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가사의 정의 중 ‘서민 작가’와 ‘비판적 성향’의 서민의식이 과연 타당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조선 후기의 사회상과 서민가사 분류 작품들의 특성을 통해 살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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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민가사의 정의 중 ‘서민 작가’와 ‘비판적 성향’의 서민의식이 과연 타당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조선 후기의 사회상과 서민가사 분류 작품들의 특성을 통해 살펴보시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갑민가>를 통해 살펴본 작가 문제
1) <갑민가(甲民歌)>의 내용과 표현수법
2) <갑민가(甲民歌)>작품으로 살펴본 작자층
3) <갑민가(甲民歌)>가 지어졌을 당시의 사회상으로 본 작자층
2. 서민가사 작품 어휘 사용으로 살펴본 작가 문제
3. 비판의식으로 주장 되는 서민의식 문제

Ⅲ. 결론

* 참고 문헌

본문내용

사는 사람)과 어떤 생원과 함께 등장한다. 생원의 말에 대응하여 갑산민의 발언이 행해지고 있는 작품구조 상, 비록 작가가 의도하는 바의 비중은 갑산민의 발언 쪽에 더 있다 하더라도 생원도 갑산민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있었던 인물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작자가 두 인물의 대화를 엿들었던 적이 있거나 혹은 두 인물 중 어느 한편의 경험을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는 <갑민가>의 두 화자가 단순히 창조적 상상력의 결과로 형상화된 허구적 인물이라기보다는, 현실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형상을 드러낸 인물로 보아야 한다는 판단을 배경으로 한다. 따라서 이 가사의 작가는 두 인물의 경험적 사실을 접했던 어떤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생원과 갑산민의 사연을 접하고 가사화한 인물, 즉 작가의 계층성은 어떠했을까가 문제이다. 두 화자 중 한 사람은 생원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갑산민은 사족 출신으로서 당대 향촌사회 지배력의 행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출신배경을 지니고 있다. 결국 <갑민가>는 농민의 이해 뿐 아니라 하층 사족층의 이해도 아울러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타 현실비판가사와 동시기에 지어졌고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님으로써 그 결과 이 가사들의 유형적 특질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근거 위에서 <갑민가>의 작자는 현실비판가사의 작자층과 동일한 계층으로 파악할 수 있다. 현실비판가사의 작자층에 소속되어 동일한 사회적 성격을 지님으로써 공통의 의식과 세계관을 지닐 수 있었던 인물, 즉 지방하층사족층에 의해 <갑민가>가 지어졌다고 할 수 있다.
3) <갑민가>가 지어졌을 당시의 사회상으로 본 작자층
갑산민은 스스로 자기 가문이 원래 갑산읍에서 좌수, 별감, 풍헌, 감관 등 향임직과 유사, 장의 등의 향교직을 맡았던 사족층 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갑산민 일가는 군역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그런데 “애슬푸다 내시절의 원수인의 모해로서 군사강정 되단말가”의 구절에서 말하였듯이 갑산민 당대에 이르러 일가가 군역을 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수인의 모해’로 표현된 것의 내막에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이곳 변방 지역의 극심한 매향 풍조가 배경으로 깔려 있었을 것이다. 한편, 조선 후기 수취제도는 각 향촌사회를 중심으로 공동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갑산민은 자기가 살고 있는 갑산지방을 떠나 인읍인 북청으로 간다고 하였다. 그곳에서는 대소가가 고루 군액을 분담하여 많아야 삼량오전을 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작품의 작자인 갑산민은 자신이 사족층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와서 군역에 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그가 조선 후기 사회신분제의 동요 과정에서 향촌 내 지배력의 행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소외계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족출신인 갑산민의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일반 농민의 처지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갑민가>는 조선 후기 변방지역의 사회 신분제의 극심한 혼란과 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위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서민가사로 분류되어 있지만 이 작품의 작자인 갑산민은 서민이 아닌 사족층 이었다가 밀려난 잔반계층이다. 또 <갑민가>가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것은 서민이 가진 사회비판이 아니라 양반이었던 갑산민이 과도한 징세와 수취제도의 문제, 관리들의 수탈에 대해 불만을 갖고 쓴 가사작품이다. 서민가사가 아니더라도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나타난 가사들은 대부분이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즉, 이것은 서민가사가 담고 있는 내용적인 특징이 아니라 당시의 전반적인 분위기였을 것이다. 따라서 서민가사를 서민이 쓴 것인지에 대한 파악도 불분명한 작품을 넣거나,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해서 무조건 서민가사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성급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2. 서민가사 작품의 어휘 사용으로 살펴본 작가 문제
앞서서는 <갑민가> 한 작품을 통해서 과연 서민가사의 작가는 서민인가에 대한 물음에 하나의 지적을 해보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서민가사 텍스트 안에서 사용된 언어들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과연 서민가사 안에 분류되어져 있는 작품들이 서민이 창작한 가사인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당시의 문화는 양반들만이 향유하던 문화들이 서민들에게 확산되면서 서민들도 양반들이 누리던 문화 예술에 참여하게 된다. 때문에 서민문학이 등장하고 서민가사도 이러한 시기에 창작되고 향유된 것들로 생각되어 진다. 그런데 비록 서민들의 문화나 의식이 향상되고 교육이 확대되었다고는 하나 양반 문학과는 그 차이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특히나 가장 큰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한자의 사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대부가 지은 시가 중에서도 한자를 사용하고 있지 않은 시가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당시 한자라는 것이 양반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으며 또한 한자 자체가 한글에 비해 어려운 글자이기에 상당한 지식 수준을 가진 사람만이 한자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음은 분명한 것이라 생각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한자가 사용되어지기는 하나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이 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음을 본다면 신분사회가 무너지고 서민의식과 교육이 성장했던 시기라 하더라도 현재보다 교육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폐쇄적이었을 당시에 한자를 자유자재로 향유할 수 있었던 사람은 양반이거나 혹은 아무리 그 신분을 낮게 친다 해도 여항인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자 사용 여부만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양반 사대부들 시가의 특징을 떠올려보자. 굳이 예시를 들지 않아도 우리 시가 중 유난히 양반시가의 경우에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거나 유교 사상이 나타나는 작품들이 많다. 이에 반해 서민시가의 경우는 중국 문화나 유교 사상이 나타나는 작품은 거의 드물다. 설령 나타난다 해도 유교 사상에 있어서 당연히 여겨지는 충(忠)신(信)효(孝)등에 관련된 작품들 외에는 그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또한 이는 다르게 본다면 서민 문화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적게 받았기에 한자의 사용 역시 적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崑崙山 린脈의 五嶽이 中興니
天下名山 分排고 無數江山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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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1.26
  • 저작시기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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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96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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