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릿말
Ⅱ. 백운동서원의 성립과 발달
1. 백운동서원의 성립
2. 사액서원으로의 발전
Ⅲ. 백운동서원의 교육활동과 효과
1. 거접
2. 강회
3. 교육효과
Ⅳ. 맺음말
※참고문헌
소수서원 사진자료
Ⅱ. 백운동서원의 성립과 발달
1. 백운동서원의 성립
2. 사액서원으로의 발전
Ⅲ. 백운동서원의 교육활동과 효과
1. 거접
2. 강회
3. 교육효과
Ⅳ. 맺음말
※참고문헌
소수서원 사진자료
본문내용
는 것으로 거재라고도 하며, 향교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던 것이었다. 거접을 위해서 건물을 새로 마련하였고, 거접은 매년하며, 거접인원은 10명 이었다. 『소수서원등록』사문입의.
거접유생의 선발은 자료가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서원에 공부하러 오는 순서대로 받아들였을 것이며, 또는 백일장, 순제 등에서 성적이 우수한 사람을 뽑았을 가능성도 크다. 백운동서원의 거접인원은 10명이었다. 거접의 정원이란 총원이 아니라 거접기간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라는 의미이다. 즉 거접기간이 한달이고 보름마다 교체하여야 한다면 처음에 10명이 들어와 거접을 마치고, 다음 번에 다른 10명이 들어와 거접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거접유생들은 거접기간에 제술과 독서를 하면서 과거 준비를 하였다. 관아로부터는 공부나 과거 응시에 필요한 서책과 지필묵을 지급받기도 했다.
백운동서원이 사액을 받도록 한 이황은 주세붕이나 안현의 서원 운영 방침에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주세붕이 유생자격으로 생원, 진사를 우선한 것에 비해서 이황은 서원 입원자격을 과거와 관련지어 규정하는 것을 옳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거접을 하여도 제술에 치중토록 하는 등 서원이 과거 준비 장소가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사림들이 과거시험에만 힘을 쓰는 소인경향을 경계하고, 이황, 『퇴계전집』권42
거접은 서원 설립의 본뜻이 아니니 중지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이황, 『퇴계전집』권27
2. 강회
서원에서 벌어지는 강회는 매달 두 차례가 열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즉 매달 삭망에 원임과 유생들이 묘우에 나아가 향촉을 밝히는 삭망분향제가 있는데, 분향이 끝나고 유생들이 모여서 경전을 강독하였다. 이를 통독(通讀)이라고 한다. 삭망분향례를 거행하고, 이어 통독을 한 것은 향교의 모습을 따른 것이다. 주세붕이 서원을 세우면서 제례와 교육은 향교의 것을 거의 그대로 답습했던 것이다. 성적은 通略粗不의 네 등급으로 나누어 장부에 적어 참고자료로 삼는다. 성적이 나쁜 유생은 면책을 하고, 계속 성적이 나쁠 경우에는 강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쫓아낸다. 이유 없이 여러 번 강회에 불참하는 유생들도 강회에서 쫓아내고, 유림들의 모임에 일체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3. 교육효과
거접과 강회로 이루어지는 백운동서원의 교육활동과 성과는 과거가 기준이든 의리의 탐구이든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소수서원 『入院錄』에 의하면 원생의 생원, 진사 비율은 선조 이전까지는 46명/275명(16.7%), 선조 연간은 50/355(14%), 인조반정 이후는 20/105(19%)라고 한다. 이들 생원진사가 원생 입원의 전인지 후인지는 조사해 보아야 할 것이지만, 어쨌든 서원이 과거를 준비하는 학교기관으로 상당한 교육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Ⅳ. 맺음말
서원은 조선시대에 걸쳐 사림의 숭앙을 받아온 선현을 봉사하고 강학, 교육을 통해 수기치인의 학문을 목표로 설립된 사립 교육기관이었다. 그 중에서도 백운동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보통의 경우에 서원의 성립과 발달의 배경을 사화에 따른 사림파의 동향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의 성립의 배경에는 서원을 유향소와 사마소를 대신하는 향촌기구로 삼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또한 성리학을 풍기사림들에게 교육함으로써 향촌교화를 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운동서원은 거접과 강회를 통해서 뛰어난 교육효과를 보여주었다. 비록 이황은 서원의 교육이 과거시험에 집중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게 여겼으나 그 성과는 탁월했다.
※참고문헌
김동규(1997). 한국교육사. 서울: 교육과학사.
윤희면(2004). 조선시대의 서원과 양반. 경기도: 집문당.
이상해(1998). 서원. 서울: 기영내.
정찬용(2004). 한국의 경기지역 서원. 서울: 국학자료원.
조무남 외 2인(2003). 교육사 교육철학 강의. 서울: 동문사.
소수서원 장서각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한국 최초의 서원. 장서각은 오늘날의 대학 도서관으로 임금이 직접지어 하사하신 어제 내사본을 비롯
3천여 권의 장서를 보관하던 곳.
