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1.1 무비판적으로 읽고 있는 삼국지
1.2 삼국지 재해석 연구 대상
1.3 삼국지 재해석을 통한 새로운 시각 발견
2. 삼국의 역사 재평가 필요성
2.1 패자들의 기록인 삼국지
2.2 “삼국지”에 나타난 재평가 가능성
3. 삼국지 에 나타난 승자,패자적 요소
3.1 위국의 패자적 요소
3.1.1 조조의 태생적인 한계
3.1.2 거대체제로 인한 충성심 미흡
3.1.3 위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진나라건국
3.2 촉국의 패자적 요소
3.2.1 유비의 태생적인 한계
3.2.2 향토색이 불분명한 촉국
3.2.3 중국 본토내에서의 촉국의 위치적 불리함
3.3. 오국이 가지는 승자적 요소
3.3.1 손씨가문의 태생적인 이점
3.3.2 강력한 지배체제
3.3.3 가장 오래된 통치기간
3.4. 삼국의 승자,패자적 요소비교
3.4.1 삼국의 정통성 비교
3.4.2 현대인의 입장에서의 오국의 승자적 요소
4. “新 삼국지“ 의 필요성
4.1 소설 “삼국지” 에 대한 비판적 시각 필요
4.2 새로운 시각에 따른 “삼국지“의 필요성
5. 결론
5.1 요약
5.2 전망
6. 참고문헌
1.1 무비판적으로 읽고 있는 삼국지
1.2 삼국지 재해석 연구 대상
1.3 삼국지 재해석을 통한 새로운 시각 발견
2. 삼국의 역사 재평가 필요성
2.1 패자들의 기록인 삼국지
2.2 “삼국지”에 나타난 재평가 가능성
3. 삼국지 에 나타난 승자,패자적 요소
3.1 위국의 패자적 요소
3.1.1 조조의 태생적인 한계
3.1.2 거대체제로 인한 충성심 미흡
3.1.3 위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진나라건국
3.2 촉국의 패자적 요소
3.2.1 유비의 태생적인 한계
3.2.2 향토색이 불분명한 촉국
3.2.3 중국 본토내에서의 촉국의 위치적 불리함
3.3. 오국이 가지는 승자적 요소
3.3.1 손씨가문의 태생적인 이점
3.3.2 강력한 지배체제
3.3.3 가장 오래된 통치기간
3.4. 삼국의 승자,패자적 요소비교
3.4.1 삼국의 정통성 비교
3.4.2 현대인의 입장에서의 오국의 승자적 요소
4. “新 삼국지“ 의 필요성
4.1 소설 “삼국지” 에 대한 비판적 시각 필요
4.2 새로운 시각에 따른 “삼국지“의 필요성
5. 결론
5.1 요약
5.2 전망
6.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 패업의 기초를 만들었다. 형제로는 형 순연(荀衍), 동생 순심(荀諶)이 있고, 자식으로는 순운(荀운), 조카로는 순유(荀攸)가 있었다.
과 같은 가장 고위장수와의 불화로 그를 죽이거나 그들이 도리어 봉기하는 등의 난리를 겪는다.하지만 손씨가문은 안으로는 정치의 수완이 탁월한 시중들이 있어 그러한 난리를 거의 겪지 않는다.오나라 후대에 잠시 제갈각에 의해 왕위 계승시 난리를 겪지만 그것도 손씨 종친에 의해 쉽사리 진압당한다.한 일화로 고육지계라는 사건이 있다. 부하의 충심과 군주의 믿음이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전술이다. 병법의 대가였던 조조도 고육지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후한말(後漢末)에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형주(荊州)의 유비(劉備)가 연합하여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대군을 맞아 싸우는 적벽전투(赤壁戰鬪)에서 쓰여진 계책으로 제몸을 상해가면서까지 꾸며내는 방책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어려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계책을 말함 , 고육책은 간첩을 이용하여 역정보를 흘린 계책이었으므로 소위 반간고육계[反間苦肉計]라고도 하며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적벽대전의 승리로 손권은 강남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유비는 파주(巴州)와 촉주(蜀州)를 얻었으며 촉왕조(蜀王朝)를 세우는데 기초가 되었다.
