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서론 -
◉ 들어가면서.......
- 본론 -
◉퀘벡의 역사와 환경
Ⅰ. 퀘벡의 성립과 발전
ⅰ. 퀘벡과 몬트리올의 형성
ⅱ. 식민지 쟁탈전과 캐나다의 상하분할
ⅲ. 연방법의 제정과 퀘벡의 독자적 의회구성
ⅳ. 퀘벡의 조용한 혁명
ⅴ. 퀘벡 독립의 좌절, 다문화 존중하는 퀘벡으로
Ⅱ. 퀘벡의 인구와 영토
ⅰ. 광할한 땅과 자원
ⅱ. 퀘벡의 인구와 언어
ⅲ. 퀘벡문화의 특성
Ⅲ. 역사성과 전통성
ⅰ. 풍성한 역사적 유적지들
ⅱ. 전통성 내세운 독자적인 음식문화
ⅲ. 창의성과 생동력
◉몬트리올의 특징과 의료서비스
Ⅰ. 삶의 질 높은 국제도시
ⅰ. 새로움과 전통이 복합된 국제도시
ⅱ. 국제적 공인받은 높은 삶의 질
ⅲ. 생동력과 창의성 넘치는 문화도시
ⅳ. 수많은 관광객 불러 모으는 국제적 행사들
Ⅱ. 안전한 환경과 저렴한 생활비용
ⅰ. 안전하고 편리한 생활환경
ⅱ. 다양한 주거지와 인접한 휴양시설들
ⅲ. 낮은 생활비
Ⅲ. 몬트리올의 의료 서비스
ⅰ. 퀘벡의 의료제도
ⅱ. 몬트리올 어린이 병원(Montreal Children’s Hospital)
ⅲ. 지역 의료 복지기관 CLSC
- 결론 -
◉ 들어가면서.......
- 본론 -
◉퀘벡의 역사와 환경
Ⅰ. 퀘벡의 성립과 발전
ⅰ. 퀘벡과 몬트리올의 형성
ⅱ. 식민지 쟁탈전과 캐나다의 상하분할
ⅲ. 연방법의 제정과 퀘벡의 독자적 의회구성
ⅳ. 퀘벡의 조용한 혁명
ⅴ. 퀘벡 독립의 좌절, 다문화 존중하는 퀘벡으로
Ⅱ. 퀘벡의 인구와 영토
ⅰ. 광할한 땅과 자원
ⅱ. 퀘벡의 인구와 언어
ⅲ. 퀘벡문화의 특성
Ⅲ. 역사성과 전통성
ⅰ. 풍성한 역사적 유적지들
ⅱ. 전통성 내세운 독자적인 음식문화
ⅲ. 창의성과 생동력
◉몬트리올의 특징과 의료서비스
Ⅰ. 삶의 질 높은 국제도시
ⅰ. 새로움과 전통이 복합된 국제도시
ⅱ. 국제적 공인받은 높은 삶의 질
ⅲ. 생동력과 창의성 넘치는 문화도시
ⅳ. 수많은 관광객 불러 모으는 국제적 행사들
Ⅱ. 안전한 환경과 저렴한 생활비용
ⅰ. 안전하고 편리한 생활환경
ⅱ. 다양한 주거지와 인접한 휴양시설들
ⅲ. 낮은 생활비
Ⅲ. 몬트리올의 의료 서비스
ⅰ. 퀘벡의 의료제도
ⅱ. 몬트리올 어린이 병원(Montreal Children’s Hospital)
ⅲ. 지역 의료 복지기관 CLSC
- 결론 -
본문내용
지주와 교회의 특권을 승인하는 대가(代價)로 프랑스계 주민이 미국독립혁명에 참가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퀘벡지역을 캐나다연방에서 분리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은 캐나다의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 이것이 짧게나마 요약한 캐나다의 역사이다. 우리는 이중에서 캐나다 내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지역이며 영국계 캐나다인들 사이에서도 아직도 프랑스문화권에 속해 있는 ‘프렌치캐나다(French Canada), 캐나다 속의 프랑스’ 라고 불리는 퀘벡 지방에 대해서 알아 볼 것이다. 퀘벡의 역사와 환경, 문화, 그리고 퀘벡 주의 수도이자 퀘벡에서 가장 큰 도시인 ‘몬트리올’에 대해서 짧지만 캐나다를 이해하고 더불어 국제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 본론 -
퀘벡의 역사와 환경
Ⅰ. 퀘벡의 성립과 발전
