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 문화대혁명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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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 중국 문화대혁명에 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문화대혁명의 발단 배경

Ⅱ.문화대혁명의 시작

Ⅲ.홍위병과 전국 대동란

Ⅳ.문화대혁명의 성격

본문내용

타도를 외쳤다. 이것이 전국을 진동시킨 7.20사건이다.
7.20사건이후 임표, 강청 등은 즉시 이를 반혁명 사건, 반혁명 정변이라 하고 무한군구의 책임자 뒤에는 서향전이 있다고 공격하였다. 또한 임표, 강청 등은 왕력이 북경공항에 도착하자 대대적인 환영회를 열고, 또한 25일에 천안문광장에서 백만인대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하였다. 여기에서 공개적으로 무한의 조반파를 지지하고 진재도등이 무한군구의 군직에서 해직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이때 사상자가 18만 4천명이나 되었다.
Ⅳ.文化大革命의 性格
1.탈권투쟁
1962년 이래 당 최고 지도자 간에 대약진 운동을 중심으로 한 내외정책을 입안, 수립, 실천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정책적 갈등과 대립으로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된 모택동과 그 추종자들이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유소기, 등소평 등의 실무파들이 당내에서 자본주의를 배양하여 평균주의에 입각한 혁명정신을 부패시키고 또 진정한 사회주의 실현을 바라고 있는 혁명 대중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관제 청소년 반란을 선동, 유도하여 일으킨 정풍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문화대혁명은 문예, 학술, 교육에 대한 정풍운동이 아니라 모택동과 추종자들이 문화 대혁명을 통해서 실무파에게서 정권을 되찾은 일종의 탈권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2.실무파의 세력일소
1968년 10월에 개최된 당중앙 공장회의에서 유소기는 건국 이전부터의 배신자, 스파이로 단죄되어 당적을 박탈당한 채 1969년 11월 개봉의 옥중에서 비참하게 병사하고, 등소평은 당적은 유지하였으마 통촌에 추방되었으며, 팽덕회, 하룡, 오함 등은 모두 고문에 의해 사망하고 실무파에 속하는 黨, 政, 軍 및 지방인사들까지 모두 반혁명 수정주의자로 지목되어 숙청되었다.
3.혁명이념파의 승리
관제 홍위병의 동원과 광란에 의해 실무파를 제거한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은 1969년 4월 제9회 전국 대표 대회를 북경에서 개최, 임표가 당부주석, 강생, 진백달이 정치국 상무위원, 강청이 정치국원의 요직을 차지하고 임표를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명하는 이례적 당규정을 삽입하였다.
4.근대화의 후퇴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인물의 희생, 사회의 혼란과 파괴는 중국의 근대화를 20년 내지 30년 후퇴시켰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강정식, 세계문화사, 형설출판사, 1995.
신승하, 중국당대 40년사(1949-1989), 고려원, 1993.
조승한(역), 중국사, 역민사,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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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1.28
  • 저작시기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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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97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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