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고대모델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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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그리스 고대모델의 몰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그리스 고대모델의 몰락에 관한 내용입니다. 헤렌과 니부어 중심으로

본문내용

적 방법론에 대한 문화적ㆍ인종적ㆍ세속적 오만(이는 그 이후 계속해서 고대사 서술에 해악을 미쳤다)을 드러내면서, 힉소스 이전으로 기록된 13개 왕조가 이집트인에 의해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이집트인은 “아브라함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동방 민족의 기질에 따라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자 했다”는 것이다.
니부어가 자유롭고 창조적인 그리스인과 이집트인(“억압받는 다수의 사람이 그러하듯, 상당히 진보된 기술을 지니고는 있지만 지적 문화는 여전히 뒤처져 있는”)을 범주적으로 구분한 것 또한 낭만주의적 인종주의의 양태에 속했다. 그는 또한 페니키아인이 뿌리 없는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낭만주의의 규범을 크게 거스르는 이러한 주장은, 물론 낭만주의적 시오니즘이 승리를 거둘 때까지 반유대적 용도로 사용된 것이었다. 니부어가 그의 사교 모임에서 점증하던 반유대주의를 공유했다는 점도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했듯이 니부어는 고대 모델을 유지했다. 그는 볼프를 공격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스인에게 미친 동방 민족의 영향이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과장되었다고 … 인정하면서 볼프는 그리스와 동방 사이에 관계가 존재했으며, 그리스인이 비록 나중에는 독립적이었지만 초기에는 동방 민족에서 영향과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무시한다.
니부어는 케크롭스의 아테네 정착에 관한 신화가 그곳에 미친 이집트의 영향을 어떤 식으로든 반영한다고 믿었다. 아르골리스와 관련된 다나오스와 아이깁토스의 전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카드모스의 테베 건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한편 그의 이러한 주장은 수세적인 논조를 띠었다. 이는 볼프와 그의 사상, 그리고 1820년대에 볼프를 추종한 켈 오트프리트 뮐러의 영향 탓이었음에 틀림없다.
* 참고사항
프리지아인 BC 1250년경부터 또 다시 외부로부터의 침략이 시작되어 히타이트족과 미케네의 그리스인들이 발전시킨 문명은 철저히 파괴된다. 그 결과 이들에 대한 기록들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재난으로 트로이 유적 7층도 피해를 입었다. 이 침략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3,400년 뒤 호머가 <일리아드>를 저술하면서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BC 800년경 아나톨리아로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프리지아인일 것이다. 트라제에서 이주해 온 이들은 터키 중심부와 서부를 포괄하는 지역에 왕국을 건설하였다.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를 사용하였으며, 페니키아 알파벳에서 유래한 문자를 사용했다. 이 문자는 에스키세히르 남부에 위치한 미다스 시에 세워진 기념비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프리지아의 역대 수도였던 미다스 시와 고르디움에서 비록 유물을 발굴하지는 못했지만, 기록보관소는 갖추어져 있었다. 고르디움은 앙카라에서 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지역에 위치해 있다. 앞서 말한 대로, 두 유적지에서 문서 자료를 하나도 찾아내지 못 했지만, 이것은 아마도 프리지아인은 더 이상 점토판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추정한다. 그러나 프리지아가 완전히 원시 시대 국가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들을 그리스인들의 시각을 통해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당시 몇 백 년 동안에 걸쳐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에 정착했고, 점차 지중해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도시를 덮고 있는 고르디움의 모래언덕은 엄청난 양의 각각 다른 층이 쌓여 있다. 이곳에서 거대한 고르디우스 왕의 무덤은 1957년에 발굴되었다. 대단히 호화스러웠지만 금괴는 하나도 없었다. 프리지아인은 라디아인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 후 리디아인들은 사르디스를 기반으로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다. 고전주의 시대 그리스인이 출현하면서 터키 연안은 엄청난 부과 지적 교양을 만끽하는 천 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리디아인들은 터키 서부를 BC 650년부터 약 100년간 지배했다. 이 시기 이들은 이웃한 그리스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스에는 오늘날까지 ‘크로이소스 만큼 부유하다’라는 표현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만큼 그리스인들은 리디아인의 부에 경외심을 품고 있었다. 크로이소스(BC 561-546)는 리디아의 마지막 왕이었다. 페르시아인 대 그리스인 BC 546년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리디아를 침략하여 점령하고, 크로이소스를 인질로 삼았다. 키루스와 그의 후계자인 다리우스, 크세르크세스 역시 정복 활동에 힘을 쏟았다. 이들은 지금의 이란에 해당하는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에서 출발하여 에게 해를 향해 영토를 확장해 갔다. 결국 페르시아의 힘에 굴복한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에 훗날 페르시아 태수가 파견되어 일대를 다스렸다. 페르시아는 영토의 중심인 4군데에 태수를 파견했으며, 사르디스도 그 중 한곳이었다…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국가는 초기 교육의 중심이었던 곳으로, BC 700년경에 호머가 태어난 나라로 추정된다. 이오니아인들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숨 막히고 억압적이라고 생각하며 혐오했으나, 200년이 훨씬 지난 뒤인 BC 334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출현하기 전까지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인은 파괴적인 성향으로 악명이 높았다… BC 494년에 소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페르시아인은 밀레투스를 초토화시켰다. 당시의 밀레투스는 초기 이오니아 도시국가 중에서 가장 눈부신 번영을 이룬 곳이다. 한편 리키아 해안에 위치한 크산토스의 주민들은 페르시아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륙지방의 상황은 좀 낫다고 할 수 있다.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시기의 유물은 극소수만이 전해져 시대의 공벽을 드러낸다. 그 중 만야스 호 부근의 에르길리에서 출토된 돌기둥 세 점이 가장 유명한 유물이다. 이 세 점의 둘기둥은 BC 4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페르시아의 통치는 분명 도시국가의 성장을 저해시켰으나 완전히 멈추지는 못했다. 아나톨리아 해안 지역의 각 고장 사람들은 자치적으로 제도를 규정 했으며, 극장이나 목욕탕과 같은 진보된 공공시설을 마련하여 마을을 번성시키는 데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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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8.11.28
  • 저작시기2008.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97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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