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경주지도
2. 나정(羅井:신라의 우물)
3. 오릉(=사릉(蛇))
4. 대릉원
4-1. 첨성대
4-2 천마총 금관(국보 188호 : 외관)
4-3 천마총 요패(벨트: 국보 190호)
4-4 첨마총 금모(외관, 내관)
4-5 황남대총의 남분(남자 무덤)
4-6 북분에서 나온 금관
4-7 금관총 귀거리
4-8 천마총 유리잔
4-9 스웨덴 구스타프황태자가 방문한 서봉총 발굴현장(1926년)
4-10 서봉총 금관
4-11 대릉원 조성시 미추왕 지구에서 발견된 보검
4-12 대릉원 조성시 미추왕 지구에서 발견된 유리병
4-13 목걸이
4-14 목걸이에 있는 상감유리구슬 확대 모습
4-15 토우장식 장경호(국보 195호)
5 첨성대(국보 31호)
6. 분황사탑(국보 30호)
7. 태종무열왕릉비(29대 : 국보 25호)
8. 원성왕릉(38대)
9. 문무대왕암(30대)
10. 안압지
10-1 안압지 내 수로 비슷한 것...
11.감은사지
12. 김유신장군묘
13.에밀레종(국보 29호)
14 불국사
14-1 청운교, 백운교
14-2 금동비로자나불(국보 26호 )
14-3 아미타여래(국보 27)
14-4 다보탑(국보 20)
14-5 석가탑
15 석굴암(1913년에 찍은 사진)
15-1 불상
16. 남산(금오산)
16-1 백률사 약사여래금동불(국보 28호)
16-2 이차돈 순교비(백률사)
17. 양동민속마을
17-1 해제 이연적 선생의 사랑채
17-2사당(위패를 모신)
17-3 손씨 집
18. 옥산서원
18-1 독락당
19.수막쇠
2. 나정(羅井:신라의 우물)
3. 오릉(=사릉(蛇))
4. 대릉원
4-1. 첨성대
4-2 천마총 금관(국보 188호 : 외관)
4-3 천마총 요패(벨트: 국보 190호)
4-4 첨마총 금모(외관, 내관)
4-5 황남대총의 남분(남자 무덤)
4-6 북분에서 나온 금관
4-7 금관총 귀거리
4-8 천마총 유리잔
4-9 스웨덴 구스타프황태자가 방문한 서봉총 발굴현장(1926년)
4-10 서봉총 금관
4-11 대릉원 조성시 미추왕 지구에서 발견된 보검
4-12 대릉원 조성시 미추왕 지구에서 발견된 유리병
4-13 목걸이
4-14 목걸이에 있는 상감유리구슬 확대 모습
4-15 토우장식 장경호(국보 195호)
5 첨성대(국보 31호)
6. 분황사탑(국보 30호)
7. 태종무열왕릉비(29대 : 국보 25호)
8. 원성왕릉(38대)
9. 문무대왕암(30대)
10. 안압지
10-1 안압지 내 수로 비슷한 것...
11.감은사지
12. 김유신장군묘
13.에밀레종(국보 29호)
14 불국사
14-1 청운교, 백운교
14-2 금동비로자나불(국보 26호 )
14-3 아미타여래(국보 27)
14-4 다보탑(국보 20)
14-5 석가탑
15 석굴암(1913년에 찍은 사진)
15-1 불상
16. 남산(금오산)
16-1 백률사 약사여래금동불(국보 28호)
16-2 이차돈 순교비(백률사)
17. 양동민속마을
17-1 해제 이연적 선생의 사랑채
17-2사당(위패를 모신)
17-3 손씨 집
18. 옥산서원
18-1 독락당
19.수막쇠
본문내용
.위 산을 기단으로 삼은 탑은 최근 복원한 잠늠골 삼층석탑과 늠비봉 오층석탑에서도 나타날 뿐만 아니라, 초기 왕궁지였던 창림사지(昌林寺址) 삼층석탑과 남산리 사지(寺址) 서삼층석탑에 이르러서는 상층기단부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의 조각으로 나타나고 있다. 팔부중상은 사천왕(四天王)의 장수(將帥)이니 탑의 기단부가 수미산이 되는 것이다.
남산에 있는 불교유적의 가치는 자연과의 조화와 다양성에 있다.
편편한 바위가 있으면 불상을 새기고, 반반한 터가 있으면 절을 세우고, 높은 봉이 있으면 탑을 세우되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조성하였다. 비록 바위 속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믿고 있어도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에 적정하지 않으면 불상을 새기지 않고 예배하였으며, 절을 세워도 산을 깎고 계곡을 메운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신라인들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바위 속에 있는 부처를 보고, 정(釘)을 들고 바위 속에 숨어 계신 부처님을 찾아낸 것이다.
