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에 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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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리랑'에 관한 소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시작하며
1. 주제 설정 이유와 의의
2.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3. 연구 방법
4. 선행 연구의 고찰
5. 연구의 제한
Ⅱ. 아리랑의 기원 및 어원설
1. 기원설
2. 어원설
Ⅲ. 아리랑의 특징 고찰
1. ‘고개’의 정서적 친근성
2. 음과 장단의 매력
3. 형식의 용이성
4. 저항성
5. 짙은 색깔
6. 시대상의 반영
Ⅳ. 아리랑의 세계화
1. 외교관과 선교사에 의한 전파
2. 한국전쟁, 참전 군인들에 의한 전파
3. 프랑스 폴모리와 북한 최성환의 아리랑
4. 장르 확산과 능동적인 세계화 주도
Ⅴ. 맺으며
※ 참고 문헌

본문내용

영화의 여주인공 신일선 여사가 영화 촬영장소는 그 곳이 아니고 지금의 고려대학교 앞 야산이었다는 분명한 주장으로 영화와의 관련성은 전혀 없다 하겠다.
둘째 설은 호사가들의 얘기로 1930년대 정릉에 자리 잡은 일본인 유치의 요정과 일부 지역을 유원지화 하기 위해 길을 내고 그 고개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이름을 ‘아리랑 고개’라고 지어 유포시켰다는 설이다.
이 두 설이 이제까지 아리랑 고개 작명 경위였는데, 최근 ‘아리랑 고개’ 이름을 자신이 지었다는 주장을 남긴 이가 있어 주목된다. 제 4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현재 대학입시학원으로 유명한 정일(正一)학원 설립자인 홍봉진 선생이다. 그는 자신의 일대기인 ‘양촌일지’에 1929년 당시 과거 숭인면장을 지낸 갑부집에서 과외지도를 할 때 아리랑 고개에 자신이 간판을 걸었다고 밝혔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하루는 김씨가 정릉이 지금은 산간벽지지만 수석이 깨끗하고 삼각의 영봉을 배경으로 해서 멀지 않은 장래에 좋은 주택지가 될 텐데, 이 일대를 일반에게 널리 소개하기 위하여 요리집을 시작하겠으며, 그 집의 이름을 상춘원이라고 하겠으니 나에게 그 광고문을 지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그 위치를 안내하기 위하여 동대문 밖 삼선평을 지나 신흥사 옆으로 ‘아리랑 고개’를 넘으면 옥수 청류가 흐르는 시냇가에 기암과 청송으로 울을 삼아 깨끗이 지어 놓은 상춘원을 찾아 오시면 미주를 값싸게 대접하여 드리겠다는 광고문을 써 주었다. 사실인즉 아리랑 고개라는 이름은 내가 마음대로 지은 이름이다. 학교를 마치고 해질 녘에 자전거를 타고 신흥사 들어가는 길을 지나 고갯길로 올라서면 후미진 고갯길을 굽어보는 노송이 있고 그 위에는 당집이 있었다. 캄캄한 그 고갯길을 지나려면 소름이 오싹 끼치는 후미진 곳이다. 길을 안내하려고 건너 편 소나무 가지에다가 ‘아리랑 고개’라고 페인트 글씨를 쓴 조그만 간판을 가로질러 매달았더니 광고를 보고 휴일날 소풍을 나온 시내 손님들이 이 고개를 넘다가 소나무에 매달린 간판을 보고 ‘아! 아리랑 고개가 여기로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까닭은 당시에 유명한 배우 나운규가 주연하던 <아리랑 고개>라는 영화에 나오는 아리랑 고개가 바로 이 고개였구나 하고 착각한 까닭이다. 1929년에 내가 가정교사 노릇을 잘 하기 위하여 멋대로 명명(命名)한 이름이 요사이 와서는 누구 한 사람 의심하는 사람이 없이 모두들 ‘아리랑 고개’ 하고 넘어 다닌다.”고 하였다.
그는 “내가 역사적으로 한 가지도 남겨 놓은 것이 없는데 이 ‘아리랑 고개’라는 이름만은 영원히 남게 되었다”고 하는 말로 끝을 맺었다. 국회의원이란 명예, 그리고 사업체로 학원을 남겼음에도 고개 이름을 명명한 것에 더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 것은 주장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것이라고 사료된다.
