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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참고자료 1
웰컴투 동막골 - 잃어서는 안될 그 무언가를 위해...
참고자료 2
참고자료 3
참고자료 1
웰컴투 동막골 - 잃어서는 안될 그 무언가를 위해...
참고자료 2
참고자료 3
본문내용
혼자 살아남아 대장이 됐다는 리수화에게 가치 있는 전쟁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이는 남과 북, 연합군이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승리가 아닌 동막골을 지켜냈다는 하나의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 다르게 만났으면 진짜 재밌게 놀았을 것 같기로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병사들도 만만치 않지만 동막골에 모인 용사들은 체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일탈을 즐긴다. 워낙 바깥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어 외부와 접촉할 일이 없기 때문에 이들이 만나서 끝말잇기를 좀 하든 힘 모아 감자를 캐든 문제될 게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전쟁이라는 극한의 비극으로부터 상처 입은 이들은 싸울 줄 모르고 성낼 줄도 모르는 동막골 사람들에 의해 치유 받고 화해하게 된다. 수류탄의 안전 고리가 가락지인 줄 알고, 소총이 인사할 때 쓰는 작대기인 줄 아는 동막골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웃음에는 티가 없다. “고함 한번 지르지 않고 부락민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그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이 뭐요”라는 수화의 질문에 응하는 촌장 할아버지의 편안한 답변은, 전쟁뿐 아니라 현대의 모든 분주함을 일거에 해소해주는 공감대 넘치는 달관이었다. 주민들의 인생관과 군인·주민들 사이에 제각각 싹트는 연정, 군인들의 희생정신은 이 영화의 메시지인 듯 했다.
영화 속에서 강혜정이 연기하는 여일이라는 백치 소녀가 주는 매력은 이 영화를 통해 느끼는 즐거움의 핵심이었다. 소녀는 남과 북의 병사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대치한 영화 초반 상황에서 ‘쟈들하고 친구나?’ 라는 식의 뜬금없는 말로 상황을 뭉개버리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였다. 여일이 가지고 있는 순수함은 동막골을 대표하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수류탄 안전핀을 가락지로 쓰고 군인 앞에서 머리를 받아 버리는 순박함은 동막골 자체를 표현해 내고 있었다. 또 순간순간 동막골 안에서 전쟁의 현실들이 재현되려 할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소박한 웃음을 던지는 여일의 모습은 전쟁의 황폐함을 잊어버리게 했다.
동막골이라는 마을은 그 자체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이 영화의 감독은 달콤한 판타지를 슬쩍 끼워 넣어 이념도 전쟁도 감히 넘보지 못할 동막골이라는 매력만점의 행복한 마을을 만들어냈다. 오버의 극치를 보여주는 멧돼지 사냥 장면, 수류탄이 튀긴 팝콘이 눈꽃처럼 날리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로 꼽을 수 있다. 총부리를 겨눈 군인들에게 \'무슨 인사를 그리 해요\'라고 투덜대는 순하고 선한 마을 사람들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를 통해 \'동막골\'은 영화 속 상처 입은 군인들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사람들까지도 웃기고 당황시키다 결국 서서히 무장 해제 시키는 듯 했다.
그 과정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던 것은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기억 때문일 것이다. 마을에 온 외지인을 향해 \"어서오세요\"라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순박한 동막골 사람들. \"식사는 하셨냐\" 며 부족한 살림살이에도 그네들에게 배불리 밥을 챙겨 먹이는 훈훈한 인심. \'동막골\' 안에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살아있는 마을의 풍경은 지금은 잃어버린 우리 이웃의, 고향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웃음과 탄성을 연발하다가도 문득 눈시울이 붉어진 이유가 아니었을까?
연합군의 스미스가 마을 축제를 돌아보며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이 있었다. 스미스의 중얼거림은 우리의 마음 혹은 우리의 희망이다. 그 중얼거림은 비단 그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혹은 그 연장선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의 고단한 삶으로 확장시켜도 좋을 것이다. <웰컴 투 동막골>은 바로 그 희망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영화라 생각한다.