퀘벡 땅에서의 최초 인간의 발자취는 약 1만 2천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다. 유럽사람 들이 퀘벡 땅을 최초로 찾았던 시기는 9~10세기경으로, 그 당시는 정착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15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퀘벡 이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유럽인들이 이 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퀘벡에는 상당수의 원주민 부족 체제사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주요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퀘벡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ⅰ. 퀘벡과 몬트리올의 형성
쟈끄 까르티에(Jacques Cartier) 까르티에 [Jacques Cartier, 1491~1557.9.1] - 16세기 프랑스의 항해가, 탐험가. 뉴펀들랜드에 상륙 후, 마그달렌, 프린스에드워드 섬을 발견했다. 캐나다 해안을 프랑스왕령이라 선언했다. 몬트리올 부근을 탐험, 프랑스가 캐나다를 통치 소유하게 되는 기초를 닦았다.
가 프랑스 왕의 명령으로 동양으로 가는 길을 찾아 대서양을 20일 만에 건너 우연히 퀘벡의 첫 관문인 가스페(Gaspe) 가스페(Gaspe) - 캐나다 퀘벡주(州) 세인트로렌스만(灣)에 돌출한 반도.
지방에 도착한 해가 1534년이었다. 하지만 퀘벡에 첫 발을 디디고 영토를 점령했던 쟈끄 까르티에는 이곳에 정착하지는 않고 프랑스로 돌아간다.
이후 오늘날의 퀘벡시를 자리 잡게 한 인물은 1608년의 사무엘 드 샹플렝(Samuel de Champlain) 샹플랭 [Samuel de Champlain, 1567?~1635.12.25] - 17세기 프랑스의 탐험가. 캐나다의 식민지 개척자, 뉴프랑스의 아버지로 유명하다. 왕명으로 캐나다를 탐험, 세인트로렌스강과 포트로열항을 조사하고 퀘벡을 건설했다. 섐플레인호를 발견, 초대 총독이 되었다.
이었다. 원래 퀘벡이라는 말은 인디안 원주민어로 \'강물이 좁아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새로운 프랑스로 불리던 퀘벡은 1603에서 1627년까지 단순한 모피 거래소에 불과했다. 그러나 혹독한 추위로 인해 1609년에는 겨울이 지난 후 프랑스인 생존자가 16명에 이르기까지 되었다.
1634년 트르와-리비에르(Trois-Rivieres) 트루아리비에르 [Trois-Rivieres] - 캐나다 퀘백주(州) 남부에 있는 도시.
가 개척되면서 1642년에는 드디어 몬트리올까지정착촌이 형성되었다.
ⅱ. 식민지 쟁탈전과 캐나다의 상하분할
17세기와 18세기 프랑스의 개척자들은 아카디(Acadie)지방과 생로랑 강가를 따라 정착을 했었다. 삼림지역을 개척하며 여기저기 무역 로를 열어 놓은 이들은 멀리 남쪽으로는 현재 미국의 루이지애나까지 그리고 캐나다 서부 지역까지 진출했었다. 한편 이 시기 영국 식민지는 대서양 연안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이같이 팽창하던 프랑스와 영국간의 식민지 경쟁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1754년부터 1760년까지). 프랑스가 식민지 전쟁에 지원을 거의 하지 않았던 데 반해, 식민지 쟁탈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던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이 승리의 주역으로 나선 울프(Wolfe)는 아브라함 평원의 전투에서 몽깡(Montcalm)이 이끄는 프랑스 군에 승리, 1759년 퀘벡시를 점령하였다.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개척하며 일궈 왔던 몬트리올도 1760년부터 영국군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다.
