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한국사편지 1권
2. 한국사편지 2권
3. 한국사편지 3권
2. 한국사편지 2권
3. 한국사편지 3권
본문내용
수나라 양제는 백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장군 을지문덕은 치고 빠지면서 지치게 하여 마침내 평양성 근처까지 도착했을 때 시 한편으로 철수를 하게 만들어 ‘뒷북’을 시작한다. 아무 준비 안한 수나라는 전멸되었고, 수 양제는 그 후로도 몇 번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살수 대첩이 있은지 32년 만에 당 태종이 정예군 10만 명을 이끌고 안시성을 포위했는데, 성주 양만춘의 지휘 아래 안시성은 88일 만에 당나라를 물리친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나이 82세, 475년 백제 공격을 시작했다. 고구려군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했고 7일 만에 북성이 함락되자 개로왕은 동생 여도를 신라로 보내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구원군이 도달하기도 전에 남성은 고구려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개로왕은 왕비와 왕자와 함께 아차 산성으로 끌려가 몰살당했다. 뒤늦게 도착한 동생 여도는 사태 수습을 위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문주왕은 수도를 멀리 남쪽에 있는 웅진(충남 공주)로 옮겼다.
백제는 삼국 중에 가장 넒은 평야지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쌀농사에 유리했고, 또 남서해안은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백제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문화를 꽃피웠다. 유교 경전에 통달한 학자들을 오경박사라고 하는데 박사 1호 고흥은 왕명을 받고 최초의 백제 역사책인 <서기>를 썼다. 불교에서는 미륵사 목탑이 백제 기술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목탑은 오늘날 남아있지 않다. 백제의 이름난 기술자들은 다른 나라로 초청받았고 신라의 황룡사 9층탑은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가, 석가탑과 다보탑도 백제의 기술자 아사달이 만들었다. 백제의 학자들과 승려들, 기술자들은 일본에 건너가 문화와 예술을 전해줬다.
백제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긴 후, 재기를 위해 힘을 기르다 마침내 신라군과 연합해서 고구려를 공격한 끝에 한강 일대를 되찾았다. 그러나 신라가 나·제 동맹을 끊고 한강을 빼앗아버린다. 이 일로 백제가 잠시 주춤했지만 우리에게 ‘서동요’라 알려진 무왕이 강력한 힘과 세련된 문화를 자랑하게 되지만, 뛰어난 무왕과는 달리 아들 의자왕이 백제를 멸망하게 만든다.
법흥왕이 강력한 왕권을 위해 신라에 불교가 들어올 때, 귀족들이 반발하자 이차돈이 이를 알고 법흥왕을 위해 절을 지으려다 명을 안받았다는 이유로 죽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고 땅이 진동하여 꽃비가 내렸다 하여 짓던 절을 완성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늘날 일본의 오사카 근처에 있는 ‘나라’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손꼽히는 호류 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일본의 쇼토쿠 태자가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은 절인데 고구려, 신라, 백제에서 기술자들이 많이 건너갔는데 특히 백제에서 많은 기술자가 갔다. 불교, 유교, 그리고 한자 또한 백제가 전수해 주었고 백제의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삼국 시대에 결혼을 할 때는 패물을 주지 않았고 신부측에서 집 뒤에 따로 집을 짓고 사위가 그 집에서 살다가 아이를 낳고 아이가 다 자라면 신랑집으로 간다.
신라에는 신분 제도인 ‘골품제’가 있었는데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신분을 그대로 이어받게 되는 것이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쳐들어왔다. 백제의 계백 장군은 결사대 5천 명을 이끌고 5만 명의 신라군을 막기 위해 황산벌로 나갔다. 전쟁터에 나가기 전 백제가 승리할 수 없다는 것과 포로로 잡히면 적의 노비가 될 걸 알고 계백 장군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칼로 벤다.
황산벌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백제군 앞에서 신라군이 주춤하다가 신라 장군 김흠순은 아들 반굴을, 장군 김품일도 아들 관창을 내보내 싸우게 했지만 결국 죽게 되었다. 이걸 본 신라군은 사기가 올라 거침없이 계백의 결사대를 무찌르고 마침내 백제가 망한다. 신라가 백제 영토를 차지한 뒤 나당연합군은 그 기세로 고구려로 쳐들어간다.
