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영화 속의 ‘일본사’ 몇 장면
‘전쟁영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화면배치
‘다께다 신겐’, 그 빈 공간을 둘러싼 몇 가지 흐름들
전쟁 수행의 능력 - 소여의 정점?
실체의 증발, 그림자의 소멸
蛇足(군말)
영화 속의 ‘일본사’ 몇 장면
‘전쟁영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화면배치
‘다께다 신겐’, 그 빈 공간을 둘러싼 몇 가지 흐름들
전쟁 수행의 능력 - 소여의 정점?
실체의 증발, 그림자의 소멸
蛇足(군말)
본문내용
그림자의 경우는? 그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너무 많은 것을 흡수해버린 것이다. “모든 주어진 소여들을 흡수하는 자는 단지 하나의 이중체, 주인 또는 세계에 봉사하는 하나의 그림자”(들뢰즈)가 되고 만 것이다. 애초의 상태보다는 좋은 삶의 조건이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을 수밖에 없다. 그 상태에서 그가 돌파할 수 있는 탈주의 공간은 없다.!
1575.5.25. 나가시노 전투는 신겐과 신겐을 구성하는 것들이 모조리 소멸되는 대스펙터클이다. 먼저 기병들이 바람처럼 치달리는 모습이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되고, 그리고 총소리. 그 역동적 진격이 콩볶는 듯한 총소리로 끝나고, 갈대 숲에서 가슴을 쮜어뜯는 그림자와 본대의 당혹한 표정이 몽타쥬됨으로써 전쟁의 경로가 전달된다. 어쩌면 여기서 노부나가나 총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맞서 싸우는 적들이 아니라, 실체가 사라진 그림자들의 최후의 운명적 질주!. 그들은 신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 죽음의 행진 마지막에 노부카도의 얼굴이 크로즈업되면서 절망적인 몸짓으로 그림자가 들판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죽음. 물가에 다시 와 떠내려가는 깃발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서로 어긋나는 라스트 신. 화면을 채우는 깃발. 그것은 신겐, 그리고 그림자가 흡수하고자 했던, 그리고 타자들이 그에게서 욕망했던 기표, 그것이 아닐지. 그렇다면 그림자뿐 아니라, 신겐 자신 또한 하나의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아니, 우리 모두 역시!
蛇足(군말)
이런 견해는 어떤가? 이영화는 “권력 바깥에서 작은 자유의 영역을 구축했던 도둑이 그림자 무사로 신겐을 대리하면서 전도”가 일어나, “진심으로 권력에 충성스런 이데올로그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권력과 자신을 일체화하는 일본 민중의 국가주의적 경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 “일본을 통일로 이끌 이 근대적 힘이 곧 조선침략을 향해 몰려갈 것이라는 비판적 의식의 함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아시아의식의 결여에 있을 것.” 요컨대, “권력에 대한 숙명적 체관과 제휴하고 있는 아시아의식의 결락” 서남재단 심포, <동아시아를 다시 묻는다>에서 최원식, 한국 發 또는 동아시아 發 대안? : 한국과 동아시아, 999년 9.30 -10.1.
->민족과 민중이라는 척도. 하지만 이것은 구로사와가 제기한 탈근대적 질문들을 근대적 평면으로 환원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1575.5.25. 나가시노 전투는 신겐과 신겐을 구성하는 것들이 모조리 소멸되는 대스펙터클이다. 먼저 기병들이 바람처럼 치달리는 모습이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되고, 그리고 총소리. 그 역동적 진격이 콩볶는 듯한 총소리로 끝나고, 갈대 숲에서 가슴을 쮜어뜯는 그림자와 본대의 당혹한 표정이 몽타쥬됨으로써 전쟁의 경로가 전달된다. 어쩌면 여기서 노부나가나 총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맞서 싸우는 적들이 아니라, 실체가 사라진 그림자들의 최후의 운명적 질주!. 그들은 신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 죽음의 행진 마지막에 노부카도의 얼굴이 크로즈업되면서 절망적인 몸짓으로 그림자가 들판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죽음. 물가에 다시 와 떠내려가는 깃발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서로 어긋나는 라스트 신. 화면을 채우는 깃발. 그것은 신겐, 그리고 그림자가 흡수하고자 했던, 그리고 타자들이 그에게서 욕망했던 기표, 그것이 아닐지. 그렇다면 그림자뿐 아니라, 신겐 자신 또한 하나의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아니, 우리 모두 역시!
蛇足(군말)
이런 견해는 어떤가? 이영화는 “권력 바깥에서 작은 자유의 영역을 구축했던 도둑이 그림자 무사로 신겐을 대리하면서 전도”가 일어나, “진심으로 권력에 충성스런 이데올로그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권력과 자신을 일체화하는 일본 민중의 국가주의적 경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 “일본을 통일로 이끌 이 근대적 힘이 곧 조선침략을 향해 몰려갈 것이라는 비판적 의식의 함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아시아의식의 결여에 있을 것.” 요컨대, “권력에 대한 숙명적 체관과 제휴하고 있는 아시아의식의 결락” 서남재단 심포, <동아시아를 다시 묻는다>에서 최원식, 한국 發 또는 동아시아 發 대안? : 한국과 동아시아, 999년 9.30 -10.1.
->민족과 민중이라는 척도. 하지만 이것은 구로사와가 제기한 탈근대적 질문들을 근대적 평면으로 환원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