1763년, 프랑스는 파리협정 파리조약 [Treaties of Paris] - 파리에서 체결된 조약 중 1763년 2월 10일 7년 전쟁의 결과로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가 체결한 조약.
에 의해 누벨-프랑스를 영국에 넘겨주게 된다. 이리하여 퀘벡은 영국의 한 주가 되고 퀘벡에 사는 프랑스인들에 대한 동화정책이 시작되었다. 1965년 당시 캐나다의 인구 69,810명 대부분이 프랑스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권력층은 모두 영국계여서 불어를 하는 사람들의 불만은 날로 높아졌다. 예를 들어 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신교도여야 했는데, 불어권은 모두 가톨릭 신자여서 불어를 할 수 있는 판사가 한 명도 없었다. 따라서 영어로 진행된 모든 재판에서 불어를 사용하는 프랑스계는 부당한 처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773년 12월, 미국에서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보스턴차사건 [Boston Tea Party] - 1773년 12월 16일 밤 미국 식민지의 주민들이 영국본국으로부터의 차(茶) 수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일으켰던 사건.
이 터지자, 긴장한 영국은 문제가 캐나다까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1774년부터 회유책을 쓰기 시작했다.
1791년 영국이 새로 제정한 헌법은 프랑스계의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즉, 식민지에 의회를 만들고 영어권으로 이뤄진 상부 캐나다(지금의 온타리오)-대부분이 미국의 독립 당시에 캐나다로 도망 온 보수 왕당파-와 불어권인 하부 캐나다(지금의 퀘벡) 두 부분으로 구분되었다.
ⅲ. 연방법의 제정과 퀘벡의 독자적 의회구성
새로운 정치제도가 마련됨에 따라, 일부 정치 지도층은 불어권 캐나다의 권리와 세력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며, 독립을 요구했지만 영국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퀘벡 주민의 불만은 나날이 커져갔고 저항군이 결성되어 영국군과 여러 차례 충돌하게 된다. 독립운동의 진압에 나선 영국군은 1838년 마을을 불태우고 부녀자와 아이들을 집 밖으로
- 본론 -
퀘벡의 역사와 환경
Ⅰ. 퀘벡의 성립과 발전
퀘벡 땅에서의 최초 인간의 발자취는 약 1만 2천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다. 유럽사람 들이 퀘벡 땅을 최초로 찾았던 시기는 9~10세기경으로, 그 당시는 정착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15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퀘벡 이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유럽인들이 이 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퀘벡에는 상당수의 원주민 부족 체제사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주요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퀘벡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ⅰ. 퀘벡과 몬트리올의 형성
쟈끄 까르티에(Jacques Cartier) 까르티에 [Jacques Cartier, 1491~1557.9.1] - 16세기 프랑스의 항해가, 탐험가. 뉴펀들랜드에 상륙 후, 마그달렌, 프린스에드워드 섬을 발견했다. 캐나다 해안을 프랑스왕령이라 선언했다. 몬트리올 부근을 탐험, 프랑스가 캐나다를 통치 소유하게 되는 기초를 닦았다.
가 프랑스 왕의 명령으로 동양으로 가는 길을 찾아 대서양을 20일 만에 건너 우연히 퀘벡의 첫 관문인 가스페(Gaspe) 가스페(Gaspe) - 캐나다 퀘벡주(州) 세인트로렌스만(灣)에 돌출한 반도.
지방에 도착한 해가 1534년이었다. 하지만 퀘벡에 첫 발을 디디고 영토를 점령했던 쟈끄 까르티에는 이곳에 정착하지는 않고 프랑스로 돌아간다.
이후 오늘날의 퀘벡시를 자리 잡게 한 인물은 1608년의 사무엘 드 샹플렝(Samuel de Champlain) 샹플랭 [Samuel de Champlain, 1567?~1635.12.25] - 17세기 프랑스의 탐험가. 캐나다의 식민지 개척자, 뉴프랑스의 아버지로 유명하다. 왕명으로 캐나다를 탐험, 세인트로렌스강과 포트로열항을 조사하고 퀘벡을 건설했다. 섐플레인호를 발견, 초대 총독이 되었다.