처음에 수도 평양성을 포위하고 싸웠지만 연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들의 권력다툼과 내부 분열로 고구려는 멸망한다. 그리고 흔히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다고 하지만 통일신라의 영토에는 고구려의 영토가 들어가지 않고 고구려 멸망 약 20년 뒤인 발해가 세워지면서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이제 발해로 들어가보자. 지금 ‘대조영’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되는 프로그램은 발해 건국에 대한 것이다. 발해는 대조영이 건국했으며 엄연히 우리나라 역사이다. 학자들은 처음에 발해를 우리나라 역사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발해가 우리 역사라는 것을 깨닫고 교과서에도 나오기 시작했다.
대조영은 동모산 기슭에 성과 궁궐을 짓고 처음에는 ‘진국’이라고 나라 이름을 지었다. 세력을 점차 넓혀가면서 돌궐과 신라와 동맹을 맺으며 당나라를 토벌하고 국토를 넓혔다. 그러나 망하지 않는 나라 없었듯이 발해가 230년 동안 지속된 후인 926년 거란이 발해의 수도 상경 용천부를 포위했고 왕 대인선은 겨우 며칠만에 항복하고 말았다. 발해 역시 내부분열로 멸망하고 말았다.
2. 한국사편지 2권
이제 2권, 후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에 대한 내용이다. 통일 신라가 점점 부패하기 시작하자 여러 지방에서 호족(재산이 많고 세력이 강한 집안)들이 일어나 계속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고, 그리고 신라는 점점 망해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양길의 부하였다가 양길을 배신하고 세력을 넓히고 있던 궁예와 그 궁예 밑으로 들어간 송악의 호족 왕륭과 그 아들 왕건, 그리고 백제를 세운 견훤이었다.
궁예는 901년, 민심을 얻은 때에 ‘고려’라고 했다. ‘후고구려’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실은 ‘고구려’를 ‘고려’로 바꾼 것은 장수왕 이후부터인데 그 전에는 모두 ‘고구려’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려는 왕건과 다른 장수들의 힘으로 영토를 넓히고 있었다. 그러나 궁예가 자신을 미륵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을 ‘관심법’으로 가차없이 죽였고 그 사이에는 자신의 아내와 두 아들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왕건도 죽을 뻔 하였으나 최웅의 도음으로 살아난다. 결국 보다 못한 장수들이 왕건을 중심으로 궁예를 내
고구려의 장수왕은 나이 82세, 475년 백제 공격을 시작했다. 고구려군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했고 7일 만에 북성이 함락되자 개로왕은 동생 여도를 신라로 보내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구원군이 도달하기도 전에 남성은 고구려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개로왕은 왕비와 왕자와 함께 아차 산성으로 끌려가 몰살당했다. 뒤늦게 도착한 동생 여도는 사태 수습을 위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문주왕은 수도를 멀리 남쪽에 있는 웅진(충남 공주)로 옮겼다.
백제는 삼국 중에 가장 넒은 평야지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쌀농사에 유리했고, 또 남서해안은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백제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문화를 꽃피웠다. 유교 경전에 통달한 학자들을 오경박사라고 하는데 박사 1호 고흥은 왕명을 받고 최초의 백제 역사책인 <서기>를 썼다. 불교에서는 미륵사 목탑이 백제 기술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목탑은 오늘날 남아있지 않다. 백제의 이름난 기술자들은 다른 나라로 초청받았고 신라의 황룡사 9층탑은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가, 석가탑과 다보탑도 백제의 기술자 아사달이 만들었다. 백제의 학자들과 승려들, 기술자들은 일본에 건너가 문화와 예술을 전해줬다.
백제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긴 후, 재기를 위해 힘을 기르다 마침내 신라군과 연합해서 고구려를 공격한 끝에 한강 일대를 되찾았다. 그러나 신라가 나·제 동맹을 끊고 한강을 빼앗아버린다. 이 일로 백제가 잠시 주춤했지만 우리에게 ‘서동요’라 알려진 무왕이 강력한 힘과 세련된 문화를 자랑하게 되지만, 뛰어난 무왕과는 달리 아들 의자왕이 백제를 멸망하게 만든다.
