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예배(교회예배)의 개념
Ⅲ. 예배(교회예배)의 역사
1. 발전적 산물로서의 예배
2. 예배와 문화적인 배경과의 관계
3. 예배의 형식상의 다양성
4. 동적(動的, dynamic) 특성을 지닌 계시의 매개수단
Ⅳ. 예배(교회예배)의 요소
1. 예배의 상징적 요소
2. 예배의 시간적 요소들
3. 예배의 공간적 요소들
Ⅴ. 한국 예배(교회예배)의 문제점과 과제
Ⅵ. 한국 예배(교회예배)의 바람직한 방향
Ⅶ. 결론
참고문헌
Ⅱ. 예배(교회예배)의 개념
Ⅲ. 예배(교회예배)의 역사
1. 발전적 산물로서의 예배
2. 예배와 문화적인 배경과의 관계
3. 예배의 형식상의 다양성
4. 동적(動的, dynamic) 특성을 지닌 계시의 매개수단
Ⅳ. 예배(교회예배)의 요소
1. 예배의 상징적 요소
2. 예배의 시간적 요소들
3. 예배의 공간적 요소들
Ⅴ. 한국 예배(교회예배)의 문제점과 과제
Ⅵ. 한국 예배(교회예배)의 바람직한 방향
Ⅶ.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실제로 150년경의 Justin Martyr와 200년경의 Hippolytus의 기록들을 보면 이것이 드러난다. 져스틴의 예배에 대한 기록은 (1) 주일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날에 함께 모여 (2) 오늘날 우리가 구약이요, 신약이라 부르는 것들을 \"시간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읽고 (3) 사회자가 설교한 후 권면을 한다. (4) 그 다음으로는 선 채로 사람들이 기도를 한다. 이상이 말씀예배이고 이어서 성만찬 예배가 뒤따랐는데 (5) 집례자가 빵과 잔을 받은 뒤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람들의 아멘으로 기도를 맺는다. (6) 이어서 빵과 잔에 참여한다. 이것이 바로 150년경의 예배의 모습이다.
그 후 약 50여년이 지난 215년경 히폴리투스는 좀더 발전된 예배의 문건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보다 체계화된 성만찬 인사 및 성만찬 기도가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성경에서 본 간결한 세례예식과는 대조적으로 이즈음에 와서는 무려 길면 3년이라는 준비 기간을 거친 후, 철저한 훈련과 검증 후에 받을 수 있었다. 4, 5세기가 되면서 예배는 지역적인 상황과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서 영향을 받았다. 핍박이 사라지고(313), 주일은 시정 휴일이 되었으며 주일날 예배에 방대한 시간을 허용하게 되면서 예배는 화려한 예식이 되었다. 그에 상응하는 인상 깊은 건물들이 건립되고 성가대가 구성되고 정교한 행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2. 예배와 문화적인 배경과의 관계
역사적으로 예배는 문화와의 깊은 연계를 지니고 변용을 거듭하였다. 그 한 예로 성만찬 떡의 변용 과정도 주목할 만 하다. 초대교회에는 보통 식사 중 먹는 음식과 거의 동일한 누룩이 있는 보리떡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는 신자들이 집에서 만들어 가지고 와서 집사들에게 전달한 후, 그것은 다시 교회의 지도자에게 전달되어 성물(성만찬 떡)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동방교회는 개신교회와는 달리 유교병을 사용한다. 유월절에 먹는 빵은 보통 누룩 없는 보리떡이었으나 성전의식에서는 보리떡을 금하는 전통이 있었다. 79년경 Vesuvius화산 폭발시 무너진 폐허에서 발견된 빵은 밀로 만들어져서 직경이 약 8인치(약 17센티 정도) 정도까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의 떡은 보리로 만들거나 밀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 또 누룩의 첨가여부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고 다만 떡이 주식으로부터 채택되었다는 것이 주목할만한 특징이다. 이 때는 한 떡에서 떼어서 주는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것이 약 9세기 무렵에는 무교병이 통상적이 되고 곧 의무화되었다. 이 당시의 떡은 크고 두꺼웠다. 봉헌식(떡과 포도주 및 헌물을 드리는 예식의 일부)도 많은 곳에서 없어졌다. 점차 성물은 수도자나 교직자들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 새로운 천년이 되면서 결국은 빵은 Host로 바뀌었다. 오늘날 일부 교회들, 예를 들어 필리핀 그리스도 연합교회에서는 성만찬 떡을 위해, 빵 뿐만이 아니라 바나나를 드리기도 한다. 이미 우리나라의 경우도 떡을 사용하면서 전통적 성만찬 예배의 엄숙하고도 축제적인 가치를 재현하고 있는 교회들이 많이 있음을 보면서 성물의 요소가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에 대한 선험적 이해에 의한 고정화가 결코 바람직한 결론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적 상황에 따른 변화는 교회의 예배를 둘러싼 환경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곧 교회건축의 양식과 구조에서도 드러난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기 전에는 기독교 신앙은 로마제국 내에서 불법종교였기 때문에 핍박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 시기에 예배는 우선 장소적으로 보면 70년, 성전이 파괴되기까지는 유대인들의 회당을 사용하거나 집에서 드렸고 이후부터는 주로 가정집(경우에 따라서 개조한) 등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것이 로마의 기독교 공인 후 가정집에서의 예배는 곧 거대한 Basilica에서 드려졌고 갖가지 상징적 장식들을 갖추고 큰 규모나 화려함을 지닌 예배가 드려지게 되었다. 여기 바실리카는 법정 혹은 공회당으로 쓰이던 곳이었던 만큼, 그 규모가 크고 화려함이 있었다.
