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국 1당주의 원칙이었음에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사회주의자의 눈에는 김원봉이 단지 급진적 민족주의자나 비정통 사회주의자로 보였는지 모른다. 반면 보수적 민족주의자의 눈에는 사회주의자로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 모두 민중운동에 관심을 가졌음을 감안한다면, 김원봉을 사회주의자로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판단이라는 평가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김원봉은 정치적 판단력이나 논리체계로 무장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용솟음치는 기백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정열로 민족을 절대명제시한 무인적 체질의 인간형이었다. 좌우를 민족의 이름 아래 포용하는 그의 성향을 보수우익 진영에서는 공산주의자로, 공산주의자는 기회주의자로 매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결합하는 매개역할을 하면서, 다수 대중의 입장을 고수한 진보적 또는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을 시종했다. 따라서 해방 60년이 넘은 오늘 김원봉이 민족해방운동에서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통일독립국가 수립운동 과정에서 일관되게 견지한 민족통일전선운동은 한국 현대사에서 전면적으로 재조명하고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편가름 속에서 매몰되거나 왜곡된 인물이나 역사를 엄정한 잣대로 바로잡아야 우리의 잃어버린 민족역사를 총체적 민족사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2. 북한
북한의 역사에서도 그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민족해방운동사를 만주와 김일성 중심의 항일무장투쟁사으로 한정지은 이데올로기적 제약 때문에 북한의 역사도 그의 활동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다. 김원봉은 월북한 이후 국가검열상, 노동상, 당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직 등의 국가 요직을 거치며 북한 내에서 상당한 정치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8년 10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 해임과 동시에 공식석상에서 물러났는데 그 이후 김원봉에 대한 소식을 모두 끊겼다. 만약 명예퇴직 후 사망했다면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을 텐데 현재 애국열사릉에는 김원봉의 묘비가 없다.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는 1958년 12월 김원봉과 성주식이 국제간첩이란 죄목으로 숙청되었다고 밝혔다. 공산권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북한총람》에서도 김원봉이 1958년 11월 “임정파 숙청의 틈바구니에 끼어 도매금으로 숙청되었는데 죄목은 국제간첩이었다”고 전한다. 한편 조선의용대 출신으로 연변에서 문필가로 활동한 김학철 씨는 김원봉이 감옥에서 자살했다고 증언했으나 처형인지 자살인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결론
- 김원봉이 대한 나의 평가와 정리
김원봉은 철저한 민족주의자이자 애국자였다. 그의 모든 행동과 생각에서 1순위는 민족이었다. 그의 사상에는 사회주의적 요소와 아니키즘적인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바로 민족이었다. 그는 의열단을 이끌고 중국에서 활동할 때부터 좌익과 우익의 통일된 전선구축을 주장하였다. 해방된 이후에도 누구보다 좌우익의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했으나,‘민족을 위해서’라는 거짓으로 자신들을 포장하고 이익을 얻고자 한 몇몇 사람들로 인해 그의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통일된 조국이자 모든 인민들이 평화롭게 사는 나라였지 좌익과 우익의 구분은 아니였다. 그래서 약산 김원봉에 대한 현대 평가(남한)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보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사회주의자로, 정통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비정통 사회주의자로 비춰졌다. 그에게는 이념보다 나라와 민족이 우선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 뜨거운 가슴과, 또 누구보다 차가운 머리를 지닌 지도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 해나가는 과정을 봐왔기 때문에 그 가슴을 일제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 그리고 내 나라를 꼭 해방시키고 말겠다는 뜨거운 정열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약산은 단지 감정이 이성에 앞서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조심스러웠고 또 치밀했다. 일제시대 때 그들을 가장 두렵게 만들었던 의열단의 의백으로서 그는 철저하게 모든 일을 준비하고 성공시켰다. 모든 일제의 정보기관과 경찰들이 의열단을 잡기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그 때, 그런 파괴 암살운동을 성공시킨다는 것은 그가 사전에 얼마나 많은 생각들과 토의를 거쳤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일제가 가장 잡고 싶어했던 독립투사였으나 해방될 때까지 결국 체포하지 못하고 그의 뒤를 쫓아다녀야만 했던 그의 행적은 그의 평소의 성격과 행동을 잘 알 수 있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김원봉을 더 이상 역사속에 묻어 놓아서는 안된다. 그가 월북한 사실과 그의 사상에 중심된 이념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고난과 좌절의 연속이었던 일제 36년 식민지 기간동안 그는 우리 인민들이 그나마 숨쉬고 살게 해주었던 존재이자, 일제를 비롯한 중국의 국민당 정부에서 조차 인정하고 두려워했던 우리 조국의 자랑스런 지도자들 중 하나다. 어찌보면 아직까지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들의 후손이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지금, 항일 무장투쟁사에서 가장 커다란 족적을 남긴 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약산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그에 대한 업적에 대한 많은 연구 결과가 쏟아지고 있지만, 아직 그가 국가로부터 건국훈장 하나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참 씁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강대민, 『여성조선의용군박차정의사』, 서울: 도서출판 高句麗, 2004
김영범,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7
영임호, 『김원봉 연구 : 의열단, 민족혁명당 40년사』,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3
윤무한, 『인물대한민국사』, 파주: 나남출판, 2006