2. 음과 장단의 매력
청산별곡의 “얄리얄리 얄라성”과 같은 고대가요의 후렴을 분석한 결과 ‘아’ ‘이’ 음, 그리고 ‘’ ‘’ 음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를 통해 볼 때 이 음소들이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음소로 볼 수 있고 아리랑은 바로 그 음소의 결정체가 될 수 있다. 아/리/랑이란 장단은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박자로 울음소리인 으아앙이나 아이고-아이고의 세마치 장단을 닮아 있고, 친족어와 감탄사에도 세 음절이 많으며, 이 세마치 장단은 우리에게 흥과 신명을 돋궈 주는 중요한 요소이므로 아리랑이 세마치 장단으로 우리 성깔에 잘 맞아 떨어진다는 매력을 지녔다.
3. 형식의 용이성
벼개가 높거들랑 내 팔을 비고
아실아실 춥거들랑 내 품에 들게
<강릉 아라리>
청천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서울 아리랑>
삽교노 신마찌엔 게다짝소리
상해라 홍구공원에 폭탄소리
<광복군 아리랑>
정든 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빵긋
<밀양 아리랑>
울릉도 고개는 자물통 고개
한번 들어오면 나갈 줄을 모르네
<울릉도 아리랑>
이상의 여러 아리랑에서 보듯 아리랑은 기본적으로 2행(行) 1연(聯)에 후렴을 붙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형식은 듣기와 기억을 쉽게 하여 즉흥성을 촉발케 하는 잠재력이 강하다. 말하자면 즉흥부(노랫말)와 고정부(후렴)로 나누어 즉흥부만 담당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시가에서 두 줄 시형이 되는데, 이 경우 단순소박성과 안정성이 강조된다. 그래서 이런 형식은 민중의 신념이나 판단이 공유될 때 민간수사의 최소단위인 속담 같은 데에 사용된다. 예를 들면 속담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의 경우이다.
4. 저항성
아리랑에 있어서 저항성은 본래적인 성격일는지도 모른다. 수 많은 아리랑이 한결같이 시대에 저항하고 계급에 저항하고 사상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저항은 때론 목소리로만이 아닌 행동을 수반한 저항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서 아리랑을 저항의 노래라고도 하는데 고은 선생은 ‘아리랑은 피압박의 소산’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일본에 대한 저항으로 극단에서 다음과 같이 아리랑을 지어 불렀다.
일본대판 딸각바리 왜놈의 새끼
총칼을 찼다고 자랑을 마라
이순신 거북선이 두둥실 떴다 하면
죽다 남은 종자새끼들 몸살을 하리라
극단에서는 일본경찰이 알아 들을까봐 이 노랫말을 거꾸로 해서 불렀는데 술에 취한 일본경찰이 그 뜻을 모르고 나도 아리랑 부를 줄 안다며 거꾸로 된 노래를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왜정에 대한 저항은 민중들로서는 아리랑 이라는 무기 외에는 별로 없었던 터라 총독부는 이를 나돌지 못하게 했으나 아리랑은 그 억눌림에 반비례해서 더 저항적으로 속출했다.
우리집 시엄씨 염치도 좋지
저 잘난 걸 낳 놓고 날 데려왔나
데려나 왔으면 그냥이나 있지
날이면 날마다 콩볶듯 하네
조선의 육법은 총독부가 냈고
과부의 수절은 뉘 낸 법이냐
위의 아리랑은 조혼의 폐습시대와 과부 재가를 막았던 시대에 대한 저항이다. 이런 저항은 그 시대를 살던 여인네들의 공통된 심사였기에 시대의 공동작품으로 봐야 할 것이다.
5. 짙은 색깔
저놈의 가시내 눈매를 보소
겉눈만 감고서 속눈은 떴네
저 건너 저 가시네 속곳 밑 보아라
대목장 볼라고 홍당목 졌네
갈보라 하는 것이 씨종자가 있는가
놈사정 볼라다 내가 떼갈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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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0.02
  • 저작시기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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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82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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