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펜은 칼보다 강하다.
신문이 잘못된 정부 정책을 바로 잡는 힘을 발휘할수 있음을 설명하고 그 예를 들었음.
Ⅱ. 신문은 권력의 시녀.
신문이 권력과 타협하여 그 시녀과 될 수도 있음을 설명하고, 5공시대의 언론들을 예로 들었음.
Ⅲ. 역사는 반복된다?
5공시대의 부끄러운 역사가 현재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왜곡으로 재현되고 있음을 사례를 들어 설명하였음.
Ⅳ. 참다운 지성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을 예로 들며 언론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였음.
신문이 잘못된 정부 정책을 바로 잡는 힘을 발휘할수 있음을 설명하고 그 예를 들었음.
Ⅱ. 신문은 권력의 시녀.
신문이 권력과 타협하여 그 시녀과 될 수도 있음을 설명하고, 5공시대의 언론들을 예로 들었음.
Ⅲ. 역사는 반복된다?
5공시대의 부끄러운 역사가 현재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왜곡으로 재현되고 있음을 사례를 들어 설명하였음.
Ⅳ. 참다운 지성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을 예로 들며 언론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였음.
본문내용
고 부연했다. 상당수는 실제 쇠고기 교역이 미미한 국가가 상당수이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 (중략) …
더불어 전문가들은 한국이 협상 시작부터 불리한 위치였음을 지적했다. 2006년 가을 손톱 조각만한 뼈조각이 검출됐다고 수입물량 전량을 반송시킨 조치가 국제사회에서 한국 정부의 합리성에 대한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훼손시켰고, 미국내의 쇠고기 수입업자 대변 정치인들의 '말발'을 세게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2008.5.3
조중동은 이처럼, 그들이 5공 시대에 저질렀던 만행을 그대로 되풀이 하고 있다. 그들은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정권이 바뀜과 동시에 재빠르게 바꾸고 있다. 마치 83년 전두환 정권이 끝나자 찬양일색의 언론이 사납고 날카롭게 돌변한 것 처럼 말이다.
그들은 국민을 바보로 아는 것일까? 유쾌하지 않은 역사가 반복되고 있는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Ⅳ. 참다운 지성
언론인은 지식인이다. 지식인의 사명과 언론인의 소명을 다한 기자들도 있었지만, 우리나나 언론은 대체로 권력과 현실에 타협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일제 말에는 친일에 앞장선 기자가 많았고, 독재정권 아래서는 더욱 많은 기자가 주구 노릇을 서슴지 않고 하였다. 한국 언론사에 있어서 오보보다 더 나쁜 곡필의 역사가 있음을 있지 않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곡필의 역사가 현재처럼 반복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다음은 세계 언론의 역사에 있어 대단히 유명한 사건인 프랑스의 ‘드레퓌스’사건의 전말이다. 1894년 9월 어느날, 프랑스의 참모본부 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훔쳐낸 한 장의 편지를 입수했다. 그 편지의 수취인은 독일대사관 무관이었으며 발신인은 익명이었고, 내용물은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의 '명세서'였다.
스파이 활동의 거점인 독일대사관을 감시하는 참모본부는 '명세서'를 작성한 사람을 찾기 위한 수사를 시작했다.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문제의 '명세서'의 필적이 평범한 유태인 장교인 '드레퓌스'와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물론 이같은 판단에는 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그해 12월, 군사법정의 비밀재판에서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참모본부는 "국가안보를 위해서 증거를 공개할 수 없지만 대역죄인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는 간단한 설명으로 확실한 증거의 공개를 요청한 일부 양식있는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재판이 끝난 지 15개월이 흐른 뒤 참모본부 정보국의 삐까르 중령이 우연한 기회에 드레퓌스 사건의 서류철에서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과 문제의 '명세서'의 필적이 보병 대대장인 에스떼라지 소령의 필적과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삐까르 중령은 이 엄청난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으나 그의 상관들은 자신과 참모본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드레퓌스 사건을 그대로 묻어두기를 원했고 삐까르 중령을 위협하기까지 했다.
정의감과 책임감이 강한 삐까르 중령은 드레퓌스의 형 마띠외와 드레퓌스의 아내 루시와 함께 드레퓌스의 무죄 입증을 위해 다시 뛰었고 다시금 드레퓌스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프랑스 국민은 둘로 갈라졌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심 요구파와 재심 반대파가 그것이다. 공화제와 프랑스혁명의 이념에 반대하는 왕정복고주의자와 옛 귀족들, 드레퓌스를 감옥으로 보낸 군부, 반유태주의에 몰두한 과격 가톨릭주의자, 보수적인 정치인들, 군국주의자들 및 이들과 연계된 신문들이 재심 반대의 깃발을 높이 들고 군중을 선동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유태인의 음모를 경고하고 국가안보를 위해 군의 위신을 존중하자고 주장했다.
