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안토니오 가우디의 건축 사상
Ⅱ. 안토니오 가우디의 생애
Ⅲ. 안토니오 가우디의 건축작품
1. 제1기의 건축작품
1) 빈센트 주택
2) 구엘 주택
2. 제2기의 건축작품
1) 칼베 주택
2) 벨레스 구아드
3. 제3기의 건축작품
1) 바틀로 주택
2) 밀라 주택
3) 꼴로니아 구엘 지하 성당
4) 사그라다 화밀리아 성당
5) 구엘 공원
6) 테레사 학원
Ⅳ. 안토니오 가우디의 현대적 의의
참고문헌
Ⅱ. 안토니오 가우디의 생애
Ⅲ. 안토니오 가우디의 건축작품
1. 제1기의 건축작품
1) 빈센트 주택
2) 구엘 주택
2. 제2기의 건축작품
1) 칼베 주택
2) 벨레스 구아드
3. 제3기의 건축작품
1) 바틀로 주택
2) 밀라 주택
3) 꼴로니아 구엘 지하 성당
4) 사그라다 화밀리아 성당
5) 구엘 공원
6) 테레사 학원
Ⅳ. 안토니오 가우디의 현대적 의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가우디는 레우스에서 보다 가까이 태어난 사람이 보다 총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가우디는 지중해 연안이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에는 이상적인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태양의 빛이 45도 각도로 비추게 되며 모든 물체를 어떠한 굴절없이 완벽하게 밝힐 수 있다. 가우디에 의하면 지중해 사람들은 종합적인 면이 있는 반면에 북쪽 사람들은 분석적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서 분석력은 필요하지만 예술적인 창조는 종합적인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의 지중해의 풍경과 그 지역 국가들의 땅이 지니고 있었던 크나큰 열정은 가우디의 종교적인 정신에 의해서 더욱 커져만 갔다. 그는 자연을 산프란시스코 데 아시시 식으로 사랑하였다. 자연이 신의 작품이라고 간주하고 그곳으로부터 건축 양식을 얻게 된다면 조물주의 작업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가우디는 신은 인간을 통해서 창조 작업을 계속 하고 있다고 믿고, 품위가 있는 예술 창조활동을 계속하였다.
그의 신앙심은 대단하였고 신부들의 충고를 따르는데 그치지 않았다. 여러번 그들과 논쟁을 벌인적도 있지만 대체로 빅, 마요르까, 아스토르가의 주교 등 교회의 지도자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는 기도나 예배 의식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 것을 즐겼으나 신학에 관한 논쟁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선호하였다. 그의 건축양식은 매우 시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시는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시는 고치만 아프다고 하였지만 히신또 베르다게르 칭이나 Francesch Matheu와 같은 시인과도 친분을 맺었다.
그의 사상은 항상 건축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대만의 건축가인 호테치엔(Hoh Teh-Chien)은 가우디에 관한 그의 박사 학위논문에서 주장하기를 가우디는 형이상학적인 건축을 실현하였으며 그는 건물을 지으면서 자기의 생각을 밝히는 철학가나 다름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철학이나 건축에 관한 책을 별로 읽지는 않았다. 그는 Solesmes의 승려인 Dom Gueranger의 \"종교연력\"에 관한 책을 부지런히 읽었는데 종교 카렌다로서 종교 축제에는 무엇이 있으며 어떻게 거행하는 지에 대한 설명이 적힌 책이었다. 가우디 자신이 즐기는 건축학 이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은 그는 그의 스튜디오 창문밖을 가리키면서, 저기 보이는 나무가 자기의 제일 좋은 건축 교본이라고 말하였다. 그가 건축한 작품은 얼마 안되는 건물이지만 성가족 성당 자체로서 건물 한 채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69년 이후 그의 17가지 작품이 스페인의 국립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가우디는 그의 작품을 계속적으로 완벽하게 만드는 능력을 지녔고 그는 자기의 작품이 완성되었다고는 전혀 생각한 적이 없다. 또한 시멘트로 완벽하게 건물을 지었으며 아주 미세한 부분 즉 장식이나 보조에 이르기까지 구조에도 치밀하였다. 가구나 유리창, 단철된 일부분 등 모든 종류의 보조 요소까지도 설계하였으며 모델을 반본하는 적은 결코 없었다.
가우디 건물 하나하나가 제각기 특징을 가지고 있고 다른 것과 유사한 면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 때문에 하나의 단위를 이루게 되며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으며 하나의 건물에서만 오로지 존재하게 된다.