이었다. 원래 퀘벡이라는 말은 인디안 원주민어로 \'강물이 좁아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새로운 프랑스로 불리던 퀘벡은 1603에서 1627년까지 단순한 모피 거래소에 불과했다. 그러나 혹독한 추위로 인해 1609년에는 겨울이 지난 후 프랑스인 생존자가 16명에 이르기까지 되었다.
1634년 트르와-리비에르(Trois-Rivieres) 트루아리비에르 [Trois-Rivieres] - 캐나다 퀘백주(州) 남부에 있는 도시.
가 개척되면서 1642년에는 드디어 몬트리올까지정착촌이 형성되었다.
ⅱ. 식민지 쟁탈전과 캐나다의 상하분할
17세기와 18세기 프랑스의 개척자들은 아카디(Acadie)지방과 생로랑 강가를 따라 정착을 했었다. 삼림지역을 개척하며 여기저기 무역 로를 열어 놓은 이들은 멀리 남쪽으로는 현재 미국의 루이지애나까지 그리고 캐나다 서부 지역까지 진출했었다. 한편 이 시기 영국 식민지는 대서양 연안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이같이 팽창하던 프랑스와 영국간의 식민지 경쟁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1754년부터 1760년까지). 프랑스가 식민지 전쟁에 지원을 거의 하지 않았던 데 반해, 식민지 쟁탈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던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이 승리의 주역으로 나선 울프(Wolfe)는 아브라함 평원의 전투에서 몽깡(Montcalm)이 이끄는 프랑스 군에 승리, 1759년 퀘벡시를 점령하였다.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개척하며 일궈 왔던 몬트리올도 1760년부터 영국군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다.
1763년, 프랑스는 파리협정 파리조약 [Treaties of Paris] - 파리에서 체결된 조약 중 1763년 2월 10일 7년 전쟁의 결과로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가 체결한 조약.
에 의해 누벨-프랑스를 영국에 넘겨주게 된다. 이리하여 퀘벡은 영국의 한 주가 되고 퀘벡에 사는 프랑스인들에 대한 동화정책이 시작되었다. 1965년 당시 캐나다의 인구 69,810명 대부분이 프랑스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권력층은 모두 영국계여서 불어를 하는 사람들의 불만은 날로 높아졌다. 예를 들어 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신교도여야 했는데, 불어권은 모두 가톨릭 신자여서 불어를 할 수 있는 판사가 한 명도 없었다. 따라서 영어로 진행된 모든 재판에서 불어를 사용하는 프랑스계는 부당한 처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773년 12월, 미국에서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보스턴차사건 [Boston Tea Party] - 1773년 12월 16일 밤 미국 식민지의 주민들이 영국본국으로부터의 차(茶) 수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일으켰던 사건.
이 터지자, 긴장한 영국은 문제가 캐나다까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1774년부터 회유책을 쓰기 시작했다.
1791년 영국이 새로 제정한 헌법은 프랑스계의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즉, 식민지에 의회를 만들고 영어권으로 이뤄진 상부 캐나다(지금의 온타리오)-대부분이 미국의 독립 당시에 캐나다로 도망 온 보수 왕당파-와 불어권인 하부 캐나다(지금의 퀘벡) 두 부분으로 구분되었다.
ⅲ. 연방법의 제정과 퀘벡의 독자적 의회구성
새로운 정치제도가 마련됨에 따라, 일부 정치 지도층은 불어권 캐나다의 권리와 세력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며, 독립을 요구했지만 영국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퀘벡 주민의 불만은 나날이 커져갔고 저항군이 결성되어 영국군과 여러 차례 충돌하게 된다. 독립운동의 진압에 나선 영국군은 1838년 마을을 불태우고 부녀자와 아이들을 집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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