이런 전통이 줄곧 내려오다가 이차 대전 후 과거에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큰 변화들에 대해서 개방적 태도를 갖고 건축상의 획기적 변화들이 모색되었다. 예를 들어 2차대전후 독일이 폐허 속에서 건축을 하면서 값싸고 실용적인 교회건축(구교)을 짓게 되면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새로운 실험성을 보여주었다. 불란서의 어떤 교회는 150불을 들여서 조각목재로 넝마주의들의 교회를 지었다. 스위스의 건축가인 Senn은 1963년에 재정적 한계가 건물의 출현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는데 즉, 빈곤의 상태에서 가장 요긴한 것을 먼저 생각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가 자리, 이미지(상), 옆제단(side altars) 등을 없애거나 측면 예배소(side chapel)로 옮기게 되었다.
3. 예배의 형식상의 다양성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신앙이 발아한 곳은 바로 유대라는 특수한 문화에서였는데 초대교회의 예배는 다양성의 예를 잘 보여주고 있다. 초기 기독교 예배의 유형 상 몇 가지 다양한 예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아람어 계통의 기독교로서 이들은 성전의 기도시간을 준수하고, 성전을 복음선포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들은 유대교적 관습의 상당 부분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율법에 열심인 사람이 수만 명 가량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다(행 21:20). 이들은 예루살렘 총회(행 15)를 통해 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와의 구별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던 특징을 지닌다. 즉 그들은 성전 말고도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에 전심하고 떡을 떼었다.(행 2:42) 이들의 예배에는 분명 그리스도가 예배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에는 이의의 여지가 없다.
둘째는 헬라적인 기독교예배를 들 수 있다. 유대주의와 보다 과격하게 결별한 기독교인들은 헬라주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성전과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 7인의 구제위원들을 뽑았다. 안디옥은 후에 이들 헬라
실제로 150년경의 Justin Martyr와 200년경의 Hippolytus의 기록들을 보면 이것이 드러난다. 져스틴의 예배에 대한 기록은 (1) 주일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날에 함께 모여 (2) 오늘날 우리가 구약이요, 신약이라 부르는 것들을 \"시간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읽고 (3) 사회자가 설교한 후 권면을 한다. (4) 그 다음으로는 선 채로 사람들이 기도를 한다. 이상이 말씀예배이고 이어서 성만찬 예배가 뒤따랐는데 (5) 집례자가 빵과 잔을 받은 뒤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람들의 아멘으로 기도를 맺는다. (6) 이어서 빵과 잔에 참여한다. 이것이 바로 150년경의 예배의 모습이다.