법흥왕이 강력한 왕권을 위해 신라에 불교가 들어올 때, 귀족들이 반발하자 이차돈이 이를 알고 법흥왕을 위해 절을 지으려다 명을 안받았다는 이유로 죽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고 땅이 진동하여 꽃비가 내렸다 하여 짓던 절을 완성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늘날 일본의 오사카 근처에 있는 ‘나라’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손꼽히는 호류 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일본의 쇼토쿠 태자가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은 절인데 고구려, 신라, 백제에서 기술자들이 많이 건너갔는데 특히 백제에서 많은 기술자가 갔다. 불교, 유교, 그리고 한자 또한 백제가 전수해 주었고 백제의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삼국 시대에 결혼을 할 때는 패물을 주지 않았고 신부측에서 집 뒤에 따로 집을 짓고 사위가 그 집에서 살다가 아이를 낳고 아이가 다 자라면 신랑집으로 간다.
신라에는 신분 제도인 ‘골품제’가 있었는데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신분을 그대로 이어받게 되는 것이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쳐들어왔다. 백제의 계백 장군은 결사대 5천 명을 이끌고 5만 명의 신라군을 막기 위해 황산벌로 나갔다. 전쟁터에 나가기 전 백제가 승리할 수 없다는 것과 포로로 잡히면 적의 노비가 될 걸 알고 계백 장군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칼로 벤다.
황산벌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백제군 앞에서 신라군이 주춤하다가 신라 장군 김흠순은 아들 반굴을, 장군 김품일도 아들 관창을 내보내 싸우게 했지만 결국 죽게 되었다. 이걸 본 신라군은 사기가 올라 거침없이 계백의 결사대를 무찌르고 마침내 백제가 망한다. 신라가 백제 영토를 차지한 뒤 나당연합군은 그 기세로 고구려로 쳐들어간다.
처음에 수도 평양성을 포위하고 싸웠지만 연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들의 권력다툼과 내부 분열로 고구려는 멸망한다. 그리고 흔히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다고 하지만 통일신라의 영토에는 고구려의 영토가 들어가지 않고 고구려 멸망 약 20년 뒤인 발해가 세워지면서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이제 발해로 들어가보자. 지금 ‘대조영’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되는 프로그램은 발해 건국에 대한 것이다. 발해는 대조영이 건국했으며 엄연히 우리나라 역사이다. 학자들은 처음에 발해를 우리나라 역사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발해가 우리 역사라는 것을 깨닫고 교과서에도 나오기 시작했다.
대조영은 동모산 기슭에 성과 궁궐을 짓고 처음에는 ‘진국’이라고 나라 이름을 지었다. 세력을 점차 넓혀가면서 돌궐과 신라와 동맹을 맺으며 당나라를 토벌하고 국토를 넓혔다. 그러나 망하지 않는 나라 없었듯이 발해가 230년 동안 지속된 후인 926년 거란이 발해의 수도 상경 용천부를 포위했고 왕 대인선은 겨우 며칠만에 항복하고 말았다. 발해 역시 내부분열로 멸망하고 말았다.
2. 한국사편지 2권
이제 2권, 후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에 대한 내용이다. 통일 신라가 점점 부패하기 시작하자 여러 지방에서 호족(재산이 많고 세력이 강한 집안)들이 일어나 계속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고, 그리고 신라는 점점 망해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양길의 부하였다가 양길을 배신하고 세력을 넓히고 있던 궁예와 그 궁예 밑으로 들어간 송악의 호족 왕륭과 그 아들 왕건, 그리고 백제를 세운 견훤이었다.
궁예는 901년, 민심을 얻은 때에 ‘고려’라고 했다. ‘후고구려’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실은 ‘고구려’를 ‘고려’로 바꾼 것은 장수왕 이후부터인데 그 전에는 모두 ‘고구려’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려는 왕건과 다른 장수들의 힘으로 영토를 넓히고 있었다. 그러나 궁예가 자신을 미륵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을 ‘관심법’으로 가차없이 죽였고 그 사이에는 자신의 아내와 두 아들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왕건도 죽을 뻔 하였으나 최웅의 도음으로 살아난다. 결국 보다 못한 장수들이 왕건을 중심으로 궁예를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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