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실학사상의 학문적 배경 및 성격
*연암 박지원
*연암 박지원
본문내용
식하는 양반을 비판하고 노비들의 참상을 고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양반의 특수한 신분적 지위 차체를 직접 부정하지는 않았고, 노비제의 폐지를 주장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신분적·시대적 한계를 볼 수 있다.
박지원의 개혁론은 산업 분야에서도 유사한 논리로 제기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우선 주목되는 것은 농업 분야에 관한 개혁론이다. 그는 "옛날부터 뜻있는 사람의 한이 부호들의 토지겸병에 있다"고 단언하였다. 토지겸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제기한 '한전번(限田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토지겸병을 억제하기 위하여 토지소유의 상한을 법으로 정하고, 상한 이상의 새로운 토지매입은 엄금한다. 둘째, 이정에 사들인 토지는 그것이 상한선을 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불문에 붙이고, 이 법이 실행되기 이전이라면 여러 자식들에게의 분할상속을 실제로 이행하지 않은 것도 허용한다. 셋째, 이 법을 지키지 않는 자의 토지는 몰수한다. 이렇게 하면 수십 년이 못되어 나라 안의 토지소유가 균등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이 한전법은 실행가능성을 중시한 토지개혁안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지만, 일정한 문제점과 한계도 갖는 것이었다. 그의 발상은 토지소유 상한의 설정과 분할상속제를 핵심으로 하는데, 후자는 기본적으로 전자의 규정을 받는다. 상한을 어느 정도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분할상속제가 토지소유의 분산을 야기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는 토지소유 상한선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남기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수공업·상업 부문에 관한 그의 개혁론은 아직 체계적이라기보다는 단편적인 언급에 불과하지만, 사상사 면에서 불 때 좀더 돋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공·상의 중요성을 인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중국의 벽돌과 기와가 간편하고 견고하다는 등 누차에 걸쳐 발달한 중국인의 기술을 찬탄해 마지않았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기술은 그릇 굽는 법에 이르기까지 낙후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저들의 기술을 배워올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수공업의 발전을 촉구하는 언급들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나라는 배가 외국과 토하지 못하고 수래가 나라안을 다니지 못한다"고 하여 국내의 통상부진을 문제점으로 지적하였다. 그리고 "사방이 겨우 몇 천리밖에 안되는 나라에 백성의 살림살이가 이다지 가난함은 한 말로 표현하여 수레가 나라안을 다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하기도 하였는데, 이 말은 직접으로는 생산물이 산지와 소비지 사이에 유통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수레의 사용으로 표현되는 상업의 발달이 생산을 촉진시킬수 있다는 의미로 적극적으로 해석될 여지도 갖는다.
박지원의 사상에는 18세기 후반기 조선의 사회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당시는 오랫동안 유지되어오던 조선의 중세체제가 해체되고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그는 그 과정에서 나타난 사리모순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풍자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확립하였다. 결국 박지원은 조선시대 사상사에 있어서 주자주의적 사상풍토의 극복과정에 기여한 사상가라 할 수 있다. 그가 홍대용·박제가 등과 더불어 확립한 북학론은 이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준다. 그것은 다음세대에 순조롭게 계승·발전되지는 못했지만,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개화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침으로써 우리 근대사상 형성의 단초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실학은 유학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던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근대지향적'이고 '민족적'인 성격의 개혁론으로서 종래의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경향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실학이 동양적 중세사유의 해소와 근대사유의 형성 사이에 개재했던 사상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박지원의 개혁론은 산업 분야에서도 유사한 논리로 제기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우선 주목되는 것은 농업 분야에 관한 개혁론이다. 그는 "옛날부터 뜻있는 사람의 한이 부호들의 토지겸병에 있다"고 단언하였다. 토지겸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제기한 '한전번(限田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토지겸병을 억제하기 위하여 토지소유의 상한을 법으로 정하고, 상한 이상의 새로운 토지매입은 엄금한다. 둘째, 이정에 사들인 토지는 그것이 상한선을 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불문에 붙이고, 이 법이 실행되기 이전이라면 여러 자식들에게의 분할상속을 실제로 이행하지 않은 것도 허용한다. 셋째, 이 법을 지키지 않는 자의 토지는 몰수한다. 이렇게 하면 수십 년이 못되어 나라 안의 토지소유가 균등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이 한전법은 실행가능성을 중시한 토지개혁안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지만, 일정한 문제점과 한계도 갖는 것이었다. 그의 발상은 토지소유 상한의 설정과 분할상속제를 핵심으로 하는데, 후자는 기본적으로 전자의 규정을 받는다. 상한을 어느 정도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분할상속제가 토지소유의 분산을 야기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는 토지소유 상한선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남기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수공업·상업 부문에 관한 그의 개혁론은 아직 체계적이라기보다는 단편적인 언급에 불과하지만, 사상사 면에서 불 때 좀더 돋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공·상의 중요성을 인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중국의 벽돌과 기와가 간편하고 견고하다는 등 누차에 걸쳐 발달한 중국인의 기술을 찬탄해 마지않았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기술은 그릇 굽는 법에 이르기까지 낙후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저들의 기술을 배워올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수공업의 발전을 촉구하는 언급들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나라는 배가 외국과 토하지 못하고 수래가 나라안을 다니지 못한다"고 하여 국내의 통상부진을 문제점으로 지적하였다. 그리고 "사방이 겨우 몇 천리밖에 안되는 나라에 백성의 살림살이가 이다지 가난함은 한 말로 표현하여 수레가 나라안을 다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하기도 하였는데, 이 말은 직접으로는 생산물이 산지와 소비지 사이에 유통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수레의 사용으로 표현되는 상업의 발달이 생산을 촉진시킬수 있다는 의미로 적극적으로 해석될 여지도 갖는다.
박지원의 사상에는 18세기 후반기 조선의 사회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당시는 오랫동안 유지되어오던 조선의 중세체제가 해체되고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그는 그 과정에서 나타난 사리모순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풍자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확립하였다. 결국 박지원은 조선시대 사상사에 있어서 주자주의적 사상풍토의 극복과정에 기여한 사상가라 할 수 있다. 그가 홍대용·박제가 등과 더불어 확립한 북학론은 이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준다. 그것은 다음세대에 순조롭게 계승·발전되지는 못했지만,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개화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침으로써 우리 근대사상 형성의 단초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실학은 유학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던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근대지향적'이고 '민족적'인 성격의 개혁론으로서 종래의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경향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실학이 동양적 중세사유의 해소와 근대사유의 형성 사이에 개재했던 사상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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