있거나 있음직한 이야기보다 있었으면 하는 이야기에 더 끌릴 때가 있다. 사는 게 답답할 때에는, 세상 돌아가는 낌새가 영 마땅치 않을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한 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에 젖어들어 얼마간의 감동과 위안을 얻고자 하는 건 희망을 충전하기 위함일 것이다. 주제넘게 영화를 평할 처지는 못 되지만 \'동막골\'의 특별한 매력 하나쯤은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불화를 녹여내고도 남을 완충지대의 넉넉함이 그 것이다. 대립과 격돌로 지새는 세상을 살다보니 가상의 공간에서나마 어울림의 행복을 누려보고자 하는 건 아닐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누구에게나 \'동막골\'은 있다. 그 것이 가족이든, 친구든, 동료든, 또 다른 누구든.. 우리에게는 그들이 있어 삶을 지탱하고 희망을 충전할 수 있다.
참고자료 1
웰컴투 동막골 - 잃어서는 안될 그 무언가를 위해...
히사아시 조의 음악탓이었을까?
아니면 가슴시리도록 푸른 하늘 탓이었을까?
웰컴투 동막골을 보는 내내 미야지키 하야오의 영화들이 오버랩됐다.
남과 북이 서로 대치되며 한민족이라고 일컬어지던 이들이 총부리를 겨누던 한국전쟁은 분명 비극이다. 문제는 그 비극의 원인이 그리고 그 비극을 바라보는 시각이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었다는 데 있다.
일제의 잔혹한 압박에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남한이 평화롭게 살던 그때 북한의 느닷없는 남침은 분명 남한의 입장에서는 이해불가한 행위였고, 분노할수 밖에 없는 행위였다. 우린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성장했으며 아직도 그들의 행위를 만행이라 부르며 증오한다.
하지만 사회주의에 충실했던 북한의 입장에서 과연 남한은 어땠을까? 나는 지난 30여년을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그들의 전쟁발발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만일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의해 겨우 해방된 조국이 일제의 앞잡이들에 의해 다시 통치되는 당시 남한의 이승만 정부를 지켜봤다면 과연 그들은 남한 정부를 용납할수 있었을까? 말 그대로 친일주의자들을 몰아내고 진정한 조국의 통일을 염원했을수도 있다. 막스의 폭력혁명에 충실했던 당시의 상황이라면 남침이라는 명목은 오히려 그들에게 자연스럽고 당연했을수도 있다. 물론 우리의 입장에서는 용납될수 없는 일이었지만...
내가 북에 대한 반감은 갖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건 마치 내가 이승만과 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에 대한 반감과 같다. 그것은 바로 통치자가 자기 스스로를 우상화했다는 점이다.
두 체제의 행보가 어떠했던지 간에
다른 곳에서 다르게 만났으면 진짜 재밌게 놀았을 것 같기로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병사들도 만만치 않지만 동막골에 모인 용사들은 체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일탈을 즐긴다. 워낙 바깥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어 외부와 접촉할 일이 없기 때문에 이들이 만나서 끝말잇기를 좀 하든 힘 모아 감자를 캐든 문제될 게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전쟁이라는 극한의 비극으로부터 상처 입은 이들은 싸울 줄 모르고 성낼 줄도 모르는 동막골 사람들에 의해 치유 받고 화해하게 된다. 수류탄의 안전 고리가 가락지인 줄 알고, 소총이 인사할 때 쓰는 작대기인 줄 아는 동막골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웃음에는 티가 없다. “고함 한번 지르지 않고 부락민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그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이 뭐요”라는 수화의 질문에 응하는 촌장 할아버지의 편안한 답변은, 전쟁뿐 아니라 현대의 모든 분주함을 일거에 해소해주는 공감대 넘치는 달관이었다. 주민들의 인생관과 군인·주민들 사이에 제각각 싹트는 연정, 군인들의 희생정신은 이 영화의 메시지인 듯 했다.
영화 속에서 강혜정이 연기하는 여일이라는 백치 소녀가 주는 매력은 이 영화를 통해 느끼는 즐거움의 핵심이었다. 소녀는 남과 북의 병사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대치한 영화 초반 상황에서 ‘쟈들하고 친구나?’ 라는 식의 뜬금없는 말로 상황을 뭉개버리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였다. 여일이 가지고 있는 순수함은 동막골을 대표하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수류탄 안전핀을 가락지로 쓰고 군인 앞에서 머리를 받아 버리는 순박함은 동막골 자체를 표현해 내고 있었다. 또 순간순간 동막골 안에서 전쟁의 현실들이 재현되려 할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소박한 웃음을 던지는 여일의 모습은 전쟁의 황폐함을 잊어버리게 했다.