남산은 자연과 예술이 조화되어 산 전체가 보물이니 세계에 그 유례가 없다. 남산을 아니 보고 어찌 경주를 보았다 할 것이며, 몇 번 오르고 어찌 남산을 안다고 할 것인가?
남산에는 왕릉 13기, 산성지(山城址) 4개소, 사지(寺址) 147개소, 불상 118체, 탑 96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 672점의 문화유적이 남아 있으며, 이들 문화유적은 보물 13점, 사적 13개소, 중요민속자료 1개소 등 44점이 지정되어 있고, 2000년 12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보호받고 있다.
16-1 백률사 약사여래금동불(국보 28호)
팔이 없고 약통을 들고 있었을 것이라고 예측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의 백률사에 있던 것을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것이며, 전체 높이 1.77m의 서 있는 불상으로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지 않은 편이며, 둥근 얼굴·긴 눈썹·가는 눈·오똑한 코·작은 입 등에서는 우아한 인상을 풍기고 있지만, 8세기 중엽의 이상적인 부처의 얼굴에 비해 긴장과 탄력이 줄어든 모습이다.
커다란 체구에 비해 어깨는 약간 빈약하게 처리된 느낌이지만 어깨의 굴곡은 신체에 밀착된 옷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 팔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으며 앞가슴에는 치마의 매듭이 보인다.
앞면에는 U자형의 주름을 연속적인 선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금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중후해지며 옷자락들도 무거워 보이는데, 이것은 불쑥 나온 아랫배와 뒤로 젖혀진 상체와 더불어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없어졌으나 손목의 위치와 방향으로 보아 오른손은 위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그릇이나 구슬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지만 신체의 적절한 비례와 조형기법이 우수하여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16-2 이차돈 순교비(백률사)
521년 불교가 신라에 승인되게함
법흥왕때 불교를 승인하려고 했으나 귀족의 반대가 심했었다. 그때 법흥왕의 고민을 안 이차돈이 자신이 불교를 믿고 있다고 하고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 처형을 당하기 전 “만약 내가 죽을 때 목이 잘리면 기이한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불교를 공인해달라‘라고 말한다. 그 후 목을 치니까 흰 피가 솟아오르고 하늘에서 꽃잎이 떨어지고 지진이 일어나 불교를 승인하게 된다.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지 290년이 지난 A.D.818년(憲德王 10년)에 세운 6면 비석이다. 이 비석의 5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글씨를 새겼으나 마멸이 심하여 읽기 어려운 실정이다.
6면 중 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즉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는 흰 피가 솟아 오르는 장면이 좁은 석면(石面)에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차돈의 순교장면을 살펴보면 머리에는 고깔같은 모자를 썼고, 저고리는 거의 무릎아래까지 내려왔으며, 바지는 현대의 여자 작업복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이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남성의 복식(服飾)을 엿볼 수 있다.
17. 양동민속마을
경주손씨 여강이씨 집성촌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경주시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경주손씨 대종가가 5백년 동안 종통을 잇는 유서깊은 양반마을이다.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양반가옥과 초가 160호가 집중되어 있다. 경주손씨와 여강이씨의 양가문에 의해 형성된 토성마을로 손소와 손중돈, 이언적을 비롯하여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하였다.
마을은 안계(安溪)라는 시내를 경계로 동서로는 하촌(下村)과 상촌(上村), 남북으로는 남촌과 북촌의 4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돌담길이 이어지며, 전통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을 비롯하여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주변에 이언적의 낙향지인 독락당과 장기갑등대박물관, 감포항, 동해 등의 관광지가 있다.
17-1 해제 이연적 선생의 사랑채
이연적 선생이 1496-1550년에 머문 곳으로 조선초기의 성리학자로 대제앙까지 오른 동방오현 중 하나이다. 여주이씨(여광이씨)이지만 아버지가 경주 손씨 집안으로 장가를 와서 이연적이 태어난 곳이자 자란곳이다. 500년 이상 된 곳으로 18대 자손이 현재 살고 있다.
17-2사당(위패를 모신)
국가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은 왕이 사당을 짓는 것을 허가하였다. 단청칠을 하였는데 원래 개인은 할 수 없다.
17-3 손씨 집
언덕 위에 있으며 口자형으로 생겼다. 서백당(참을 인자를 100번
남산에 있는 불교유적의 가치는 자연과의 조화와 다양성에 있다.
