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생들이 뿔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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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본론
1. 장의(掌議)와 색장(色掌)
2. 권당(捲堂)
3. 반중잡영에서 본 권당.
4. 조선왕조실록에서 본 권당

결론 및 소감

참고자료

본문내용

(食堂)에 들어가지 않았다. 임금이 본관 당상(本館堂上)을 보내어 며칠 동안 권유하니, 재생들이 그제서야 도로 들어가서 수재(守齋)하였다.
이것이 다는 아니만 대체적으로 이럴 때 권당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외에 다른 것을 보자면 황감제(黃柑製)를 거부한 재임(齋任)을 정거(停擧)시킨 이유로 권당을 한 적도 있고, 영조가 성균관 유생들의 게으름을 책망하는 하교에 권당 한 일도 있다. 그런데 권당을 했다고 해서 받아들여 진 일도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한 적도 있다. 윗글 중 영조 43년에 도승지 송형중의 대한 글이 있는데 송형중의 해임을 원했으나 임금은 해임시키지 아니하고 이후 대사헌으로 임명되었다. 받아들인 경우는 경종 즉위년 9월에는 윤지술 조선 후기 유생(儒生). 1715년(숙종 41) 노론의 권상하가 소론의 상소로 삭직되자, 권상하의 신구를 상소하였다.
의 상소에 임금이 정배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유생들의 권당으로 그 명을 정지시켰다.
- 결론 및 소감
다시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상을 하면서 이번에는 권당이라는 주제 하나로 글을 썼다. 요새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촛불집회에서 착안을 했는데, 유생들은 지금의 지식인과 같은 역할을 했다. 학문에 매진을 하면서도 국가에 어떠한 부당한 일이 있을 때면 다 같이 나서서 권당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권당을 한다고 해서 유생들이 원하는 것이 다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권당을 함으로서 자신들의 의지를 강하게 보여준다. 자유와 평등을 외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도 한 나라의 우두머리에게 나서서 몸을 희생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왕권시대에 지금보다 더욱 엄격하게 예를 중시하는 사회 속에서 그러한 주장을 한다는 것은 큰 용기가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면으로 보면 단순한 대학생은 아니었다. 대학생이상의 역할과 지위가 있었다. 현재의 공무원과 비슷하다. 나라에서 주는 직급이 있고, 녹을 받는 그러한 신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생의 자신의 맡은 바를 충실히 하면서도 자신의 주장도 용기 있게 펼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되자.
<참고자료>
이민홍, 조선조 성균관의 교원과 태학생의 생활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99
한국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목차
서론
본론
1. 장의(掌議)와 색장(色掌)
2. 권당(捲堂)
3. 반중잡영에서 본 권당.
4. 조선왕조실록에서 본 권당
결론 및 소감
참고자료
  • 가격1,500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9.01.02
  • 저작시기2008.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12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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