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에니 전쟁(한니발과 스키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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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포에니 전쟁(한니발과 스키피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Ⅰ. 서론
1.한니발
2.스키피오

Ⅱ. 본론
1.. 전쟁의 전야제
(1) 용병들의 반란
(2) 새로운 근거지 히스파니아
2. 한니발의 등장
3. 복수의 시작
4. 영웅 스키피오
5. 전쟁의 마지막
6.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불행한 최후
7. 제3차 포에니 전쟁과 카르타고의 멸망

Ⅲ. 개인적인 견해(결론)

본문내용

고의 북방 한계로 정했던 에브로 강을 건너 북진한 그는 에스파냐와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의 경계인 피레네 산맥으로 향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인들(켈트족)의 땅으로 들어갔을 때, 한니발 군대의 병력은 보병 5만 명, 기병 9천 명에 코끼리 37마리였다고 전해진다. 로마는 해상에서 카르타고의 움직임에 주목했으나 정작 카르타고 본국은 조용하기만 했다. 로마가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군대를 움직인 것은 오직 한니발뿐이었다. 갈리아에서 한니발의 군대는 갈리아 여러 부족들을 회유하고 설득하였으며 때로는 진압하여 갈리아인 용병을 추가 모집했으며 현지의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로마가 카르타고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시칠리아, 아프리카, 에스파냐로 군대를 보내 우왕좌왕하는 사이 한니발의 군대는 론 강을 건너 알프스로 향했다. 이 때 한니발은 일찍이 그 어느 장군도 감행하지 못한 모험을 시도했다. 코끼리 부대까지 포함한 대군을 이끌고 눈 덮인 알프스를 넘기로 작정한 것이다. 추위와 눈사태와 싸우고 곳곳의 고지에서 돌을 굴려 공격하는 소규모 갈리아 부족들과 싸우며 한니발 군대는 보름 만에 알프스를 넘었다. 코끼리 몇 마리와 다수의 병사를 잃고 이탈리아로 내려온 한니발의 군대는 보병 2만 명에 기병이 6천 명 가량이었다. 로마군에 비해 수(數)적으로 열세인데다 에스파냐인, 누미디아인, 리비아인 등 여러 민족의 혼성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피레네 산맥을 넘고 갈리아인들과 산발적인 싸움을 치렀으며 론 강을 건너 험준한 알프스 산맥까지 넘은 그들은 연대감이 투철한 역전의 용사들이 되어 있었고 사기가 충천했다.
3.복수의 시작
(1) 연전연승
기원전 218년 12월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과 로마 군이 최초로 맞붙은 곳은 티치노 강변이었다. 티치노 전투에서 한니발은 승리를 거두고 로마군을 지휘하던 집정관을 거의 사로잡을 뻔했다. 중상을 입은 로마 집정관을 구해낸 용사는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한 집정관의 17세 된 아들이었다. 아버지와 같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라는 이름을 가진 이 청년은 장차 한니발과 맞서 조국 로마를 위기에서 구해내게 된다. 그러나 전쟁 초기의 한니발 군대는 금방이라도 로마를 삼킬 기세로 연전연승한다. 이는 전적으로 한니발의 뛰어난 전술 때문이었다.
카르타고 군은 티치노 전투에 이어 벌어진 트레비아 강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기원전 217년 봄에는 이탈리아 중부의 트라시메노 호숫가의 전투에서 로마 군을 거의 전멸시키며 계속 남하를 계속했다.
(2) 결전을 피하라
트라시메노의 패전소식은 로마에게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다. 법무관 마르쿠스 폼포니우스를 비롯한 원로원은 불안의 여파를 막으려는 시도를 포기하는 대신, 시민들에게 현재 국가가 어떠한 현실에 직면하였는지 정확하게 알렸고, 동시에 원로원은 유능한 독재관(dictator)을 임명하기로 결정하였다. 원래 독재관 제도는 30년이 넘도록 채택되지 않았지만 두 명의 집정관 중 한명은 전사하였고 한명은 귀국이 불가능하여 집정관 자리가 전부 공석이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민회(兵士會, Comitia Centuriata)를 열어 투표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Quintus Fabius Maximus)를 독재관(獨裁官)으로 선출 하였다.
한편, 한니발에게도 몇 가지 문제가 생겼다. 원래 예상했던 것(전편에서도 말했지만 한니발은 로마를 도시연맹체 정도로 생각했었기에 몇 번의 전투에서 이기고 몇 개의 도시를 파괴한 뒤 겁을 주면 나머지 도시들이 전부 자기편에 가담할 것으로 생각했다.)과 달리 로마의 동맹시들은 일제히 성문을 닫아 걸고 한니발의 군대에 대항하여, 그의 군대는 보급에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으므로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지역인 아드리아 해안지대로 이동하여야만 했다. 하지만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는 대장정과 더불어 순식간에 3번의 격전을 치룬 병사들은 매우 지쳐있었으며, 처음에 한니발을 도왔던 갈리아인들 또한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 피로했던 것과 더불어 한니발이 아드리아 해안으로 이동함에 따라 자신들의 고향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자 차츰 군대를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보급문제 때문에 한니발은 계속하여 본국에 원군을 요청했지만 전부 거절당하고 말았다.(개인적으로 로마 원로원에 비해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군대에게 제대로 된 지원조차 못해주는 카르타고 정부는 매우 무능하다고 생각한다. 전쟁을 거의 한니발 혼자서 하고 있는 꼴이 아닌가?)
독재관으로 선출된 파비우스는 자신의 지휘아래 철저하고도 신중하게 병력을 움직였다. 그의 군대는 외관상으로 4개 군단과 4개의 알라(동맹에서 제공해준 연합군)로 이루어져 3~4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가졌다. 하지만 기병의 전력은 트라시메노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이후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대부분의 병력은 전투경험이 부족했으며, 또한 급작스럽게 편성되었기 때문에 집단간의 결집력마저 떨어졌다. 때문에 파비우스의 로마군은 수적으로도 크게 유리할 것이 없을뿐더러 노련한 한니발의 군대에 비하면 겉만 번지르르한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던 파비우스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아군을 가지고 한니발의 군대를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있는 전략을 구사한다.(이른바 지연작전) 때마침 주변의 도시를 포섭하려는 계획이 실패한 한니발이 군대를 이끌고 아드리아 해안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행군 도중 그의 군대는 고된 전투와 괴혈병, 말들이 옴(개선충의 기생으로 생기는 전염성 피부병)에 전염되는 등 온갖 질병에 시달리던 참이었다.
파비우스는 이러한 점을 재빨리 파악하고 얼른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파비우스의 추격은 그 이전의 패장들의 추격과는 다소 다른 모습을 띄었다. 이전의 대표적인 전투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대게는 로마군이 적군을 전면전으로 요격하고자 공격을 나서고 한니발이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방어를 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파비우스의 로마군은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을 추격하되, 늘 방어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한니발을 추격하였다. 늘 전면전에서의 방어를 고집하던 한니발에게 이런방법을 사용함으로써 파비우스는 한니발이 전부대를 이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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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4.06
  • 저작시기20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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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2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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