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김수환 추기경의 일대기
3.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모델링
4. 결론
5. 과제를 마치며
6. 참고문헌
2. 김수환 추기경의 일대기
3.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모델링
4. 결론
5. 과제를 마치며
6. 참고문헌
본문내용
혔고, 1998년 4월 19일에는 아시아 특별 주교 시노드 참석차 교황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사의를 표명하였고, 결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그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의 사임을 허락하였다.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5) 복음화 운동 - \"실천하는 신앙인\"
추기경은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인사말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의 원칙을 밝혔다. 동시에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여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과 서민, 노동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다.
실제로 그는 대교구장 취임 직후부터 억압받고 가난한 민중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파행적인 정치 현실과 불확실한 노동 문제 등에 관한 강경 발언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인권 옹호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동안 서울대교구의 교세는 1968년 말에 48개 본당 14만여 명이던 것이 1997년 말에는 197개 본당 121만여 명을 기록하게 되었고, 성직자수는 590명으로 증가하였다.
아울러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순교자들의 현양과 시성을 위해서도 노력하였으며, 1984년 5월 6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방한을 계기로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행사와 함께 103위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81년의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 해외 선교 지원, 북한 동포 돕기 운동과 남북한 교회의 교류 활동, 1989년의 서울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 등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을 정착시키는 데 앞장섰다. 특히 세계 성체 대회를 기념하기 위해 1988년에 시작한 `한마음 한몸 운동\'은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교회 안팎으로 훌륭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
3.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모델링 「김수환추기경 이야기(증보판, 김수환 추기경 회고록)」, 김수환추기경, 평화방송평화신문, 2009.
「김수환추기경의 신앙과 사랑」, 천주교서울대교구, 가톨릭출판사, 1998.
김수환 추기경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청소년들이 그를 모델링할 만한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는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왔지만,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종교적인 이유로 불안하기만 했고, 아버지를 일찍 여의게 되었던 유년 시절, 그리고 목표를 지니고 공부를 시작한 후 그를 괴롭혔던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 상황,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그는 그가 목표했던 ‘성직자’가 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저 멈춘 것이 아니라, 외국 유학을 통해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은 노력을 쏟아 부으며 신부에서 주교로, 주교에서 추기경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이처럼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하여 자기계말을 하는 것, 이것은 청소년에게 우리가 살면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하는 지를 보여준다.
그가 그의 지위나 권력을 의식하지 않고 소외된 이들의 진정한 벗이 되어주었다는 점도 청소년들의 삶에 있어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높은 위치에서도 자신을 낮추고 우리가 아껴야 할 존재들에 대해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어른이었던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또한 언제나 김 추기경의 벗이었고, 따라서 김수환 추기경은 따뜻한 마음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장애인과 사형수들을 만났다. 또한, 어린 아이들을 위해 보육원도 설립하였으며, 강제 철거로 길거리에 나앉은 빈민들 또한 방문하였다. 그리고 농민과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였고, 우리 밀 살리기 운동에도 앞장을 섰다.
그리고 단순히 이처럼 많은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일을 평생 동안 지속했다는 점도 높이 살만한 부분이다. 그저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이룬 것이 아니라, 그가 사명감을 가지고 이러한 일들을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의지와도 연관된 부분일 것이라고 본다.
김 추기경이 스스로 가졌던 자신의 교리 철학과, 그 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용기와 의지도 청소년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김 추기경의 사회 교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의 추구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교리를 통해 모든 사회 구조나 정치 형태가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며, 동시에 평등한 권익을 보장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특권 의식과 배금주의를 버리며, 스스로 혁신과 정화의 근본이 되는 내면의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사회 교리의 실천으로, 그는 1970년대의 유신 체제 이래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던 인사들의 인권을 위해, 구국과 정의 회복을 위해,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언제나 노력하였다.
이처럼 김수환 추기경은 격동기에 처한 한국 사회 안에서 기본적인 국민의 자유와 인권 보장, 민주화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양심의 대변자로서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였다. 그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를 실천해 온 신앙인이었다.
이러한 김 추기경의 삶은, 물질만능주의나 권력의 상하관계가 분명한 삭막한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어떠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불굴의 의지 또한 청소년에게 몸소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삶의 전반의 모습이 그가 청소년에게 모델이 될 만한 사람임을 뒷받침 하고 있다.