소수서원 강학당
소수서원 학구재
당시 소수서원에서 수학하는 학생을 위한 일종의 기숙사 건물로 사용되었다.
소수서원 성생단
문성공 회헌 안향 선생의 사당에 매년 봄, 가을(음력 3월, 9월) 초정일날 제사지낼 때 희생의 제물을 드리던 제단터이다.
소수서원 敬자바위
소수서원 주위를 흐르는 죽계천 건너에는 경(敬)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거접유생의 선발은 자료가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서원에 공부하러 오는 순서대로 받아들였을 것이며, 또는 백일장, 순제 등에서 성적이 우수한 사람을 뽑았을 가능성도 크다. 백운동서원의 거접인원은 10명이었다. 거접의 정원이란 총원이 아니라 거접기간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라는 의미이다. 즉 거접기간이 한달이고 보름마다 교체하여야 한다면 처음에 10명이 들어와 거접을 마치고, 다음 번에 다른 10명이 들어와 거접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거접유생들은 거접기간에 제술과 독서를 하면서 과거 준비를 하였다. 관아로부터는 공부나 과거 응시에 필요한 서책과 지필묵을 지급받기도 했다.
백운동서원이 사액을 받도록 한 이황은 주세붕이나 안현의 서원 운영 방침에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주세붕이 유생자격으로 생원, 진사를 우선한 것에 비해서 이황은 서원 입원자격을 과거와 관련지어 규정하는 것을 옳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거접을 하여도 제술에 치중토록 하는 등 서원이 과거 준비 장소가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사림들이 과거시험에만 힘을 쓰는 소인경향을 경계하고, 이황, 『퇴계전집』권42
거접은 서원 설립의 본뜻이 아니니 중지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이황, 『퇴계전집』권27
2. 강회
서원에서 벌어지는 강회는 매달 두 차례가 열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즉 매달 삭망에 원임과 유생들이 묘우에 나아가 향촉을 밝히는 삭망분향제가 있는데, 분향이 끝나고 유생들이 모여서 경전을 강독하였다. 이를 통독(通讀)이라고 한다. 삭망분향례를 거행하고, 이어 통독을 한 것은 향교의 모습을 따른 것이다. 주세붕이 서원을 세우면서 제례와 교육은 향교의 것을 거의 그대로 답습했던 것이다. 성적은 通略粗不의 네 등급으로 나누어 장부에 적어 참고자료로 삼는다. 성적이 나쁜 유생은 면책을 하고, 계속 성적이 나쁠 경우에는 강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쫓아낸다. 이유 없이 여러 번 강회에 불참하는 유생들도 강회에서 쫓아내고, 유림들의 모임에 일체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3. 교육효과
거접과 강회로 이루어지는 백운동서원의 교육활동과 성과는 과거가 기준이든 의리의 탐구이든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소수서원 『入院錄』에 의하면 원생의 생원, 진사 비율은 선조 이전까지는 46명/275명(16.7%), 선조 연간은 50/355(14%), 인조반정 이후는 20/105(19%)라고 한다. 이들 생원진사가 원생 입원의 전인지 후인지는 조사해 보아야 할 것이지만, 어쨌든 서원이 과거를 준비하는 학교기관으로 상당한 교육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Ⅳ. 맺음말
서원은 조선시대에 걸쳐 사림의 숭앙을 받아온 선현을 봉사하고 강학, 교육을 통해 수기치인의 학문을 목표로 설립된 사립 교육기관이었다. 그 중에서도 백운동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보통의 경우에 서원의 성립과 발달의 배경을 사화에 따른 사림파의 동향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의 성립의 배경에는 서원을 유향소와 사마소를 대신하는 향촌기구로 삼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또한 성리학을 풍기사림들에게 교육함으로써 향촌교화를 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운동서원은 거접과 강회를 통해서 뛰어난 교육효과를 보여주었다. 비록 이황은 서원의 교육이 과거시험에 집중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게 여겼으나 그 성과는 탁월했다.
※참고문헌
김동규(1997). 한국교육사. 서울: 교육과학사.
윤희면(2004). 조선시대의 서원과 양반. 경기도: 집문당.
이상해(1998). 서원. 서울: 기영내.
정찬용(2004). 한국의 경기지역 서원. 서울: 국학자료원.
조무남 외 2인(2003). 교육사 교육철학 강의. 서울: 동문사.
소수서원 장서각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한국 최초의 서원. 장서각은 오늘날의 대학 도서관으로 임금이 직접지어 하사하신 어제 내사본을 비롯
3천여 권의 장서를 보관하던 곳.
소수서원 강학당
소수서원 학구재
당시 소수서원에서 수학하는 학생을 위한 일종의 기숙사 건물로 사용되었다.
소수서원 성생단
문성공 회헌 안향 선생의 사당에 매년 봄, 가을(음력 3월, 9월) 초정일날 제사지낼 때 희생의 제물을 드리던 제단터이다.
소수서원 敬자바위
소수서원 주위를 흐르는 죽계천 건너에는 경(敬)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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