윤희진,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사 인물 이야기 』, 서울: 책과 함께, 2007
이원규, 『약산 김원봉』, 서울: 실천문학, 2005
『다음 백과사전』, (2007. 10. 5)
결론적으로 김원봉은 정치적 판단력이나 논리체계로 무장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용솟음치는 기백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정열로 민족을 절대명제시한 무인적 체질의 인간형이었다. 좌우를 민족의 이름 아래 포용하는 그의 성향을 보수우익 진영에서는 공산주의자로, 공산주의자는 기회주의자로 매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결합하는 매개역할을 하면서, 다수 대중의 입장을 고수한 진보적 또는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을 시종했다. 따라서 해방 60년이 넘은 오늘 김원봉이 민족해방운동에서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통일독립국가 수립운동 과정에서 일관되게 견지한 민족통일전선운동은 한국 현대사에서 전면적으로 재조명하고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편가름 속에서 매몰되거나 왜곡된 인물이나 역사를 엄정한 잣대로 바로잡아야 우리의 잃어버린 민족역사를 총체적 민족사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2. 북한
북한의 역사에서도 그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민족해방운동사를 만주와 김일성 중심의 항일무장투쟁사으로 한정지은 이데올로기적 제약 때문에 북한의 역사도 그의 활동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다. 김원봉은 월북한 이후 국가검열상, 노동상, 당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직 등의 국가 요직을 거치며 북한 내에서 상당한 정치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8년 10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 해임과 동시에 공식석상에서 물러났는데 그 이후 김원봉에 대한 소식을 모두 끊겼다. 만약 명예퇴직 후 사망했다면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을 텐데 현재 애국열사릉에는 김원봉의 묘비가 없다.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는 1958년 12월 김원봉과 성주식이 국제간첩이란 죄목으로 숙청되었다고 밝혔다. 공산권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북한총람》에서도 김원봉이 1958년 11월 “임정파 숙청의 틈바구니에 끼어 도매금으로 숙청되었는데 죄목은 국제간첩이었다”고 전한다. 한편 조선의용대 출신으로 연변에서 문필가로 활동한 김학철 씨는 김원봉이 감옥에서 자살했다고 증언했으나 처형인지 자살인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결론
- 김원봉이 대한 나의 평가와 정리
김원봉은 철저한 민족주의자이자 애국자였다. 그의 모든 행동과 생각에서 1순위는 민족이었다. 그의 사상에는 사회주의적 요소와 아니키즘적인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바로 민족이었다. 그는 의열단을 이끌고 중국에서 활동할 때부터 좌익과 우익의 통일된 전선구축을 주장하였다. 해방된 이후에도 누구보다 좌우익의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했으나,‘민족을 위해서’라는 거짓으로 자신들을 포장하고 이익을 얻고자 한 몇몇 사람들로 인해 그의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통일된 조국이자 모든 인민들이 평화롭게 사는 나라였지 좌익과 우익의 구분은 아니였다. 그래서 약산 김원봉에 대한 현대 평가(남한)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보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사회주의자로, 정통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비정통 사회주의자로 비춰졌다. 그에게는 이념보다 나라와 민족이 우선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 뜨거운 가슴과, 또 누구보다 차가운 머리를 지닌 지도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 해나가는 과정을 봐왔기 때문에 그 가슴을 일제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 그리고 내 나라를 꼭 해방시키고 말겠다는 뜨거운 정열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약산은 단지 감정이 이성에 앞서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조심스러웠고 또 치밀했다. 일제시대 때 그들을 가장 두렵게 만들었던 의열단의 의백으로서 그는 철저하게 모든 일을 준비하고 성공시켰다. 모든 일제의 정보기관과 경찰들이 의열단을 잡기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그 때, 그런 파괴 암살운동을 성공시킨다는 것은 그가 사전에 얼마나 많은 생각들과 토의를 거쳤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일제가 가장 잡고 싶어했던 독립투사였으나 해방될 때까지 결국 체포하지 못하고 그의 뒤를 쫓아다녀야만 했던 그의 행적은 그의 평소의 성격과 행동을 잘 알 수 있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김원봉을 더 이상 역사속에 묻어 놓아서는 안된다. 그가 월북한 사실과 그의 사상에 중심된 이념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고난과 좌절의 연속이었던 일제 36년 식민지 기간동안 그는 우리 인민들이 그나마 숨쉬고 살게 해주었던 존재이자, 일제를 비롯한 중국의 국민당 정부에서 조차 인정하고 두려워했던 우리 조국의 자랑스런 지도자들 중 하나다. 어찌보면 아직까지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들의 후손이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지금, 항일 무장투쟁사에서 가장 커다란 족적을 남긴 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약산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그에 대한 업적에 대한 많은 연구 결과가 쏟아지고 있지만, 아직 그가 국가로부터 건국훈장 하나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참 씁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강대민, 『여성조선의용군박차정의사』, 서울: 도서출판 高句麗, 2004
김영범,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7
영임호, 『김원봉 연구 : 의열단, 민족혁명당 40년사』,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3
윤무한, 『인물대한민국사』, 파주: 나남출판, 2006
윤희진,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사 인물 이야기 』, 서울: 책과 함께, 2007
이원규, 『약산 김원봉』, 서울: 실천문학, 2005
『다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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