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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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교회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름 몇몇만 생각해 봐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가 위대한 부흥 운동에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인식되어 오지 못했다. 성령의 사역으로 미국에서만도 적어도 100만 명의 회심자가 하나님의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엄청난 영향력은 아무리 과장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A.M 렌위크 외, 오창윤 역, 「간추린 교회사」,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2), 188-190.
2) 진행
제 3차 각성 운동은 19세기 후반에 ‘드와이트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99)’로 말미암아 일어난 부흥 운동을 지칭한다. 무디는 보스톤에서 1854년부터 1856까지 그의 삼촌의 구두 가게에서 점원 일을 하였다. 삼촌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1856년 교회 회원이 되었다. 그의 회심이 조용하고 단순하며, 감정적인 면이 없었으나 그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그 해 9월 무디는 시카고로 이사하여 플리머스 회중교회로 나갔다. 무디는 긴 의자 넷을 세내어 주일 아침마다 거리에서 혹은 하숙집에서 사람들을 모아 앉히고는 성경을 가르쳤다. 얼마 안 가서 큰 집회 장소(North Market Hall)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하여, 1,500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1861년 그는 생업을 버리고 전도자의 길로 나섰다. 남북 시민전쟁이 끝나자 그는 시카고 Y.M.C.A.의 총무로 일하면서 복음 전파에 전념하였다. Y.M.C.A.는 1844년 잉글랜드에서 조지 윌리엄스(George Williams)에 의하여 창설된 기관이다. 1870년 그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던 가수 생키와 손을 잡았다. 1873년 이 두 사람은 영국에 가서 거의 모든 대도시들과 일부 작은 읍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무디의 복음 소개는 전혀 인기 전술적인 면이 없었다. 그러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식자와 무식자, 부자와 가난한 자 등 모든 계층의 남녀들에게 감동을 주는 방식이었다. 이 두 전도자들은 몇 년 간격으로 영국을 몇 번 방문했는데, 항상 똑같은 위대한 결실이 나타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을 고백했다. 미국에서도 그들의 영향력은 막대하였다.
무디의 설교는 아주 소박하면서 미국의 낙관주의와 복음주의적인 알미니안주의 요소를 띤 것이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청중들에게 영생은 당신네들의 것이라고 하면서 믿는 자는 앞으로 나와서 취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어느 교회이든 교회로 나가도록 권유하였다. 무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교하고 죄인의 회개를 촉구하면서 구원을 취하라고 역설하였다. 그 밖에 도덕적인 생활은 이차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개인이 구원을 받았을 때 자연히 따르게 마련인 것으로 여겼다. 무디는 ‘위대한 19세기’의 사람들로 하여금 선교에 헌신하고자 하는 열정을 갖도록 불을 붙이는 일에 종사한 위대한 부흥사이다.
1829년 무디가 은퇴한 이후 채프만(J. Wilbur Chapman), 토레이(Reuben A. Torrey)등이 부흥사로 활동하였으나, 무디와 같지는 못했다. 윌리엄 애쉴리 선데이(William Ashley Sunday, 1863~1935)는 야구 선수 출신으로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 야구계를 떠나 1891년 시카고 Y.M.C.A.의 부총무가 되었다. 그리고 두 해 후에는 채프만의 부흥 팀의 간사 일을 보았다. 1895년 채프만이 은퇴하면서 그를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선데이는 부흥회를 조직화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3) 결과
무디 중심의 부흥운동은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회심으로 연결시켰다. 이 시대의 영적 각성의 결과로 ‘케스윅 운동(Keswick Movement)’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은 무디의 사역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지만 그의 사역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니었다. 1874년과 1875년, 우팜(T.C. Upham), 아사 마한(Asa Mahan), 그리고 보드맨(W.E. Boardman)등 세 사람의 미국인들이 성령 충만한 생활의 중요성에 관하여 쓴 글을 읽고 영향을 받은 여러 명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이 주제에 관한 특별 강연회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초기 모임에서 큰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쿰버랜드(Cumberland)의 케스윅의 교구 목사 하포드 베터스비(Harford- Battersby)와, 같은 지역에 있는 워킹톤(Workington)에 살았던 퀘이커교도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등이다. 그들은 케스윅에서 모임을 소집하기로 결정하고 1875년에 그 작은 회합을 처음으로 열었다. 그 후부터 두 차례의 세계 대전 기간을 제외하고는 매년 같은 장소에서 이 대회가 열렸으며 그 영향력은 전제계적이었다. 해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조그만 호반의 도시에 모였으며 이와 유사한 모임들이 세계 전역에서 \"케스윅\"이라는 이름으로 모이곤 했다. 이렇게 19세기 이후의 부흥 운동은 개신교의 교회 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그 때 수많은 회심자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교회의 문 안에 발을 들여놓게 하였으며 이후로도 계속적인 부흥집회가 이어졌다. 이렇게 몇 년 동안 교회 출석자가 늘어나고 미국 전체적으로 종교생활이 증가했다. A.M 렌위크 외, 오창윤 역, 「간추린 교회사」, 191-192.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미국의 기독교 부흥을 위한 운동은 활발히 계속되었다. 1911년에는 650명의 부흥사가 활동하였으며, 1,200명의 시간제로 봉사하는 운동원들이 부흥회를 위하여 종사하였다. 1912년부터 1918년까지 3만5천 회의 부흥집회가 열렸으며, 1914~1917년에는 복음주의 교회가 매해 2천만 달러를 천막부흥집회(Professional Tabernacle Evangelism)를 위하여 지출하기도 했다. 김영재, 642-644.
[참고3] 미국의 19-20세기 부흥운동의 중심 인물들 로버트 C. 월톤, 고덕상 역, 앞의 책, 84.
이름
시기
출생지
소속교파
주요사항
드와이트 무디
1837-1899
메사추세스주 노드필드
독립교회
노드필드학교 설립(1879년), 헐몬산학교 설립(1881년), 시카고 복음화단체 설립(현, 무디 성경신학원 1886년), 7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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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6.21
  • 저작시기20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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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4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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