4. 결론
가난한 시골 소년은 자신에게 놓인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고 추기경이라는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격동의 시대를 감싸 안고 살았으며, 7~80년대 민주화 열망의 한가운데에서 힘없고 가난하며 고통 받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따라서 김수환 추기경이 청소년들에게 긍정적인 모델이 될 만한 이유가 되는 삶의 모습 두 가지를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그 중 한 가지는 힘든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용기와 자신의 목표를
5) 복음화 운동 - \"실천하는 신앙인\"
추기경은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인사말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의 원칙을 밝혔다. 동시에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여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과 서민, 노동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다.
실제로 그는 대교구장 취임 직후부터 억압받고 가난한 민중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파행적인 정치 현실과 불확실한 노동 문제 등에 관한 강경 발언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인권 옹호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동안 서울대교구의 교세는 1968년 말에 48개 본당 14만여 명이던 것이 1997년 말에는 197개 본당 121만여 명을 기록하게 되었고, 성직자수는 590명으로 증가하였다.
아울러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순교자들의 현양과 시성을 위해서도 노력하였으며, 1984년 5월 6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방한을 계기로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행사와 함께 103위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81년의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 해외 선교 지원, 북한 동포 돕기 운동과 남북한 교회의 교류 활동, 1989년의 서울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 등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을 정착시키는 데 앞장섰다. 특히 세계 성체 대회를 기념하기 위해 1988년에 시작한 `한마음 한몸 운동\'은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교회 안팎으로 훌륭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
3.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모델링 「김수환추기경 이야기(증보판, 김수환 추기경 회고록)」, 김수환추기경, 평화방송평화신문, 2009.
「김수환추기경의 신앙과 사랑」, 천주교서울대교구, 가톨릭출판사, 1998.
김수환 추기경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청소년들이 그를 모델링할 만한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는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왔지만,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종교적인 이유로 불안하기만 했고, 아버지를 일찍 여의게 되었던 유년 시절, 그리고 목표를 지니고 공부를 시작한 후 그를 괴롭혔던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 상황,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그는 그가 목표했던 ‘성직자’가 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저 멈춘 것이 아니라, 외국 유학을 통해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은 노력을 쏟아 부으며 신부에서 주교로, 주교에서 추기경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이처럼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하여 자기계말을 하는 것, 이것은 청소년에게 우리가 살면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하는 지를 보여준다.
그가 그의 지위나 권력을 의식하지 않고 소외된 이들의 진정한 벗이 되어주었다는 점도 청소년들의 삶에 있어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높은 위치에서도 자신을 낮추고 우리가 아껴야 할 존재들에 대해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어른이었던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또한 언제나 김 추기경의 벗이었고, 따라서 김수환 추기경은 따뜻한 마음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장애인과 사형수들을 만났다. 또한, 어린 아이들을 위해 보육원도 설립하였으며, 강제 철거로 길거리에 나앉은 빈민들 또한 방문하였다. 그리고 농민과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였고, 우리 밀 살리기 운동에도 앞장을 섰다.
그리고 단순히 이처럼 많은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일을 평생 동안 지속했다는 점도 높이 살만한 부분이다. 그저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이룬 것이 아니라, 그가 사명감을 가지고 이러한 일들을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의지와도 연관된 부분일 것이라고 본다.
김 추기경이 스스로 가졌던 자신의 교리 철학과, 그 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용기와 의지도 청소년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김 추기경의 사회 교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의 추구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교리를 통해 모든 사회 구조나 정치 형태가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며, 동시에 평등한 권익을 보장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특권 의식과 배금주의를 버리며, 스스로 혁신과 정화의 근본이 되는 내면의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사회 교리의 실천으로, 그는 1970년대의 유신 체제 이래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던 인사들의 인권을 위해, 구국과 정의 회복을 위해,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언제나 노력하였다.
이처럼 김수환 추기경은 격동기에 처한 한국 사회 안에서 기본적인 국민의 자유와 인권 보장, 민주화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양심의 대변자로서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였다. 그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를 실천해 온 신앙인이었다.
이러한 김 추기경의 삶은, 물질만능주의나 권력의 상하관계가 분명한 삭막한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어떠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불굴의 의지 또한 청소년에게 몸소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삶의 전반의 모습이 그가 청소년에게 모델이 될 만한 사람임을 뒷받침 하고 있다.
4. 결론
가난한 시골 소년은 자신에게 놓인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고 추기경이라는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격동의 시대를 감싸 안고 살았으며, 7~80년대 민주화 열망의 한가운데에서 힘없고 가난하며 고통 받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따라서 김수환 추기경이 청소년들에게 긍정적인 모델이 될 만한 이유가 되는 삶의 모습 두 가지를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그 중 한 가지는 힘든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용기와 자신의 목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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