Ⅱ. 안토니오 가우디의 생애
가우디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카탈루냐 지방에서 비천한 집안의 구리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연로한 아버지와 조카딸과 함께 살았다. 일찍부터 건축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건축을 공부하려고 1869~70년에 스페인의 가장 근대적인 도시이자 카탈루냐 지방에서 정치와 지식의 중심지였던 바르셀로나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군복무와 다른 활동 때문에 8년 뒤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
가우디의 건축양식은 몇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878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학교의 설계과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란한 빅토리아 양식을 썼다. 그러나, 곧 기하학적인 모양의 덩어리들을 희한하게 병렬시키는 구성방식을 만들어냈고 그 표면에 무늬를 새긴 벽돌이나 돌, 화려한 자기 타일 및 꽃이나 파충류 모양을 세공한 금속을 붙여 생동감을 주었다. 다른 형식을 띤 세부(細部)를 빼면 이 양식의 전반적인 효과는 이슬람 양식과 그리스도교 양식을 혼합한 스페인 특유의 무어 양식(또는 무데하르 양식)이었다. 무데하르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은 카사 비센스(1878~80)와 카프리초(1883~85), 그리고 1880년대말에 지은
사실 가우디는 지중해 연안이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에는 이상적인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태양의 빛이 45도 각도로 비추게 되며 모든 물체를 어떠한 굴절없이 완벽하게 밝힐 수 있다. 가우디에 의하면 지중해 사람들은 종합적인 면이 있는 반면에 북쪽 사람들은 분석적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서 분석력은 필요하지만 예술적인 창조는 종합적인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의 지중해의 풍경과 그 지역 국가들의 땅이 지니고 있었던 크나큰 열정은 가우디의 종교적인 정신에 의해서 더욱 커져만 갔다. 그는 자연을 산프란시스코 데 아시시 식으로 사랑하였다. 자연이 신의 작품이라고 간주하고 그곳으로부터 건축 양식을 얻게 된다면 조물주의 작업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가우디는 신은 인간을 통해서 창조 작업을 계속 하고 있다고 믿고, 품위가 있는 예술 창조활동을 계속하였다.
그의 신앙심은 대단하였고 신부들의 충고를 따르는데 그치지 않았다. 여러번 그들과 논쟁을 벌인적도 있지만 대체로 빅, 마요르까, 아스토르가의 주교 등 교회의 지도자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는 기도나 예배 의식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 것을 즐겼으나 신학에 관한 논쟁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선호하였다. 그의 건축양식은 매우 시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시는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시는 고치만 아프다고 하였지만 히신또 베르다게르 칭이나 Francesch Matheu와 같은 시인과도 친분을 맺었다.
그의 사상은 항상 건축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대만의 건축가인 호테치엔(Hoh Teh-Chien)은 가우디에 관한 그의 박사 학위논문에서 주장하기를 가우디는 형이상학적인 건축을 실현하였으며 그는 건물을 지으면서 자기의 생각을 밝히는 철학가나 다름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철학이나 건축에 관한 책을 별로 읽지는 않았다. 그는 Solesmes의 승려인 Dom Gueranger의 \"종교연력\"에 관한 책을 부지런히 읽었는데 종교 카렌다로서 종교 축제에는 무엇이 있으며 어떻게 거행하는 지에 대한 설명이 적힌 책이었다. 가우디 자신이 즐기는 건축학 이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은 그는 그의 스튜디오 창문밖을 가리키면서, 저기 보이는 나무가 자기의 제일 좋은 건축 교본이라고 말하였다. 그가 건축한 작품은 얼마 안되는 건물이지만 성가족 성당 자체로서 건물 한 채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69년 이후 그의 17가지 작품이 스페인의 국립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가우디는 그의 작품을 계속적으로 완벽하게 만드는 능력을 지녔고 그는 자기의 작품이 완성되었다고는 전혀 생각한 적이 없다. 또한 시멘트로 완벽하게 건물을 지었으며 아주 미세한 부분 즉 장식이나 보조에 이르기까지 구조에도 치밀하였다. 가구나 유리창, 단철된 일부분 등 모든 종류의 보조 요소까지도 설계하였으며 모델을 반본하는 적은 결코 없었다.
가우디 건물 하나하나가 제각기 특징을 가지고 있고 다른 것과 유사한 면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 때문에 하나의 단위를 이루게 되며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으며 하나의 건물에서만 오로지 존재하게 된다.
Ⅱ. 안토니오 가우디의 생애
가우디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카탈루냐 지방에서 비천한 집안의 구리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연로한 아버지와 조카딸과 함께 살았다. 일찍부터 건축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건축을 공부하려고 1869~70년에 스페인의 가장 근대적인 도시이자 카탈루냐 지방에서 정치와 지식의 중심지였던 바르셀로나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군복무와 다른 활동 때문에 8년 뒤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
가우디의 건축양식은 몇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878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학교의 설계과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란한 빅토리아 양식을 썼다. 그러나, 곧 기하학적인 모양의 덩어리들을 희한하게 병렬시키는 구성방식을 만들어냈고 그 표면에 무늬를 새긴 벽돌이나 돌, 화려한 자기 타일 및 꽃이나 파충류 모양을 세공한 금속을 붙여 생동감을 주었다. 다른 형식을 띤 세부(細部)를 빼면 이 양식의 전반적인 효과는 이슬람 양식과 그리스도교 양식을 혼합한 스페인 특유의 무어 양식(또는 무데하르 양식)이었다. 무데하르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은 카사 비센스(1878~80)와 카프리초(1883~85), 그리고 1880년대말에 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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