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1. 소수자에 대한 정의
2. 성적 소수자
3. 롤리타 콤플렉스는 무엇인가
4. 왜 이들이 소수자인가?
5.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6. 이 소수자 문제의 사회적 중요성은 무엇인가?
본론
1. 롤리타 콤플렉스의 실제 현황
2. 롤리타 콤플렉스를 권하는 사회
3. 로리타 콤플렉스의 원인
4. 이 소수자 문제의 해결을 위한 사회적, 정책적 노력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5. 이 소수자 문제를 위한 합리적인 해결책은 무엇인가?
결론
1. 소수자에 대한 정의
2. 성적 소수자
3. 롤리타 콤플렉스는 무엇인가
4. 왜 이들이 소수자인가?
5.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6. 이 소수자 문제의 사회적 중요성은 무엇인가?
본론
1. 롤리타 콤플렉스의 실제 현황
2. 롤리타 콤플렉스를 권하는 사회
3. 로리타 콤플렉스의 원인
4. 이 소수자 문제의 해결을 위한 사회적, 정책적 노력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5. 이 소수자 문제를 위한 합리적인 해결책은 무엇인가?
결론
본문내용
적 자본주의와의 대면하길 회피하는 일이다.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일 것이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의 비판적인 대결 자체에 매달려야 한다. 왜냐면 그것이 정치의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로 살 수 있는 권리, 장애자로 살 수 있는 권리, 여성으로 살 수 있는 권리는 결국 각자의 생물학적인 필연성, 즉 쾌락, 건강, 장수, 편익 등의 다양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이다. 따라서 차이의 권리란, 인종적 차이의 자명함에 기대어 각각의 다른 주체들이 최대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리킨다. 이를 보다 밀고 나가자면 “다르게 살 수 있는 권리”란 다를 수 있는 권리라기보다는 사실은 “살 수 있는 권리”, 더 신중하게 말하자면, 최대한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실제적인 쾌락의 권리를 가리킬 뿐이다. 물론 그런 행복할 권리란 개념 자체를 해부하려 덤벼드는 것은 무용한 짓이다. 문제는 행복한 삶 혹은 “좋은 삶(good life)”이 무엇인지 확정하고 객관화시키는 권력과 그 담론이 무엇인지 헤아려내는 것이다. 행복한 삶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대상으로 객관화되어야 하고, 그런 인식가능성을 정의하고 관장할 수 있는 담론 역시 결정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미 말했듯이 좋은 삶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은 정치의 차원에 달려있다기보다는 결국 언제나 생물학의 차원에 달려있게 된다.
6. 이 소수자 문제의 사회적 중요성은 무엇인가?
다양하다는 것, 차이가 난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바디우의 주장은, 자유주의적인 다문화주의가 팽배한 우리 시대의 윤리적 풍경을 생각해 본다면, 적잖이 충격적이다. 그는 특유의 단정적인 어투로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사고는 다음의 사실을 긍정해야 한다. 차이들은 주어져 있는 것이고, 모든 진리는 앞으로 존재하게 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차이들이란 바로 모든 진리가 내버리는 것, 또는 의미 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떠한 구체적 상황도 ‘타자의 인정’이라는 주제를 통해 해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의 모든 집합적 형세 속에서, 도처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다른 것들을 먹고, 여러 가지 언어로 말을 하며, 다양한 모자들을 쓰고 다니고, 상이한 의례들을 수행하며, 복잡하고도 다양한 성행위를 행하고, 권위를 사랑하거나 또는 무질서를 사랑하거나 하는 것이며, 세상은 그와 같이 진행되는 것이다.” 맞다! 중국 농민과 노르웨이의 젊은 관리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나와 다른 어떤 누구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의 말을 쫓을 때, 다르다는 것은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세계에 달리 새로운 무엇을 부가하는 원리이거나 심지어 철학적 사유의 흉내를 내는 어떤 윤리로 자신을 치장해서는 안된다. 평범한 있음의 사실성을 긍정하는 것에 불과한 차이의 윤리란 고작해야 현존하는 사물과 세계의 상태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세련된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차이와 다양성은 “인권의 문화”와 더불어 우리 시대 교리문답의 핵심적인 조항이 되었다. 그 때문에 차이와 다양성을 의견이랄 것까지도 없는 그저 평범하고 시시한 현상 유지의 발언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윤리적 상식과 괴리될뿐더러 심지어 듣는 이를 당혹스럽게 한다. 안타깝지만 이 글에서 우리는 왜 차이와 다양성의 윤리가 당연한 우리 시대의 덕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자세히 짚어볼 여유가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매우 진지하게 반성하여야 할 문제이며, 심지어 윤리적인 것에 관한 사유의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 “본연의 윤리”를 되찾으려 한다면 피하지 않아야 할 질문이란 점은 강조해 두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바디우 식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우리 시대의 다양성과 차이의 윤리가 왜 우리 시대의 몽매주의인지를 반성해보고자 하는 짧은 시도이다.