양심적 지식인과 법률가들, 공화주의자와 일부 진보적 정치인들, 소수의 신문이 재심 요구파를 이루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 사건을 유산계급 내부의 투쟁으로 보고 구경만 하던 사회주의자와 노동자계급이 뒤늦게 여기에 가담하였다. 미국, 러시아, 유럽 등 세계의 지식인들도 지지성원을 보냈다.
여기에 1897년 1월 13일에 프랑스 대문호인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의 무죄와 진실을 묻어 버리려는 사람들을 경고하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진실의 궁극적 승리를 장담하였다.
에밀 졸라는 군법회의를 중상 모략했다는 죄로 기소되었고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프랑스는 다시 한번 국제적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발작적인 반유태주의 물결에 위협을 느낀 졸라는 영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이윽고 프랑스 곳곳에서 유태인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이 조직되었다.
그런데 1898년 8월 30일, 삐까르 중령을 모함하기 위해 에스떼라지와 짜고 문서를 날조했던 참모본부의 앙리 중령이 진상이 발각될 위기에 몰린 나머지 자살을 하였다.
그러자 에스떼라지는 재빨리 영국으로 도망가 자신은 이중첩자로서 상부의 명을 받고 독일의 기밀을 탐지하기 위해 독일 무관에게 접근했노라는 내용의 책을 출판하였다.
마침내 1899년 6월 3일 고등법원은 1894년 12월의 재판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재심을 명령했다. 그러나 재심에서도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계속 거짓증언을 했고 군사법원은 그에게 '정상참작'이라는 이유를 들어 금고 10년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졸라는 다시 한번 펜을 들었고 세계 언론의 비난과 진보적 정치인의 공세에 위기에 몰린 대통령은 1899년 9월 19일 드레퓌스를 특별사면하였다. 그는 자유를 되찾았고 아내 루시를 포옹하였다.
드레퓌스는 1904년 3월, 재심을 청구했고 1906년 최고재판소로부터 무죄선고를 받았다. 같은 해 7월,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프랑스 육군 소령으로 복귀하는 의식을 치르고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무개차에 올라타고 형 마띠외와 아들 피엘을 양옆에 세우고 연병장을 나섰을 때 자발적으로 모여든 20만 인파가 일제히 모자를 벗어들고 경의를 표했다. 창백한 드레퓌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프랑스군 만세! 진실 만세! 드레퓌스 만세! 정의 만세!"
이 사건은 양심적 지식인 집단이 주도하는 여론의 승리를 보여주었다. 특히 졸라는 "행동하지 않는 지성은 참다운 지성이 아니다"라는 진리를 모범으로 보여주었다. 우리 언론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 (중략) …
더불어 전문가들은 한국이 협상 시작부터 불리한 위치였음을 지적했다. 2006년 가을 손톱 조각만한 뼈조각이 검출됐다고 수입물량 전량을 반송시킨 조치가 국제사회에서 한국 정부의 합리성에 대한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훼손시켰고, 미국내의 쇠고기 수입업자 대변 정치인들의 '말발'을 세게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2008.5.3
조중동은 이처럼, 그들이 5공 시대에 저질렀던 만행을 그대로 되풀이 하고 있다. 그들은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정권이 바뀜과 동시에 재빠르게 바꾸고 있다. 마치 83년 전두환 정권이 끝나자 찬양일색의 언론이 사납고 날카롭게 돌변한 것 처럼 말이다.
그들은 국민을 바보로 아는 것일까? 유쾌하지 않은 역사가 반복되고 있는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Ⅳ. 참다운 지성
언론인은 지식인이다. 지식인의 사명과 언론인의 소명을 다한 기자들도 있었지만, 우리나나 언론은 대체로 권력과 현실에 타협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일제 말에는 친일에 앞장선 기자가 많았고, 독재정권 아래서는 더욱 많은 기자가 주구 노릇을 서슴지 않고 하였다. 한국 언론사에 있어서 오보보다 더 나쁜 곡필의 역사가 있음을 있지 않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곡필의 역사가 현재처럼 반복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다음은 세계 언론의 역사에 있어 대단히 유명한 사건인 프랑스의 ‘드레퓌스’사건의 전말이다. 1894년 9월 어느날, 프랑스의 참모본부 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훔쳐낸 한 장의 편지를 입수했다. 그 편지의 수취인은 독일대사관 무관이었으며 발신인은 익명이었고, 내용물은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의 '명세서'였다.
