지 성경의 내용만 성경적이 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며, 설교의 형식마저도 성경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용 뿐 아니라 형식까지도 성경의 통재를 받는 설교가 성경적 설교이다. 설교 본문으로 택한 성경 본문이 어떤 장르로쓰여졌는지를 살펴보고 그 장르에 맞게 설교해야 한다. 다양한 장르를 가지고 있는 성경은 그 모든 장마다 그장에 맞는 해석의 방법과 문예적 고찰을 필요로 하고 있다. 성경은 이런 다양한 문학적인 기교를 사용하여 기록하였으며 이렇것들 가운데 더 풍성하고 정확하게 전달이 되는 것이다. 성경의 이런 다양한 장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성경을 또는 내러티브를 설교할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성경의 올바른 메시지가 전달이 되지 않는다.
만일 선지서를 역사서로, 시편을 교리집으로, 사랑 문학을 알레고리칼한 문학으로, 묵시문학을 미래의 청사진을담은 예언서로 간주하면 전혀 다른 해석이나오기 마련이다.
우리는 본문의 장르에 때라 거시에 맞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결국 우리는 성경의 각 문학 형식(장르)에 맞는 설교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 전통적인 설교자들이 “3 대지”의 형태로 설교했다. 역사서를 설교하든 시편을 설교하던 묵시문학을 설교하든 예언서를 설교하든 세가지 요점을 이야기 하는 것이 통례였다. 이것이 교인들로 하여금 식상하게 만든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성경 본문 자체가 스스로 말하게 하기 보다는 다 짜여진 틀을 가지고 본문을 그 틀에 맞게 설교를 하여왔다. 또 이런 식의 방식을 공통적으로 하여 왔기에 본문의 분해를 하였던 것이다. 본문에서 억지로 그런 메시지를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본문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요점을 몇가지 말하는 것은 성경 본문의 다양함과 풍요함을 살실케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장르에 맞는 설교의 형식으로 하여야 한다.
본문이 문예적인 기술방법들을 동원하여 이루어 졌기게 이런 기술방법들을 이해하거나 참고하지 않고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물의가 있다. 장르에 맞는 설교를 하는 것이 정확한 전달이라고 할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본문의 형태를 무작정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역사적 사건들의 기술을 설교함에 있어서 기술의 목적이나 전체적인 의도를 무시하고 한 부분만 해석하여 설교에 적용한다면 자자의 의도를 무시하였을 뿐만이나라 곡해요 오해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그들에게 해당되는 것들을 다시한번 적용할 수는 있지만 그 본문이 그대로 변화가 없이 적용하는것도 잘못이다.
구약의연대적 서술들을 보면 기록자가 무의미하게 숫대로 기록한것처럼 보일때우리에게 보일때가 있지만 실제로 기록자가 그 긴 역사속에소 부명하가 설명하고 기표한 것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이해하거나 새석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무리하게 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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