본론
1. 롤리타 콤플렉스의 실제 현황
이것은 인터넷에서 한 네티즌이 글을 올린 것이다. 자신이 롤리타 콤플렉스 라는 개념을 알게 된 후,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털어 놓은 것이다. 원래는 롤리타 콤플렉스를 자처하는 한 네티즌의 글을 읽고, 자신의 견해와 자신의 경험, 상황 등을 써놓았다.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개념이 생긴 이후,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서 이 현상은 더욱 더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
2. 롤리타 콤플렉스를 권하는 사회
몇 년 전 인터넷에는 5, 6살쯤 되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스타로 떠올랐다. 앙증맞도록 귀여운 아이들의 사진이 유행을 하고 사진 속의 포즈는 도를 더해 세미누드에 가까운 모습까지 등장했다. 이런 흐름은 매스컴에도 반영되어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 모델들이 상품광고에 단골로 등장했다. 일례로 이런 모델 중 하나인 혜원이(8살)는 까페 회원수만 4만 명 이상의 인기 스타이다. 유독 예쁘장한 여자아이들이 부각되는 문화현상, 이것은 단순히 어린아이의 귀여움에 대한 선호를 넘어선 은밀한 욕망과 연결되는 측면이 존재한다. 많은 영화, 혹은 문화평론가들이 언급했듯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로리타 콤플렉스\'가 숨어 있다. \'로리타 콤플렉스\'란 아직 성인이 되기 전의 여자 아이, 특히 10세 이하 또는 10대 초반의 미성숙한 소녀에 대해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심리를 말한다. \'로리타\'는 러시아계 미국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Bladimir Navokov)\"가 1954년 발표한 소설 <로리타(Lolita)>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일본에서 다소곳하고 청순가련한 소녀에 대해 동경하는 심리에 인용해 \'롤리타 콤플렉스\' 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출시된 이수영 뮤직비디오 <꿈에>는 로리타 콤플렉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지탄을 받았다. 6살 어린 여자아이가 진하게 마스카라를 칠하고 새빨간 립스틱을 칠한 채로 긴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성인 여성의 목소리로 \"오늘 밤에 그대여, 와요\"라고 끈적끈적하게 노래를 부르는 장면. 뮤직비디오 제작진은 내용상 성인 여성의 영혼이 빙의된 것이라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만 뮤직비디오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지는 진한 화장과 야릇한 포즈의 어린아이 모습이, 그 조그만 입에서 불려지는 노래 가사가 진정 의도하는 바는 섬
동성애자로 살 수 있는 권리, 장애자로 살 수 있는 권리, 여성으로 살 수 있는 권리는 결국 각자의 생물학적인 필연성, 즉 쾌락, 건강, 장수, 편익 등의 다양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이다. 따라서 차이의 권리란, 인종적 차이의 자명함에 기대어 각각의 다른 주체들이 최대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리킨다. 이를 보다 밀고 나가자면 “다르게 살 수 있는 권리”란 다를 수 있는 권리라기보다는 사실은 “살 수 있는 권리”, 더 신중하게 말하자면, 최대한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실제적인 쾌락의 권리를 가리킬 뿐이다. 물론 그런 행복할 권리란 개념 자체를 해부하려 덤벼드는 것은 무용한 짓이다. 문제는 행복한 삶 혹은 “좋은 삶(good life)”이 무엇인지 확정하고 객관화시키는 권력과 그 담론이 무엇인지 헤아려내는 것이다. 행복한 삶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대상으로 객관화되어야 하고, 그런 인식가능성을 정의하고 관장할 수 있는 담론 역시 결정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미 말했듯이 좋은 삶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은 정치의 차원에 달려있다기보다는 결국 언제나 생물학의 차원에 달려있게 된다.
6. 이 소수자 문제의 사회적 중요성은 무엇인가?