스파이 활동의 거점인 독일대사관을 감시하는 참모본부는 '명세서'를 작성한 사람을 찾기 위한 수사를 시작했다.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문제의 '명세서'의 필적이 평범한 유태인 장교인 '드레퓌스'와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물론 이같은 판단에는 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그해 12월, 군사법정의 비밀재판에서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참모본부는 "국가안보를 위해서 증거를 공개할 수 없지만 대역죄인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는 간단한 설명으로 확실한 증거의 공개를 요청한 일부 양식있는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재판이 끝난 지 15개월이 흐른 뒤 참모본부 정보국의 삐까르 중령이 우연한 기회에 드레퓌스 사건의 서류철에서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과 문제의 '명세서'의 필적이 보병 대대장인 에스떼라지 소령의 필적과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삐까르 중령은 이 엄청난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으나 그의 상관들은 자신과 참모본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드레퓌스 사건을 그대로 묻어두기를 원했고 삐까르 중령을 위협하기까지 했다.
정의감과 책임감이 강한 삐까르 중령은 드레퓌스의 형 마띠외와 드레퓌스의 아내 루시와 함께 드레퓌스의 무죄 입증을 위해 다시 뛰었고 다시금 드레퓌스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프랑스 국민은 둘로 갈라졌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심 요구파와 재심 반대파가 그것이다. 공화제와 프랑스혁명의 이념에 반대하는 왕정복고주의자와 옛 귀족들, 드레퓌스를 감옥으로 보낸 군부, 반유태주의에 몰두한 과격 가톨릭주의자, 보수적인 정치인들, 군국주의자들 및 이들과 연계된 신문들이 재심 반대의 깃발을 높이 들고 군중을 선동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유태인의 음모를 경고하고 국가안보를 위해 군의 위신을 존중하자고 주장했다.
양심적 지식인과 법률가들, 공화주의자와 일부 진보적 정치인들, 소수의 신문이 재심 요구파를 이루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 사건을 유산계급 내부의 투쟁으로 보고 구경만 하던 사회주의자와 노동자계급이 뒤늦게 여기에 가담하였다. 미국, 러시아, 유럽 등 세계의 지식인들도 지지성원을 보냈다.
여기에 1897년 1월 13일에 프랑스 대문호인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의 무죄와 진실을 묻어 버리려는 사람들을 경고하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진실의 궁극적 승리를 장담하였다.
에밀 졸라는 군법회의를 중상 모략했다는 죄로 기소되었고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프랑스는 다시 한번 국제적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발작적인 반유태주의 물결에 위협을 느낀 졸라는 영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이윽고 프랑스 곳곳에서 유태인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이 조직되었다.
그런데 1898년 8월 30일, 삐까르 중령을 모함하기 위해 에스떼라지와 짜고 문서를 날조했던 참모본부의 앙리 중령이 진상이 발각될 위기에 몰린 나머지 자살을 하였다.
그러자 에스떼라지는 재빨리 영국으로 도망가 자신은 이중첩자로서 상부의 명을 받고 독일의 기밀을 탐지하기 위해 독일 무관에게 접근했노라는 내용의 책을 출판하였다.
마침내 1899년 6월 3일 고등법원은 1894년 12월의 재판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재심을 명령했다. 그러나 재심에서도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계속 거짓증언을 했고 군사법원은 그에게 '정상참작'이라는 이유를 들어 금고 10년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졸라는 다시 한번 펜을 들었고 세계 언론의 비난과 진보적 정치인의 공세에 위기에 몰린 대통령은 1899년 9월 19일 드레퓌스를 특별사면하였다. 그는 자유를 되찾았고 아내 루시를 포옹하였다.
드레퓌스는 1904년 3월, 재심을 청구했고 1906년 최고재판소로부터 무죄선고를 받았다. 같은 해 7월,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프랑스 육군 소령으로 복귀하는 의식을 치르고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무개차에 올라타고 형 마띠외와 아들 피엘을 양옆에 세우고 연병장을 나섰을 때 자발적으로 모여든 20만 인파가 일제히 모자를 벗어들고 경의를 표했다. 창백한 드레퓌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프랑스군 만세! 진실 만세! 드레퓌스 만세! 정의 만세!"
이 사건은 양심적 지식인 집단이 주도하는 여론의 승리를 보여주었다. 특히 졸라는 "행동하지 않는 지성은 참다운 지성이 아니다"라는 진리를 모범으로 보여주었다. 우리 언론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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