그 후 약 50여년이 지난 215년경 히폴리투스는 좀더 발전된 예배의 문건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보다 체계화된 성만찬 인사 및 성만찬 기도가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성경에서 본 간결한 세례예식과는 대조적으로 이즈음에 와서는 무려 길면 3년이라는 준비 기간을 거친 후, 철저한 훈련과 검증 후에 받을 수 있었다. 4, 5세기가 되면서 예배는 지역적인 상황과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서 영향을 받았다. 핍박이 사라지고(313), 주일은 시정 휴일이 되었으며 주일날 예배에 방대한 시간을 허용하게 되면서 예배는 화려한 예식이 되었다. 그에 상응하는 인상 깊은 건물들이 건립되고 성가대가 구성되고 정교한 행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2. 예배와 문화적인 배경과의 관계
역사적으로 예배는 문화와의 깊은 연계를 지니고 변용을 거듭하였다. 그 한 예로 성만찬 떡의 변용 과정도 주목할 만 하다. 초대교회에는 보통 식사 중 먹는 음식과 거의 동일한 누룩이 있는 보리떡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는 신자들이 집에서 만들어 가지고 와서 집사들에게 전달한 후, 그것은 다시 교회의 지도자에게 전달되어 성물(성만찬 떡)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동방교회는 개신교회와는 달리 유교병을 사용한다. 유월절에 먹는 빵은 보통 누룩 없는 보리떡이었으나 성전의식에서는 보리떡을 금하는 전통이 있었다. 79년경 Vesuvius화산 폭발시 무너진 폐허에서 발견된 빵은 밀로 만들어져서 직경이 약 8인치(약 17센티 정도) 정도까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의 떡은 보리로 만들거나 밀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 또 누룩의 첨가여부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고 다만 떡이 주식으로부터 채택되었다는 것이 주목할만한 특징이다. 이 때는 한 떡에서 떼어서 주는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것이 약 9세기 무렵에는 무교병이 통상적이 되고 곧 의무화되었다. 이 당시의 떡은 크고 두꺼웠다. 봉헌식(떡과 포도주 및 헌물을 드리는 예식의 일부)도 많은 곳에서 없어졌다. 점차 성물은 수도자나 교직자들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 새로운 천년이 되면서 결국은 빵은 Host로 바뀌었다. 오늘날 일부 교회들, 예를 들어 필리핀 그리스도 연합교회에서는 성만찬 떡을 위해, 빵 뿐만이 아니라 바나나를 드리기도 한다. 이미 우리나라의 경우도 떡을 사용하면서 전통적 성만찬 예배의 엄숙하고도 축제적인 가치를 재현하고 있는 교회들이 많이 있음을 보면서 성물의 요소가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에 대한 선험적 이해에 의한 고정화가 결코 바람직한 결론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적 상황에 따른 변화는 교회의 예배를 둘러싼 환경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곧 교회건축의 양식과 구조에서도 드러난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기 전에는 기독교 신앙은 로마제국 내에서 불법종교였기 때문에 핍박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 시기에 예배는 우선 장소적으로 보면 70년, 성전이 파괴되기까지는 유대인들의 회당을 사용하거나 집에서 드렸고 이후부터는 주로 가정집(경우에 따라서 개조한) 등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것이 로마의 기독교 공인 후 가정집에서의 예배는 곧 거대한 Basilica에서 드려졌고 갖가지 상징적 장식들을 갖추고 큰 규모나 화려함을 지닌 예배가 드려지게 되었다. 여기 바실리카는 법정 혹은 공회당으로 쓰이던 곳이었던 만큼, 그 규모가 크고 화려함이 있었다.
이런 전통이 줄곧 내려오다가 이차 대전 후 과거에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큰 변화들에 대해서 개방적 태도를 갖고 건축상의 획기적 변화들이 모색되었다. 예를 들어 2차대전후 독일이 폐허 속에서 건축을 하면서 값싸고 실용적인 교회건축(구교)을 짓게 되면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새로운 실험성을 보여주었다. 불란서의 어떤 교회는 150불을 들여서 조각목재로 넝마주의들의 교회를 지었다. 스위스의 건축가인 Senn은 1963년에 재정적 한계가 건물의 출현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는데 즉, 빈곤의 상태에서 가장 요긴한 것을 먼저 생각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가 자리, 이미지(상), 옆제단(side altars) 등을 없애거나 측면 예배소(side chapel)로 옮기게 되었다.
3. 예배의 형식상의 다양성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신앙이 발아한 곳은 바로 유대라는 특수한 문화에서였는데 초대교회의 예배는 다양성의 예를 잘 보여주고 있다. 초기 기독교 예배의 유형 상 몇 가지 다양한 예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아람어 계통의 기독교로서 이들은 성전의 기도시간을 준수하고, 성전을 복음선포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들은 유대교적 관습의 상당 부분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율법에 열심인 사람이 수만 명 가량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다(행 21:20). 이들은 예루살렘 총회(행 15)를 통해 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와의 구별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던 특징을 지닌다. 즉 그들은 성전 말고도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에 전심하고 떡을 떼었다.(행 2:42) 이들의 예배에는 분명 그리스도가 예배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에는 이의의 여지가 없다.
둘째는 헬라적인 기독교예배를 들 수 있다. 유대주의와 보다 과격하게 결별한 기독교인들은 헬라주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성전과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 7인의 구제위원들을 뽑았다. 안디옥은 후에 이들 헬라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