다양하다는 것, 차이가 난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바디우의 주장은, 자유주의적인 다문화주의가 팽배한 우리 시대의 윤리적 풍경을 생각해 본다면, 적잖이 충격적이다. 그는 특유의 단정적인 어투로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사고는 다음의 사실을 긍정해야 한다. 차이들은 주어져 있는 것이고, 모든 진리는 앞으로 존재하게 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차이들이란 바로 모든 진리가 내버리는 것, 또는 의미 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떠한 구체적 상황도 ‘타자의 인정’이라는 주제를 통해 해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의 모든 집합적 형세 속에서, 도처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다른 것들을 먹고, 여러 가지 언어로 말을 하며, 다양한 모자들을 쓰고 다니고, 상이한 의례들을 수행하며, 복잡하고도 다양한 성행위를 행하고, 권위를 사랑하거나 또는 무질서를 사랑하거나 하는 것이며, 세상은 그와 같이 진행되는 것이다.” 맞다! 중국 농민과 노르웨이의 젊은 관리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나와 다른 어떤 누구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의 말을 쫓을 때, 다르다는 것은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세계에 달리 새로운 무엇을 부가하는 원리이거나 심지어 철학적 사유의 흉내를 내는 어떤 윤리로 자신을 치장해서는 안된다. 평범한 있음의 사실성을 긍정하는 것에 불과한 차이의 윤리란 고작해야 현존하는 사물과 세계의 상태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세련된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차이와 다양성은 “인권의 문화”와 더불어 우리 시대 교리문답의 핵심적인 조항이 되었다. 그 때문에 차이와 다양성을 의견이랄 것까지도 없는 그저 평범하고 시시한 현상 유지의 발언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윤리적 상식과 괴리될뿐더러 심지어 듣는 이를 당혹스럽게 한다. 안타깝지만 이 글에서 우리는 왜 차이와 다양성의 윤리가 당연한 우리 시대의 덕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자세히 짚어볼 여유가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매우 진지하게 반성하여야 할 문제이며, 심지어 윤리적인 것에 관한 사유의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 “본연의 윤리”를 되찾으려 한다면 피하지 않아야 할 질문이란 점은 강조해 두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바디우 식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우리 시대의 다양성과 차이의 윤리가 왜 우리 시대의 몽매주의인지를 반성해보고자 하는 짧은 시도이다.
본론
1. 롤리타 콤플렉스의 실제 현황
이것은 인터넷에서 한 네티즌이 글을 올린 것이다. 자신이 롤리타 콤플렉스 라는 개념을 알게 된 후,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털어 놓은 것이다. 원래는 롤리타 콤플렉스를 자처하는 한 네티즌의 글을 읽고, 자신의 견해와 자신의 경험, 상황 등을 써놓았다.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개념이 생긴 이후,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서 이 현상은 더욱 더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
2. 롤리타 콤플렉스를 권하는 사회
몇 년 전 인터넷에는 5, 6살쯤 되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스타로 떠올랐다. 앙증맞도록 귀여운 아이들의 사진이 유행을 하고 사진 속의 포즈는 도를 더해 세미누드에 가까운 모습까지 등장했다. 이런 흐름은 매스컴에도 반영되어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 모델들이 상품광고에 단골로 등장했다. 일례로 이런 모델 중 하나인 혜원이(8살)는 까페 회원수만 4만 명 이상의 인기 스타이다. 유독 예쁘장한 여자아이들이 부각되는 문화현상, 이것은 단순히 어린아이의 귀여움에 대한 선호를 넘어선 은밀한 욕망과 연결되는 측면이 존재한다. 많은 영화, 혹은 문화평론가들이 언급했듯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로리타 콤플렉스\'가 숨어 있다. \'로리타 콤플렉스\'란 아직 성인이 되기 전의 여자 아이, 특히 10세 이하 또는 10대 초반의 미성숙한 소녀에 대해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심리를 말한다. \'로리타\'는 러시아계 미국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Bladimir Navokov)\"가 1954년 발표한 소설 <로리타(Lolita)>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일본에서 다소곳하고 청순가련한 소녀에 대해 동경하는 심리에 인용해 \'롤리타 콤플렉스\' 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출시된 이수영 뮤직비디오 <꿈에>는 로리타 콤플렉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지탄을 받았다. 6살 어린 여자아이가 진하게 마스카라를 칠하고 새빨간 립스틱을 칠한 채로 긴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성인 여성의 목소리로 \"오늘 밤에 그대여, 와요\"라고 끈적끈적하게 노래를 부르는 장면. 뮤직비디오 제작진은 내용상 성인 여성의 영혼이 빙의된 것이라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만 뮤직비디오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지는 진한 화장과 야릇한 포즈의 어린아이 모습이, 그 조그만 입에서 불려지는 노래 가사가 진정 의도하는 바는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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