만큼은 알아채지 못하고 적벽에서의 참패를 맞았다.
3.3.3 가장 오래된 통치기간
손씨가문은 진나라가 멸망시키기 전까지 중국 본토의 남동쪽을 다스렸다. 실제로 오나라가 건국년도를 기준으로 삼으면 삼국 중 가장 늦을 수가 있다. 물론 독자적인 연호를 칭한것까지 하면 7년정도 더 느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통치기간 자체로 보면 가장 오랜 통치기관이다. 자신의 세력기반인 양주,예주를 후한 말 196년부터 건업 오의 도읍 말릉(陵:현재의 南京)
(말릉)에서 거병하였다. 그 당시 국호는 오나라가 아니었다. 후에 221년에 정확한 건국을 하고 229년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오나라도 (거의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이) 종국(宗國)에는 제갈씨의 반역으로 위기를 맞고 그 위기를 틈타 두예가 처들어왔다. 그런데 이러한 오나라의 멸망이 진정한 의미의 패배가 아닐지 모른다. 그 때 오나라 땅에서는 이미 전쟁은 피하자는 의식이 민중들 사이에서 일어났다고 한다.오의 황제도 전쟁없이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한다. 의미없는 전쟁을 피한 오의 황제(손호)도 승자적인 기질은 충분하다.
3.4. 삼국의 승자 , 패자적 요소비교
3.4.1 삼국의 정통성 비교
위와 같이 삼국 군주는 제 각기 특색있는 출신이었다. 황족의 원척이었던 유비, 환관의 양아들이었던 조조 , 최고의 병법가의 자손 손견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후에는 모두 황제를 칭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제일 먼저 조조가 한나라의 연호를 부정하고 위를 건국하면서 독자적인 연호를 처음 사용하였다. 이는 전 왕조를 부정하는 반역적인 성격이 강했다 . 한나라가 기운이 쇄했다고 하나 독자적인 군주들은 모두 한황실의 부흥을 외칠 때 조조는 보기좋게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렸다 . 분명히 정통성에서는 문제가 있었다 . 이런 위나라의 행위에 대하여 유비는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유비 그 자신도 헌제 [獻帝, 181~234] : 후한(後漢) 최후의 황제(재위 189∼220). 황건의 난을 비롯한 농민반란과 환관 ·관료 ·외척 ·지방호족의 세력다툼으로 서울인 뤄양[洛陽]과 창안[長安] 사이를 방황하였다. 조조(曹操)의 옹립을 받았지만 이미 실권은 없었고,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에게 양위함으로써 후한은 멸망하였다.
를 옹립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황제에 오르는 악행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헌제가 축출되었지만 병사할때까지 살아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황실의 부흥을 이야기하지만 자신도 자기 이익을 채우려고 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 이에 비해서 손씨가문은 조조가 황제를 칭할 때 반역세력을 몰아낼 수 있는 명분과 헌제도 옹립하지 않고 비정상적인 촉한을 건국한 유비를 몰아낼 수 있는 명분 둘다 가지는 것이다.
3.4.2 현대인의 입장에서의 오국의 승자적 요소
가장 원론적인 질문을 해보고 싶다 . 승자라는 것은 이기는 것이다.삼국지 연의나 정사 삼국지를 통해서 가장 많은 승리를 가진 나라는 물론 위나라이다. 그러나 최고의 승률은 오나라이다 . 정사 삼국지에서도 오나라가 지는 전투는 합비전투를 제외하고는 서술되어있지 않다 . “소리없이 강한” 그런 승자가 오나라인 것이다.이 외에도 진수가
과 같은 가장 고위장수와의 불화로 그를 죽이거나 그들이 도리어 봉기하는 등의 난리를 겪는다.하지만 손씨가문은 안으로는 정치의 수완이 탁월한 시중들이 있어 그러한 난리를 거의 겪지 않는다.오나라 후대에 잠시 제갈각에 의해 왕위 계승시 난리를 겪지만 그것도 손씨 종친에 의해 쉽사리 진압당한다.한 일화로 고육지계라는 사건이 있다. 부하의 충심과 군주의 믿음이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전술이다. 병법의 대가였던 조조도 고육지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후한말(後漢末)에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형주(荊州)의 유비(劉備)가 연합하여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대군을 맞아 싸우는 적벽전투(赤壁戰鬪)에서 쓰여진 계책으로 제몸을 상해가면서까지 꾸며내는 방책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어려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계책을 말함 , 고육책은 간첩을 이용하여 역정보를 흘린 계책이었으므로 소위 반간고육계[反間苦肉計]라고도 하며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적벽대전의 승리로 손권은 강남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유비는 파주(巴州)와 촉주(蜀州)를 얻었으며 촉왕조(蜀王朝)를 세우는데 기초가 되었다.