동막골이라는 마을은 그 자체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이 영화의 감독은 달콤한 판타지를 슬쩍 끼워 넣어 이념도 전쟁도 감히 넘보지 못할 동막골이라는 매력만점의 행복한 마을을 만들어냈다. 오버의 극치를 보여주는 멧돼지 사냥 장면, 수류탄이 튀긴 팝콘이 눈꽃처럼 날리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로 꼽을 수 있다. 총부리를 겨눈 군인들에게 \'무슨 인사를 그리 해요\'라고 투덜대는 순하고 선한 마을 사람들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를 통해 \'동막골\'은 영화 속 상처 입은 군인들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사람들까지도 웃기고 당황시키다 결국 서서히 무장 해제 시키는 듯 했다.
그 과정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던 것은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기억 때문일 것이다. 마을에 온 외지인을 향해 \"어서오세요\"라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순박한 동막골 사람들. \"식사는 하셨냐\" 며 부족한 살림살이에도 그네들에게 배불리 밥을 챙겨 먹이는 훈훈한 인심. \'동막골\' 안에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살아있는 마을의 풍경은 지금은 잃어버린 우리 이웃의, 고향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웃음과 탄성을 연발하다가도 문득 눈시울이 붉어진 이유가 아니었을까?
연합군의 스미스가 마을 축제를 돌아보며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이 있었다. 스미스의 중얼거림은 우리의 마음 혹은 우리의 희망이다. 그 중얼거림은 비단 그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혹은 그 연장선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의 고단한 삶으로 확장시켜도 좋을 것이다. <웰컴 투 동막골>은 바로 그 희망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영화라 생각한다.
있거나 있음직한 이야기보다 있었으면 하는 이야기에 더 끌릴 때가 있다. 사는 게 답답할 때에는, 세상 돌아가는 낌새가 영 마땅치 않을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한 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에 젖어들어 얼마간의 감동과 위안을 얻고자 하는 건 희망을 충전하기 위함일 것이다. 주제넘게 영화를 평할 처지는 못 되지만 \'동막골\'의 특별한 매력 하나쯤은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불화를 녹여내고도 남을 완충지대의 넉넉함이 그 것이다. 대립과 격돌로 지새는 세상을 살다보니 가상의 공간에서나마 어울림의 행복을 누려보고자 하는 건 아닐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누구에게나 \'동막골\'은 있다. 그 것이 가족이든, 친구든, 동료든, 또 다른 누구든.. 우리에게는 그들이 있어 삶을 지탱하고 희망을 충전할 수 있다.
참고자료 1
웰컴투 동막골 - 잃어서는 안될 그 무언가를 위해...
히사아시 조의 음악탓이었을까?
아니면 가슴시리도록 푸른 하늘 탓이었을까?
웰컴투 동막골을 보는 내내 미야지키 하야오의 영화들이 오버랩됐다.
남과 북이 서로 대치되며 한민족이라고 일컬어지던 이들이 총부리를 겨누던 한국전쟁은 분명 비극이다. 문제는 그 비극의 원인이 그리고 그 비극을 바라보는 시각이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었다는 데 있다.
일제의 잔혹한 압박에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남한이 평화롭게 살던 그때 북한의 느닷없는 남침은 분명 남한의 입장에서는 이해불가한 행위였고, 분노할수 밖에 없는 행위였다. 우린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성장했으며 아직도 그들의 행위를 만행이라 부르며 증오한다.
하지만 사회주의에 충실했던 북한의 입장에서 과연 남한은 어땠을까? 나는 지난 30여년을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그들의 전쟁발발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만일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의해 겨우 해방된 조국이 일제의 앞잡이들에 의해 다시 통치되는 당시 남한의 이승만 정부를 지켜봤다면 과연 그들은 남한 정부를 용납할수 있었을까? 말 그대로 친일주의자들을 몰아내고 진정한 조국의 통일을 염원했을수도 있다. 막스의 폭력혁명에 충실했던 당시의 상황이라면 남침이라는 명목은 오히려 그들에게 자연스럽고 당연했을수도 있다. 물론 우리의 입장에서는 용납될수 없는 일이었지만...
내가 북에 대한 반감은 갖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건 마치 내가 이승만과 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에 대한 반감과 같다. 그것은 바로 통치자가 자기 스스로를 우상화했다는 점이다.
두 체제의 행보가 어떠했던지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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