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본질 개념 전반에 대한 연구 (그리스도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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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학의 본질 개념 전반에 대한 연구 (그리스도 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상>에로 퇴락한 비본래적 실존은 현존재 자체를 위기에 몰아넣고, 인간을 <참 나>로부터 떼어 놓는다. 인간은 이러한 <퇴락>속에서 새 가능성 [신]과의 만남을 위한 자기 개방은 물론, 선택의 자유마저 포기하고, 이와 함께 본래적인 자기도 포기한다. 인간의 자기부정, 이것이야말로 죄가 아닐 수 없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로마서 6,5)는 바울로의 고백은 결국 죄의 세력에 팔려 노예가 된 인간의 <자기상실>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기살실은 마침내 인간의 자기포기를 결과한다. 곧 자기를 살지 않으려는 것, 그것이 바로 죄이다. 신을 상실한 인간은 그의 존재의 바탕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마침내 <자기상실>을 결과한다는 것은 사회심리학자나, 성서학자가 다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으로부터의 소외가 몰고 온 자기소외의 부정적 측면의 또 하나는, 자기동일서을 상실한 자아가 어떻게든지 자기분열이나 자기상실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자신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으려는 자기절대화를 망상하는 일이다. 신에게로의 자기고양, 이것을 그리이스말로는 휘브리스(hybris)라고 부르는데, 이것이야말로 모든 죄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휘브리스>가 신에게로의 자기고양, 곧 인간의 자기 신화를 의미한다면, 이것은 상대를 절대화하는 자기 우상으로 귀결되는데, 이것은
비인간화의 극치이다. 사람이 <신>이 되려는 거은 사람을 가장 사람 아닌 것으로 만든다. 우상으로 표명된 사람의 자기신화의 소외현상은 신을 인간성의 객관적인 투영으로 보는 포이에르바하의 진단에서 새로운 국면을 보인다. “신이 더 주체적이고, 더 인간적일수록 인간은 더욱 더 자기의 주체석과 인간성에서 소외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신>에 대한 우상성을 근거를 인간학적으로 밝혀주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신>을 예배한다는 것이 사실은 인간성을 예배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신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이 신이 되려는 퓌브리스의 행위나, 신 아닌 것을 신으로 높이려는 우상화의 작태를 <죄>라고 한다면, 그것은 모두 자기의 바탕을 잃어버린 데서 오는 자기 소외의 역기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니버는 <교만>(pride)를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한다. 첫째, 권력의 교만은 인간이 자기 충족과 자기 통제를 전제한 자기 안전을 자신함으로써 자기의 생명의 유한하고 의존적인 특성을 망각하고, 자신을 자기 창조자이며, 자기 운명의 주관자로서 믿는 데서 비롯된다. 둘째, 인간의 지적 교만은 권력의 교만을 더욱 정신화한 것인데, 인간의 참 지식은 ‘이데올로기기적 오염’이란, 지식이 지배계층의 권력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서 이용되는 것을 말한다. 셋째, 도덕적 교만은 이미 지적 교만 속에 들어 있다. 나의 선을 무조건적인 도덕의 가치로서 확립하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남의 행동이 자기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악하다는 것이다. 넷째, 그러나 교만의 죄 가운데 가장 궁극적인 것은 자기를 신격화하는 종교적 교만이다. 이것은 인간의 지식의 편협성이 무조건적인 선과 결합되어서 <신의 재가>를 얻으려고 한데서 이루어 진다. 모든 편협, 독단, 독선, 자만, 잔혹성의 최후의 형태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수행된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권력, 지식, 도덕의 교만은 이<종교적 교만>에서 연유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니버는 <집단의 교만>을 중시한다. 사회적 집단이나 정치적 집단치고 자기중심적이고 우상숭배적이 아닌 것이 거의 없다. 집단은 그의 제약된 가치를 무조건적인 것으로 주장하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든 다음의 보기는 매우 풍자스럽다. 알렉산더가 그에게 잡힌 해적에게 “너는 어찌하여 바다를 어지럽혔느냐”고 물었다. 해적은 힘있게 대답했다. “당신은 어찌해서 세계를 어지럽혔습니까? 나는 작은 배로써 그렇게 했기 때문에 <도적놈>이라고 일컬어지지만, 당신은 막강한 해군으로써 그렇게 했기 때문에 <정복자>라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국가와 꼭 마찬가지로 <교회>도 집단적 이기주의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국가주의의 방종은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한 반동으로 간주되어야한다. 그리스도교가 살아 있다면 국가주의에 대한 신의 심판을 서습치 않고 외쳐야할 것이다. 휘브리스는 유한함과 무한함, 불완전함과 완전함을 일치시키려는 데서 발단한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모두 사람이 실존적으로 자기를 긍정하고 싶어하는 욕구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세계를 자신 안으로 이끌어 들여서 거기에 자신이 <왕>으로 군림하려는 욕망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곧 세계의 중심이 되어보겠다는 것이고, 그것도 <무제한으로>그 자리를 누리자는 것이다. 자신의 특수성을 보편적인 것으로 높이려는 욕구, 있는 것 모두를 자기에게로 끌어들이려는 무한한 욕망, 이것을 고전적 명칭으로는 concupiscentia라고 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콘큐피센티아라는 말을 성적 쾌락에의 충동 곧 육욕을 뜻하는 것으로 좁혀 생각하여 죄로 단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욕망에 대한 실제적 의미를 잘못 안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욕망은 죄가 아니라, 극서의 악용이나 남용이 죄가 된다는 말이다. 성의 죄됨은 인간이 자기의 존재근거인 신으롭터 떠나서 참 자기를 잃어버렸을 때, 자기의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해 <성>에 자기를 위탁한데서 성립된다. 지식이든 성이든 권력이든 소유든 여기에 대한 무한한 욕구는 창조적 기능을 발휘할 때 비로소 사람을 <사람으로서> 풍요하게 하지만, 만일 그것이 역기능으로 나타날 땐 사람을 <사람 아닌 것으로> 만드는 죄를 낳게 되리라는 것은 뚜렷하다. 욕구 자체가 죄가 아니라, 욕구의 남용이 죄다. 이것은 모든 생리적 욕구 뿐 아니라 <실존하려는 욕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교에서는, 인간의 죄는 ‘타락’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인간을 타락하게 한 계기가 유혹이 된다는 것이다. <유혹>이 타락의 계기가 되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이 유혹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소지를 가지고 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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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8.03
  • 저작시기2009.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47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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