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전]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관계,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와 제2차 세계대전 기원, 제2차 세계대전 성격,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경제 분석(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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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계대전]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관계,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와 제2차 세계대전 기원, 제2차 세계대전 성격,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경제 분석(세계대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관계

Ⅲ.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
1. 최후통첩(7월 23일)
2. 전쟁의 시작

Ⅳ.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
1. 사회적 배경
2. 패션의 경향

Ⅴ.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와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1. 베르사유체제
2. 국제연맹
3. 대공황
4. 나치즘
5. 뮌휀 협정

Ⅵ. 제2차 세계대전의 성격

Ⅶ.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경제
1. 자본주의국가의 경제실태
1) 영국
2) 프랑스
3) 독일
4) 미국
5) 아시아지역
2. 사회주의국가의 경제실태
1) 소련
2) 동구지역

참고문헌

본문내용

다. 공업부문에서는 덩치만 크고 진동이 심한 증기기관 대신에 생산규모에 따라 크기나 위치를 자유로이 변경시킬 수 있는 전기모터가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호황은 모든 산업부문에서 일률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석탄생산, 건설공업, 피혁공업 등의 제부문과 특히 농업부문은 정체하거나 쇠퇴하고 있었다. 미국농업은 1920년에 이르기까지는 착실하게 발전하였다. 특히 전시의 농업발전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미국농업은 결정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주로 외국시장과 국내시장의 축소에 의해서 초래되었다. 이와 같은 산업 간의 발전의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의 미국의 성장은 급속한 것이었다. 공업생산은 1921년에 비해 1929년에는 거의 1.9배 증가하였고 1인당 국민소득은 1.4배 증가하였다. 20년대의 미국경제는 모든 자본주의 경제에서 가장 발전하여 20년대의 번영을 누렸다.
5) 아시아지역
종전 직후, 아시아극동의 주요 지역에 있어서는 광공업의 붕괴, 식량생산의 감퇴, 상업작물의 황폐, 격심한 인플레이션의 진행 등의 배경을 한 피점령지역의 도처에서의 내전, 군사적 분쟁 등이 야기되었기 때문에 구식민제국은 민족독립투쟁의 물결에 휩쓸려 경제적 부흥이 크게 지연되었다. 즉, 아시아의 공업국인 일본의 생산은 전후 괴멸상태에 빠져 공업생산지수가 1937년을 100으로 기준하여 1945년에 38, 1946년에 19, 1947년에 25에 불과했으며, 오직 인도만이 1946년에 109, 1947년에 106으로 전쟁전의 수준을 상회했다. 곡물생산 또한 이 지역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게 되어 1947년의 쌀 및 주식용곡물 순수입이 368만여 톤에 달하였다. 아시아의 중요 산업인 면직사생산은 전쟁전의 약 1/3로 저하되고 목화생산 또한 전쟁전의 180만 톤보다 약 1/3이 감소되었다. 또한 중요수출상품이었던 원료상품의 생산은 전후 수출시장의 재개에 따라 회복되는 방향으로 나섰으나, 어떤 것은 합성제품의 출현으로 타격을 받고 어떤 것은 전시 중에 급격히 발전된 새로운 산지의 출현으로 시장분야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아시아의 이와같은 경제부흥부진은 수출입무역에 여실히 반영되고 있어 아시아극동제국의 무역총액은 전후 현저한 입초현상으로 나타내고 있다.
수입은 식량 기타의 긴급수입에 의하여 비교적 고수준에 있는 반면 수출은 엄청나게 떨어졌다. 특히 대미수입의 급증에 반하여 일본무역의 격감과 인지의 미곡수출감퇴로 인하여 아시아 극동지역 내 무역의 비중은 격감되고 있다. 다만 파운드지역의 제국은 대외채무가 감소되어 거꾸로 파운드 잔고를 축적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영국정부가 1945년에 식민지개발 후생법을 발동하여 영제국영사에 자금을 할당하거나 또는 부흥자금을 공여한 것 등에 기인한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와 일본 등은 미국의 군사지출과 점령비 등에 의하여 국제수지를 지탱하여 왔다.
2. 사회주의국가의 경제실태
1) 소련
소련은 전쟁 중 공장의 동부이전과 군수생산 유지에 전력을 다하였으나 공업생산의 저하를 면치 못하였다가, 1947년에 이르러 소비재 및 일반중공업의 증산으로 1945년의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소련의 경제건설은 전쟁으로 인하여 10개년의 후퇴를 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농업부문 역시 곡창 우크라이나, 북코카사스의 황폐와 전후 연속된 흉작으로 난경에 처하여 1945년의 곡물생산은 전쟁전의 56%에 머물고 가축은 전쟁전의 수준에 비하여 50%로 저하되고 있었다. 소련의 곡물생산은 1947년에야 비로소 추곡의 호황으로 9,650만톤, 1948년에는 12,000만톤, 1949년에는 11,900만 톤으로 회복되었다. 공업생산 또한 1946년 1월에 채택된 이른바 국민경제부흥발전 5개년계획에 따라 1950년의 공업생산을 1940년의 148%로 끌어올린다는 목표하에 석탄은 이미 전쟁전의 수준에 도달하였고, 철강, 시멘트는 1948년 중에 도달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이와 같은 생산의 회복을 배경으로 하여 1947년 말에는 통화개혁을 단행하고, 동시에 전표제가 폐지되고 단일가격에의 교차가 실시됨으로써 소비물가의 평균가격수준은 약 30%가 저하되었다.
2) 동구지역
소련에 의하여 해방된 동구제국, 즉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유고, 알바니아, 체코 및 헝가리는 체코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공업은 비교적 발달되지 않은 농업국이었다. 이들 여러 나라에 있어서는 토지개혁이 단행되는 동시에 산업국유화에 의한 사회주의경제이행이 그 단기 계획하에 착수되었다. 그러나 이들 나라의 농업회복은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전후 3년 동안의 흉작에서 풍작을 맞이한 1948년에 있어서도 전쟁전의 수준을 10.3 내지 12%정도 하회하는 형편이었다. 이밖에 유고슬라비아는 1947년 11월 말로서 39년의 수준과 비교하여 106%로 상승하였다. 1947년부터 전통적인 동·서구 무역이 점차 회복되었으나 전쟁 전에 압도적인 거래국이던 독일의 탈락으로 전쟁전의 수준에 도달하기에는 힘들었으며, 1948년에 들어 곡물, 목재, 석탄 등의 수출이 본격적으로 재개된 것 역시 미국의 전략물자금수가 있는가 하면 동년의 동구측이 막대한 출초로 끝나 이것은 파운드지역으로부터의 수입결제로 돌렸던 실정이었다. 1947년 9월의 코민포름결성은 서구측의 마셜플랜에 대항하여 경제적으로도 사회주의 나라들의 결속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 1947년 여름부터 1948년도에 걸쳐 소련과 동구제국간의 통상협정 및 동구제국 상호간의 통상협정이 연달아 성립되었다는 사실에 이들 공산권경제건설과정의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진웅, 냉전의 역사, 1945~1991, 비봉출판사, 1999
·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 A.J.P. Taylor, 제2차세계대전의 기원, 지식의 풍경, 2003
· Eric Hobsbawn, 제국의 시대, 한길사, 2001
· Michael Howard, 20세기의 역사, 가지않은 길, 2000
· Nye, Joseph S, 국제분쟁의 이해: 이론과 역사, 한울, 2000
· Paul Kennedy,강대국의 흥망, 한국경제신문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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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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