만큼은 알아채지 못하고 적벽에서의 참패를 맞았다.
3.3.3 가장 오래된 통치기간
손씨가문은 진나라가 멸망시키기 전까지 중국 본토의 남동쪽을 다스렸다. 실제로 오나라가 건국년도를 기준으로 삼으면 삼국 중 가장 늦을 수가 있다. 물론 독자적인 연호를 칭한것까지 하면 7년정도 더 느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통치기간 자체로 보면 가장 오랜 통치기관이다. 자신의 세력기반인 양주,예주를 후한 말 196년부터 건업 오의 도읍 말릉(陵:현재의 南京)
(말릉)에서 거병하였다. 그 당시 국호는 오나라가 아니었다. 후에 221년에 정확한 건국을 하고 229년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오나라도 (거의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이) 종국(宗國)에는 제갈씨의 반역으로 위기를 맞고 그 위기를 틈타 두예가 처들어왔다. 그런데 이러한 오나라의 멸망이 진정한 의미의 패배가 아닐지 모른다. 그 때 오나라 땅에서는 이미 전쟁은 피하자는 의식이 민중들 사이에서 일어났다고 한다.오의 황제도 전쟁없이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한다. 의미없는 전쟁을 피한 오의 황제(손호)도 승자적인 기질은 충분하다.
3.4. 삼국의 승자 , 패자적 요소비교
3.4.1 삼국의 정통성 비교
위와 같이 삼국 군주는 제 각기 특색있는 출신이었다. 황족의 원척이었던 유비, 환관의 양아들이었던 조조 , 최고의 병법가의 자손 손견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후에는 모두 황제를 칭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제일 먼저 조조가 한나라의 연호를 부정하고 위를 건국하면서 독자적인 연호를 처음 사용하였다. 이는 전 왕조를 부정하는 반역적인 성격이 강했다 . 한나라가 기운이 쇄했다고 하나 독자적인 군주들은 모두 한황실의 부흥을 외칠 때 조조는 보기좋게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렸다 . 분명히 정통성에서는 문제가 있었다 . 이런 위나라의 행위에 대하여 유비는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유비 그 자신도 헌제 [獻帝, 181~234] : 후한(後漢) 최후의 황제(재위 189∼220). 황건의 난을 비롯한 농민반란과 환관 ·관료 ·외척 ·지방호족의 세력다툼으로 서울인 뤄양[洛陽]과 창안[長安] 사이를 방황하였다. 조조(曹操)의 옹립을 받았지만 이미 실권은 없었고,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에게 양위함으로써 후한은 멸망하였다.
를 옹립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황제에 오르는 악행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헌제가 축출되었지만 병사할때까지 살아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황실의 부흥을 이야기하지만 자신도 자기 이익을 채우려고 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 이에 비해서 손씨가문은 조조가 황제를 칭할 때 반역세력을 몰아낼 수 있는 명분과 헌제도 옹립하지 않고 비정상적인 촉한을 건국한 유비를 몰아낼 수 있는 명분 둘다 가지는 것이다.
3.4.2 현대인의 입장에서의 오국의 승자적 요소
가장 원론적인 질문을 해보고 싶다 . 승자라는 것은 이기는 것이다.삼국지 연의나 정사 삼국지를 통해서 가장 많은 승리를 가진 나라는 물론 위나라이다. 그러나 최고의 승률은 오나라이다 . 정사 삼국지에서도 오나라가 지는 전투는 합비전투를 제외하고는 서술되어있지 않다 . “소리없이 강한” 그런 승자가 오나라인 것이다.이 외에도 진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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