편편한 바위가 있으면 불상을 새기고, 반반한 터가 있으면 절을 세우고, 높은 봉이 있으면 탑을 세우되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조성하였다. 비록 바위 속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믿고 있어도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에 적정하지 않으면 불상을 새기지 않고 예배하였으며, 절을 세워도 산을 깎고 계곡을 메운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신라인들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바위 속에 있는 부처를 보고, 정(釘)을 들고 바위 속에 숨어 계신 부처님을 찾아낸 것이다.
남산은 자연과 예술이 조화되어 산 전체가 보물이니 세계에 그 유례가 없다. 남산을 아니 보고 어찌 경주를 보았다 할 것이며, 몇 번 오르고 어찌 남산을 안다고 할 것인가?
남산에는 왕릉 13기, 산성지(山城址) 4개소, 사지(寺址) 147개소, 불상 118체, 탑 96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 672점의 문화유적이 남아 있으며, 이들 문화유적은 보물 13점, 사적 13개소, 중요민속자료 1개소 등 44점이 지정되어 있고, 2000년 12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보호받고 있다.
16-1 백률사 약사여래금동불(국보 28호)
팔이 없고 약통을 들고 있었을 것이라고 예측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의 백률사에 있던 것을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것이며, 전체 높이 1.77m의 서 있는 불상으로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지 않은 편이며, 둥근 얼굴·긴 눈썹·가는 눈·오똑한 코·작은 입 등에서는 우아한 인상을 풍기고 있지만, 8세기 중엽의 이상적인 부처의 얼굴에 비해 긴장과 탄력이 줄어든 모습이다.
커다란 체구에 비해 어깨는 약간 빈약하게 처리된 느낌이지만 어깨의 굴곡은 신체에 밀착된 옷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 팔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으며 앞가슴에는 치마의 매듭이 보인다.
앞면에는 U자형의 주름을 연속적인 선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금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중후해지며 옷자락들도 무거워 보이는데, 이것은 불쑥 나온 아랫배와 뒤로 젖혀진 상체와 더불어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없어졌으나 손목의 위치와 방향으로 보아 오른손은 위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그릇이나 구슬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지만 신체의 적절한 비례와 조형기법이 우수하여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16-2 이차돈 순교비(백률사)
521년 불교가 신라에 승인되게함
법흥왕때 불교를 승인하려고 했으나 귀족의 반대가 심했었다. 그때 법흥왕의 고민을 안 이차돈이 자신이 불교를 믿고 있다고 하고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 처형을 당하기 전 “만약 내가 죽을 때 목이 잘리면 기이한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불교를 공인해달라‘라고 말한다. 그 후 목을 치니까 흰 피가 솟아오르고 하늘에서 꽃잎이 떨어지고 지진이 일어나 불교를 승인하게 된다.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지 290년이 지난 A.D.818년(憲德王 10년)에 세운 6면 비석이다. 이 비석의 5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글씨를 새겼으나 마멸이 심하여 읽기 어려운 실정이다.
6면 중 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즉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는 흰 피가 솟아 오르는 장면이 좁은 석면(石面)에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차돈의 순교장면을 살펴보면 머리에는 고깔같은 모자를 썼고, 저고리는 거의 무릎아래까지 내려왔으며, 바지는 현대의 여자 작업복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이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남성의 복식(服飾)을 엿볼 수 있다.
17. 양동민속마을
경주손씨 여강이씨 집성촌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경주시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경주손씨 대종가가 5백년 동안 종통을 잇는 유서깊은 양반마을이다.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양반가옥과 초가 160호가 집중되어 있다. 경주손씨와 여강이씨의 양가문에 의해 형성된 토성마을로 손소와 손중돈, 이언적을 비롯하여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하였다.
마을은 안계(安溪)라는 시내를 경계로 동서로는 하촌(下村)과 상촌(上村), 남북으로는 남촌과 북촌의 4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돌담길이 이어지며, 전통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을 비롯하여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주변에 이언적의 낙향지인 독락당과 장기갑등대박물관, 감포항, 동해 등의 관광지가 있다.
17-1 해제 이연적 선생의 사랑채
이연적 선생이 1496-1550년에 머문 곳으로 조선초기의 성리학자로 대제앙까지 오른 동방오현 중 하나이다. 여주이씨(여광이씨)이지만 아버지가 경주 손씨 집안으로 장가를 와서 이연적이 태어난 곳이자 자란곳이다. 500년 이상 된 곳으로 18대 자손이 현재 살고 있다.
17-2사당(위패를 모신)
국가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은 왕이 사당을 짓는 것을 허가하였다. 단청칠을 하였는데 원래 개인은 할 수 없다.
17-3 손씨 집
언덕 위에 있으며 口자형으로 생겼다. 서백당(참을 인자를 10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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